037
“으으,”
제이미는 이 세계에 두통약이 없는 것을 원망했다.
“나 지금 멀쩡해?”
[충분히 멀쩡해, 제이미.]
엔시나는 집으로 내려가는 그녀를 가볍게 두드려주었고, 제이미는 그래도 영 아니다 하는 얼굴로 내려가다가, 어느새 저 밑에서 자신을 기다려준 아린과 서아를 본 순간, 내 저것들을 당장 죽이겠다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으야?”
[제이미!]
엔시나가 얼른 그녀를 막고서 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와아!?” 다음 순간 제이미도 한 대 맞은 듯 등골이 오싹해져서 푸른 눈이 번뜩였다. 혼령 때문이 아니라, 내가 왜 총을 꺼내 들었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잠깐 저기 저 둘을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것도 같았을 텐데…
“으으,”
제이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끙끙거렸다. [익숙해질 거야.] 엔시나가 부드럽게 안심시켰으나, 그래도 영 아니었다. 도대체 그 시히델이라는 년, 얼마나 성질이 뻗쳐서 날뛰었으면 지금 이런 제이미마저 (분명 자기도 인간인데)눈에 보이는 인간이란 인간은 모조리 죽이겠다고 하려는 걸까. 그녀는 유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보내주기 전,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어느새 다섯이나 죽인 그녀의 살기가 자기 몸에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뭐랄까, 어젯밤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서 모든 장기가 움직임을 역행하는 듯 완전히 뒤틀리고 모든 게 충돌하는 느낌.
“언니얘?”
한편 이런 그녀를 보고서 달려온 아린은 허리를 숙이고서, 고개를 떨군 제이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얘?” 당장이라도 음식이며 피며 뭐며 다 토할 것 같은 제이미였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신령이 말했던 '부작용'은 그렇게 오래가진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오늘 안에는 끝날 거라고 엔시나가 말해주었다.
“신령님께서 기억을 보여주셨나요?”
한편 서아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기는 얼굴로 물었고, 제이미는 “그래.” 고개를 끄덕인 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으으아아아–” 기지개를 켜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 앞에서 아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억얘?” 눈을 깜박이는 그녀.
“리냐는 나한테 별걸 다 보여줬지만 난 한 번도 이러지 않았으야. 뭘 보여줬으얘?”
“나중에.”
제이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가자. 지금 몇 시니?”
“야?”
다시 눈을 깜박이는 아린. 제이미는 천천히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아차 싶어서 대답했다. “아, 아냐.” 이 세계에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고 신령이 알려준걸 잠시 잊었다. “가자.” 슬슬 발을 다시 평소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린과 서아도 천천히 내려가며 이따금씩 제이미를 여전히 걱정하는 눈으로 흘끗 돌아봤고, 이럴 때마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아, 서아도 왔니?”
아레인은 셋이 집에 돌아오자 이만 돌아가려는 서아를 보며 웃었다.
“아니, 들어와서 먹어. 밥 많으니까.”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러나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는 서아가 제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걸 보고 제이미는 어쩐지 얌전하더니만 이런 애구나 싶어 먼저 들어갔다. 알아서 들어오겠지 하는데 다음 순간 이진이 머리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방에 먼지가 뭐 저리 많을 줄은 몰랐다고 중얼거림과 함께 걸어오자, 안그래도 머뭇거리던 서아는 얼굴까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 서아? 잘 지냈니?”
“아, 그, 예, 예에!”
이진이 말을 걸자 그대로 석상이 된 서아를 본 제이미는 저런 애를 보면서도 별 감흥없이 밥상에 앉은 이진을 보고, 다시 이런 그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서아를 바라봤다가 코웃음을 쳤다. 뭔 저런, 여기 사람들 참 순수하네.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 덕분에 시히델로 인한 부작용도 싹 사라진 그녀였다.
“서아도 밥 먹고 갈그얘. 그쟈?”
아린이 이런 서아를 보면서 묻자 서아는 로봇처럼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최대한 이진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며 슬금슬금 들어왔다. 그녀가 아린 옆에 앉자 아린은 수저를 건네주고는 “잘먹겠으야!” 역시 아레인이 한 숟갈 먹자마자 언제나 그러했듯 밥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자, 잘먹겠습니다.”
서아가 바로 앞에 앉은 이진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제이미도 곧 수저를 집으려는데, 순간 다시 한 번 그녀가 젓가락으로 여기 앉은 사람의 목구멍을 죄다 뚫어 버려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히려 했고, 이를 엔시나가 재빨리 막아내면서 혀를 찼다.
“도대체 그년이 얼마나 살기를 부렸으면…”
아니면 그 시히델이라는 여자가 혼령이었기에 인간인 제이미에게는 그 살기가 더 강하게 다가왔던 걸까. 반찬 하나 집어들지도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 제이미를 보며 아레인이 입을 열었다.
“머리 아프세요?”
“네, 조금…”
한 손으로 머리를 꽉 쥐는 그녀를 보다못한 엔시나가 밥은 대신 먹어주겠다고 하며 앞으로 나섰고, 제이미는 별 수 없이 자리를 내주었다. 엔시나는 젓가락질을 마치 펜으로 글쓰듯 또박또박, 하나도 흘릴 여지 없이 제이미의 입으로 하나씩 집어넣어 천천히 씹어먹었고, 이를 지켜본 아레인은 제이미가 뒤로 물러섰음을 알고서 다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신령님께서 어떤 기억을 보여주셨는데, 혼령의 기억이다보니 영향이 크게 남았어요.”
엔시나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조금 혼란스럽네요. 그 시히델이라는 분 기억이라고 하던데. 저는 만나본 적도 없어서요.”
“아아,”
아레인이 알만하다는 듯 방긋 웃었다.
“처음 부분이라면 아마 그럴 거예요. 저도 애들 아빠와 죽자살자 싸울 정도였으니까.”
“어떤 혼령인지 아시나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고는 몇 마디 덧붙이는 아레인.
“꽤 오래 전에 살았다고 해요. 제 혼령도 만나본 적은 없다네요. 기억에서 보셨겠지만 마르한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째 그분은 아무 말도 안해주시더군요.”
[잠깐, 어쨌든 친구는 저렇게 살아있는 거잖아. 걔는 혹시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나중에 알겠지.]
제이미의 물음에 답한 엔시나는 어느새 밥을 다 먹고는, 이미 배를 퉁퉁 두드리며 행복한 얼굴로 늘어진 아린, 그리고 아직 다 안 먹고 뭔가 가만히 생각중인 이진을 번갈아 보았다. “안 먹니?” 엄마가 묻자 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곧 남은 밥을 싹 치우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는 그였다.
“죄송해요. 제가 나서긴 했지만 좀 그렇네요. 그쪽 분들은 생전 본 적도 없는데.”
“망령 말예?”
아린이 입을 열자 서아는 놀라서 “망령이요?” 고개를 홱 돌려 이진을 마주했다.
“집회에 가시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어.”
이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와 함께 대답했으나, 순간 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소 흠모하던 사람이 미소지어서라기보단… 아니, 그것도 있겠지만(제이미는 알 수 있었다) 곧 굳어졌던 그녀의 안색은 약간 떨리기 시작했다.
“저, 그, 괜찮겠어요? 갑자기 망령들한테 가신다니 좀…”
“응?”
눈을 깜박이는 이진.
“그들이 뭐 해치거나 하지도 않을텐데. 걱정되니?”
“예!?”
순간 굳어진 채 벌벌 떨던 얼굴에 갑자기 불길이 확 솟자,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제이미는 자신의 얼굴에선 폭소가 확 솟으려는 것을 참으며 물을 한 모금 물었다. “아뇨!” 서아가 얼른 대답했다.
“괜찮겠죠! 이진 오빠라면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는걸요! 네?”
마치 주문을 외우듯 또박또박 대답하자 이진은 하핫 웃더니 네 덕분에 조금 긴장이 나아졌다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진의 감사인사는 다시금 서아의 얼굴을 빨갛게 태워 버렸고, 이를 보며 큭큭거리던 아린은 이진이 방으로 들어갈 즈음 제이미에게 속삭였다.
“눈치챘겠지만 오라부이는 모르얘. 워낙에 얘가 원래 소심하지야만, 이럴 때마다 오라부이도 참 답답햐.”
하지만 제이미는 누구든 간에 이런 상황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마치 동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 “잘먹었으야!” 아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이미는 아레인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아레인이 “어머,” 괜찮다고 하는데도 웃으면서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라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제 여기가 내 집이야. 기분이 좋아진 제이미의 얼굴에 띈 미소에는 간만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타닥,
잠시 공중에 뜬 발은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뛰어올랐다. 눈앞에 나뭇가지가 앞을 막은 것이 보이자 재빨리 몸을 숙여 그 밑으로 피해갔다.
“후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달려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소년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뛰고 또 뛰기만을 반복했다. 여러 나무며 풀이며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선 속에 어딘가 멈출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발을 재촉하는 소년.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건지, 입에서 무거운 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소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