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역시 운동은 실전이 좋으야. 서아도 다른 애들도 대련하면 영 재미없으얘.”
한 번 맞아서 굴러다니고도 아린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어서 가슴을 쭉 펴고 산 공기를 들이마신 그녀는 시원함에 젖어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곧 천천히 뜨는 순간 어느새 영 덩어리가 저쪽에 간 것을 발견했다. “으야?”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것이 들러붙어 있는 소년도 함께.
[그러고 보니, 아까는 저 애 때문에 뛰쳐나갔던 걸까.]
집에서 잘만 놀다가 산에서 뭔가 벌어지자 그대로 뛰쳐나갔던 그 덩어리는 저 나무 밑에 주저앉은 소년의 앞에 둥둥 떠 있었다. 아린은 그 소년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천천히 다가가면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야… 누구얘?”
아무래도 저 사령 씌인 뱀한테 쫓겨다닌 듯한 그 소년. 그러면서 꽤나 험한 꼴을 당했는지 흙에 뭐에 이것저것 뒤집어쓴 소년에게 다가가며 아린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봤다. 흙이 많이 묻어있고 다소 지쳐서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만일 멀쩡했다면 아주… 또렷한 느낌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넓진 않지만 좁다는 느낌도 들지 않게 적당히 드러난 이마와 약간 오목조목한 느낌이 있는 코, 크지도 작지도 않다는 느낌의 입과 귀. 얼굴은 약간 부드러운 곡선 느낌이면서 아린의 또래처럼 보이는 것치고는 약간 작아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럴 것이, 나이는 단지 느낌만으로 그렇게 추정될 뿐, 몸이 건장하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지금 꼴을 벗어나 멀쩡해지더라도 최소한 이진이나 다른 성인 남자들 곁에 서면 왜소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는 정도.
[정말로 처음 보얘. 쟈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분명 여기 사는 인간은 아닌데.]
확실히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소년은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눈이… 아린은 일단 사람의 눈이 보라색인 건 처음 봤다. 눈 주위는 군더더기 없이 연하고 맑지만 그 안에서 감도는 보랏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넓은, 아주 깊고 넓은 동굴 속에 흐르는 냇물을 연상케 했다. 지금은 굉장히 지쳐있기에 그 빛이 약간은 꺼져 있지만, 정신을 차리면 마치 눈에다가 영을 담은 것처럼 아주 깊고도 뚜렷한 얼굴과 눈빛을 가질 것임을 아린과 리니아는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몸집이며 얼굴 형태며 여려보이기도 하는, 마치 겉은 작고 연한데 속에서는 무겁고 깊은 힘이 숨겨진 듯한 느낌. 지금은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아주 어둡고 깊은 바다색을 머금은 흑발이었다.
“으야…”
한편 소년 자신은 아린보다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 영 덩어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녀가 저쪽에서 걸어와 거의 코앞에 왔을 즈음에야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은인을 쳐다봤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소녀. 저 커다랗고 무서운 뱀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치자 순간 소년의 얼굴은 다시 한 번, 겁에 질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버둥거렸다.
“아, 잠깐!”
나무 뒤로 돌아서 내빼려는 그를 본 아린이 놀라서 얼른 달려갔다. 딱 봐도 다리를 다친 듯한 소년이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치는 것을 멈추려고, 아린은 얼른 쫓아가자마자 일단 말부터 건네보았다.
“안 해치니까 걱정 마얘. 괜찮야.”
”……”
소년은 뒷걸음질을 멈추고 아린을 올려다봤다. 머리에 꽃을 달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저 커다란 뱀과 그 안에 있던 듯한 괴물들을 날려 버리고는, 지금 자신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는 소년. 하지만 대답은 영 하지를 않자 아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천천히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괜찮야. 이제 아무 일도 없으니까.”
방긋 웃으면서 다시 말하는 아린. 소년은 소녀가 손을 내밀 때 흠칫했다가도 둥글둥글하면서 맑은 빛을 내는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된 얼굴로 다시 눈을 깜박였다. “야?” 아린이 대답을 기다리며 묻자 소년은 자신의 옆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영 덩어리를 바라보았고, 곧 소녀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그제서야 안정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았다.
아린은 소년이 답하자마자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고, 소년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부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발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 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처음 봐야. 이름 무얘?”
“어…”
이제보니 이 여자애는 말을 좀 이상하게 했다. 하지만 딱히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었으니 대충 넘기고, 소년은 입을 열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솔.”
아주 짧은 이름. “솔?” 아린은 소년을 보며 눈을 깜박이고는 “으야.” 고개를 끄덕인 뒤 소년을 부축해 움직이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둘이 조용히 산을 내려가면서도 솔이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보면 아린은 앞을 보다말고 자기가 구해준 그 소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이런 그녀의 풀빛으로 빛나는 눈에는 이 소년을 굉장히 신기해하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으음,” 다만 소년은 이런 시선을 조금 불편해해서 고개를 딴곳으로 돌리며 애써 시선을 피하던 중, 이제 거의 마을이 보일 즈음에 아린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야. 너 어디서 왔으얘?”
“응?”
갑작스런 질문에 다시 시선을 돌린 그는 아린이 또 자신을 뚫어지듯 보고 있자 고개를 떨구었다. “그, 그게,” 이어서 역시 기가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저 산 어디에서… 이젠 어딘지도 기억이 안 나.”
“으야, 산에서 살다 왔으얘?”
“아니.”
솔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내가 왜 거기 있었는지도 몰라. 그냥, 기억이 안 나. 아무 것도. 언제까지 거기 있긴 그래서 산을 내려오려 했어. 그러다가 저 괴물한테… 그게 다야.”
그렇게 대답한 뒤 아린을 쳐다봤다가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정말이야.”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 소년이었다. 아린은 “야아…”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소년을 계속 쳐다봤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별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여전히 신기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얘가 정말,”
한편 아레인은 어머니 특유의 감에 그동안 아린이 사고쳤던 전과가 더해진 덕분에 어느새 자다 깨서 딸아이를 찾고 있었다.
“어딜 간 거야, 또! 하여간 긴장 놓으면 어디로 사라져가지고…”
이런 그녀의 주변에는 영 덩어리들이 최소한 열 개 이상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빛의 세기를 바꾸면서 흔들리자 아레인은 그것을 노려봤다.
“너넨 뭐 잘한 줄 알아? 애가 또 나갔으면 나갔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따라가기라도 하든가! 설마 또 인간계로 빠지거나 그런 건 아니겠–”
하지만 아레인이 말을 끝마치기 전, 어디선가 다른 영 덩어리가 휭 날아와 다소 지친 듯 약한 빛을 내면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응?” 애들 엄마가 고개를 돌리자 그것은 마치 새로운 소식을 전하듯 위아래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별처럼 반짝였다. 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것이 흘려보내는 영을 전달받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는 아레인.
“산에 올라갔다고? 이번엔 산이야? 게다가 누굴 데려왔다는…”
“어무얘애~!!”
그 덩어리를 추궁하려는 찰나 저쪽에서 아린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아레인이 홱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그녀 주위의 영들은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린을 안내하고 지금 아레인에게 먼저 도착한 그것은 아린에게 돌아가서, 그녀와 그녀가 데리고 온 새 손님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얘가,” 아레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뭐니, 이젠? 그 사람은 대체 누구야?”
“산에서 데려왔으얘!”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린을 보며 한숨과 함께 이마를 감싸쥐는 아레인. 아린은 이런 엄마의 태도에 불만이 생겨 눈이 가늘어졌다.
“무얘? 사령한테 잡아먹히는 거 구해줘서 왔는데, 칭찬해주진 않고 그게 문 얼굴야?”
“하아,”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는 아레인. “그래,” 내가 졌다 하는 식으로 지친 목소리를 내는 그녀였다.
“잘 했다, 잘 했어. 쯧… 그런데… 응?”
그런데 한편으로 그녀는 누가 이런 시간에 산에 갔다가 사령들한테 당할 뻔했는지, 혹시 아린보다 더한 애가 있나 싶어 그녀가 구해왔다는 소년을 본 순간, “잠깐,”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넌 누구니? 못 보던 앤데.”
“아,”
소년은 잔뜩 성을 내다 지친 애 엄마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자 안그래도 지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안녕… 하세요… 어, 그…”
“우리 어무얘.”
아린이 대신 입을 열었다.
“나 놀러다닐 때마다 맨날 저렇게 혼자 속터져가지고, 저러다 홧병나서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야. 그래도 밥은 맛있게 해주얘. 너도 내일 먹어보면 반하야. 그런데 이젠 사람 구해줘서 왔는데 또 뭐가 불만이라고 저러는지 오늘은 나도 좀 화나–”
[아린!]
리니아가 다그치자 아린이 움찔하고는, 곧 자신과 소년을 빤히 번갈아보는 아레인에게 말했다.
“나도 얘 어디서 왔는지 모르얘. 응,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얘. 난 모르야. 너 이름이 뭐라고 했으야?”
“솔.”
누가 들어도 이름부터 짤막한 그 소년을 아레인은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 특이한 눈이며 생긴 건 둘째치고, 웬 애가 갈색 누더기를 덕지덕지 입은 것 같은 느낌에 “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뒤틀리는 그녀.
“일단, 어… 들어가서 씻고 자요… 아니, 씻고 자. 어쨌든 여기 왔다니까 환영해…요.”
아린 또래로 보이지만 어째 기이한 느낌에 상황이 상황인지라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더니 그녀는 곧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아린은 왠지 또 한 소리 할 것 같은 엄마가 곱게 들어가자 표정이 환해지고는, 곧 솔을 부축해서 뒷마당으로 향했다. 앞마당보다는 좁지만 산을 등지고 있어 좀 더 안전한 느낌을 주고,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 뒷마당에서 아린은 솔이 이제 혼자 발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를 놔주었다. 그동안 내려오면서 같이 오던 영 덩어리가 치료라도 해준 걸까, 이제 스스로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를 보며 아린이 물었다.
“혼자 씻을 수 있으야?”
“으응.”
다리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임과 함께 누가 자기를 치료해줬는지도 모르는 듯 신기해하는 그였다. 아린은 “야, 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마당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그럼 먼저 씻으얘. 옷은 오라부이 걸로 벽에 걸어둘 테니까 입으야.”
“어, 응.”
그리고 곧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