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같은 시각, 민이 어디서 기다란 막대기 하나를 주워와서는, 부드러운 흙을 골라 그 위에 꽂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만.”
높이 솟아서는 자신들이 여기 있음을 알리는 그것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그. 그리고 곧 나머지 셋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너희가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는 거지. 언제 서로 싸우기라도 했니?”
“아뇨,”
사미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다지.” 두 번째로 앉은 건 유랑이었다. 사실 그가 대화가 차단된 것에 대한 주범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 가장 조용한 건 그였다. 초생달의 대표는 그렇게 앉아서 자신이 누울 자리의 흙을 영을 담은 손으로 툭툭 치워낸 뒤, 곧 자신은 오늘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대로 누워 버렸다.
“죄송해요. 제가 말을 많이 꺼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어서 민 또한 자리에 앉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진도 앉으며 말을 꺼냈고, 이에 민과 사미가 각각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너 때문이니.”
“애초에 누구 때문인 게 아냐. 그냥 어제부터 뭔가 얘기를 할 수 있는 느낌이 아녔어.”
“네에…”
대답한 이진은 유랑이 했던 것처럼 자신이 누울 자리를 정리한 뒤, 아직 눕지는 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출발하고서 하루가 지난날 밤, 어느새 저쪽에 그들이 거의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무언가가 보였고, 집회가 아침에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이렇게 변두리에서 하루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저쪽 혼령들의 대표들을 만나는 걸까. 총 여섯이라고 민 아저씨가 집회 얘기를 들려줄 때 그렇게 알려주셨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고정적으로 아란 쪽의 대표였으니까. 한편 사미와 유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그였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청화 쪽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니까… 사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고 할 필요도 없어.]
다일이 조용히 충고하듯 하는 말에 이진은 눈을 깜박였다.
[유랑의 경우는, 역시 초생달이 가장 늦게 생겨난 일파일뿐더러, 도대체 영 말이 없으니 역시 모르겠군 그래. 다만 저 인간의 혼령이 계승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몇십 년 전에 잠깐 돌았던 적이 있어. 자세히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자신은 조금 피곤해졌으니 이만 자겠다는 다일. 그리고 자기 전에 [알지?] 한마디를 한 것에 이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늘도 네 명의 대표들은 뭔가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것 없이 각자 혹은 둘이서만 무언가 말을 나누다가 곧 다들 누워서 잠에 빠졌고, 그렇게 모두가 조용히 수면에 든 것처럼 보일 즈음, 갑자기 이진이 눈을 떴다.
처음으로 눈그림자의 대표가 된 청년은 다른 대표들이 자는지를 확인해 보고는, 이곳을 쉴 자리로 정할 때 네 명이 합동해서 쳐놓은 막을 살짝 열었다. 다른 생물이나 사령이 접근하면 자동으로 알리도록 만들어낸 그것의 틈 사이로, 이진은 최대한 조용히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간 뒤 그 틈을 도로 메워 버리고는, 곧 헤매는 느낌도 없이 한쪽 방향, 그러나 내일이면 도착할 목적지가 아닌 다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리고 이 일이 있기 몇 시간 전, 저녁.
[잠깐, 여기는…]
반대로 산을 한참 헤매면서도 소년을 따라 올라온 마르한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이에 속으로 혼령에게 묻는 란.
[왜? 아는 곳이야?]
[보면 모르겠어? 여기, 그곳이잖아.]
대답하면서 마르한이 한 가지를 일깨워주자 란도 “아,” 조금 놀란 얼굴로 지금 자신이 온 곳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전당. 그래, 이곳은 전당이었다. 은처럼 하얗고 밝게 빛나는 돌이 잔뜩 깔려있는 곳. 산 중턱쯤 되는 곳에 자리 잡은 이 전당에는 그렇게 위로 뻥 뚫린 하늘에서 내리쬐는 달과 별의 빛을 받아, 마치 그것과 소통하는 듯 경이로운 반짝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란은 고개를 돌렸다. 평평한 전당의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들은 저마다 다른 높이, 아니 높이는 전부 같았지만 저마다 다른 보존도를 보인 채, 몇몇 기둥에는 심지어 이끼도 조금 낀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당의 뒤로 있는 작은 계단. 그것을 넘어 더 높은 자리에는 어째서인지 달과 별이 더 강하게 빛을 선사하는 느낌도 있었다.
[으야아,]
한편, 저 뒤에서 나무 사이의 틈으로 저 전당, 혹은 광장을 바라보던 아린은 두 눈이 저곳에 비치는 빛보다 더 밝아졌다.
[저거 무얘? 처음 보야. 리냐, 리냐, 저거 아얘?]
[저건 먼 옛날의 광장이야. 전당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야?]
[먼 옛날, 신령들이 살아있던 때, 인간과 혼령들이 대립하던 때에 그들이 신령들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던 곳이야. 예전 동반자들이 시히델의 기억을 볼 때 있었어.]
그러면서 자신도 그 기억을 회상하는 듯 조용해진 혼령. [으야.] 아린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 전당을 계속 바라보았고, 이런 그녀의 앞에서 솔은 천천히 돌바닥 위를 올랐다.
“바로 여기예요.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까 여기였어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란이 바닥으로 올라서며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솔. 아린은 이런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내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계속 여기서만 지내다가 내려간 거였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 커다란 뱀한테 쫓겨서…”
“그래.”
그 이후부터는 모두가 아는 얘기였기에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솔이 저 전당의 높은 곳으로 올라서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란은 그곳을 조용히 둘러보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어 조용히 야단치는 소리를 내는 신관.
“이쯤이면 됐겠지. 난 먼저 내려갈 거니까 너가 이 애와 같이 가라, 아린.”
“으얏!?”
아린도 리니아도 한 대 맞은 듯 화들짝, 거의 경련을 일으켰다. 신관은 이에 그녀가 있는 쪽을 보면서 조그맣게 웃었고, 솔도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고는 “아, 아린,” 놀란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으야,” 아린은 소름이 끼칠 듯한 모습으로 나무 사이로 나오면서 물었다.
“제 여기 있는 거 어께 아셨으얘? 무서우야.”
“방금 너가 알려줬으니까. 혹시 따라왔을까 해서 찍어봤지.”
그리고는 혼자 웃으면서 산을 내려가는 란. 아린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당했어…] 리니아도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너,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한편 솔은 이런 아린을 보면서 물었고, 이에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정신을 차린 뒤 그를 보며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그냥 따라왔으얘. 너가 또 산에 간다길래 조금 걱정했으이.”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아린. “으야!”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는 그녀였다.
“정말 여기서 살다 왔으얘? 신기야. 왜 소야는 여기 있었던 글까야…”
이에 나도 모른다고 고개를 젓는 솔. 그리고 아린은 전당 끝에 올라가 온 산이 펼쳐진, 그리고 그 너머의 광경도 보이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어서 두 손으로 입을 모아
“으– 야– !!”
소리를 질러보는 그녀. 이에 산마다 메아리가 치며 “으–야–” 하고 넘어갔다. 솔은 이런 아린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곧 밝아진 얼굴로 돌아서며 다시 입을 여는 소녀.
“여기 정말 좋으얘! 이런 곳이 있을 거라 진작에 아는 건데. 앞으로 여기 자주 놀러오야.”
“어어…”
다짜고짜 여기 자주 오자고 하는 말에 조금 망설이는 솔. “그래.” 하긴 계속 기억을 더듬으면서 헤맸기 때문이지, 정확히 길을 알고 오면 길어야 두 시간 정도만 올라가면 이곳에 닿을 수 있었다. 아린은 그가 응하자 신이 나서 어린애처럼 전당을 빙 돌아다니고는, 곧 발에 느껴지는 감각이 맘에 들었는지 돌바닥을 타닥타닥, 신나게 밟아보기도 했다. 한편 리니아는,
[그나저나 이상하네. 분명 여기 올라오기 전에는 영이 적게 느껴졌는데, 올라오니까 갑자기 많아졌어. 혹시 이 전당 위로 집중되고 있다든가 그런 걸까?]
[영도 저렇게 달이 짠– 비추는 곳을 좋아하는 거얘. 여기서 보면 달도 별도 정말 이쁘야.]
그렇게 대화한 아린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야!” 손뼉을 탁 치고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기 올라온 뒤로 잔뜩 신이 난 그녀의 태도에 약간 기가 죽은 소년. 그런 솔을 보면서 아린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잊을 뻔했으얘. 어제 내가 영으로 뭘 하는지 보여준다 말했으야?”
“어? 응.”
솔도 까먹었던 듯, 표정이 바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린은 예헴, 헛기침을 하고는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으야! 여기라면 딱야! 지금부터 보여주얘, 잘 보이!”
이렇게 말한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이면서 곧 눈으로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