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1)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당을 나온 여인이 조용히 산 너머 어느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정한 지점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한쪽을 보고 있기에 그녀의 눈은 살짝 멍해 보이기도 했고, 그러다가 바람이 한 번 불어오자 이에 맞춰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는 곧 내쉬었다. “이진이,” 그리고 나서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
“우리 아들이, 이제 어른이구나. 이렇게 가고 나니까 확실히 알겠어.”
그렇게 얼굴은 살짝 미소를 띠면서도, 그 속엔 기쁨이 아닌 다른 것도 자리 잡고 있음을 아는 건 그녀의 혼령뿐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거쳐왔지만,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 감정은 거의 다 똑같았어.]
자신의 동반자를 멀리서 지켜보듯이 하는 태도로 말하는 므릿.
[다 똑같으면서도 하나하나가 인상 깊었지. 지금 너도 그렇고.]
[그래.]
아레인의 웃음에 약간 씁쓸함이 묻어나자 그녀의 주름이 선명해졌다. “어무얘!” 한편, 저쪽에서는 아들에 이어 어른이 될, 하지만 저런 식이면 죽을 때까지 그냥 애로 남을 듯한 딸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서 뭐얘? 쟈 오늘 소야랑 서야랑 언니얘까지 다 놀러 갈려고 하는데 되얘?”
“어딜 놀러 가게?”
아린에게 '놀러 간다'라는 건 일단 마을에서는 벗어난다는 소리였다. 딸아이는 딱히 어디라고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어딘가라고만 말했지만 표정을 보니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 어디 놀러 간다고 하고서 늦게서야 돌아오거나 그랬던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안 그래도 애 엄마인 그녀는 이젠 딸의 얼굴만 봐도 애가 오늘은 얼마나 놀 건지, 놀 장소가 정확히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무작정 가는 건지 등등을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오늘은 일단 어딘가 확실히 목적지가 있는 모양. 그러면 적어도 행방불명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라고 짐작 정도는 가능했다.
“그래, 놀다 와, 그럼. 너무 늦지 말고. 언니 말 잘 듣고.”
“야, 야!”
아린이 고개를 세게 끄덕이자 아레인은 다시 저 멀리 쳐다보았다. 이제 애들한테 가서 허락도 받았다고 신 나서 말하겠지. 하지만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녀는 딸아이가 바로 가지 않고 자신의 옆에서 같이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알았다. “응?” 그녀가 돌아보며 뭐 말할 거라도 더 있냐는 얼굴을 하자, 아린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무얘 오라부이 걱정야?”
”…후후,”
이러는 거 보면 내 핏줄이 맞긴 맞나 보다, 하면서 웃는 아레인. 그녀는 대답 대신 아린을 가까이 불러 꼭 안아주었다. 아린도 엄마 품에서 볼을 부비적거리며 웃었고, 그런 딸아이를 안으면서 엄마는 다시 한 번 저쪽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므릿이 말했다.
[네 말대로 이진은 이제 어른이야. 그리고 저쪽에 친구도 있다고 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혼령이 따듯하게 그녀를 감싸주자 아레인은 속으로 끄덕이면서 아린을 놓아주었다. “제이미는?” 그리고 이런 둘을 저쪽에서 솔이 지켜보는 게 눈에 들어오자 딸아이에게 물었고, 아린은 알면서 뭘 묻냐는 듯 으쓱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고서 지금 저기 해가 중간쯤 갈 때까지,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또 한 번 확인했다. “흐응,” 겉은 대충 나아서 이제 힘을 쓴다든가 해도 뭐가 막 새어나가진 않을 것 같지만, 문제는 지금 그럴 힘이 영 들어가지도 않는단 것이다. 너무 많이 기운을 잃은 탓일까. 물론 그것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아지겠지만–사실 어지간한 혼령이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많이 다쳐온 그녀인지라 느리게라도 낫는 거지–그게 언제쯤일지는 영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오늘도 벌써 그 일이 있고서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제 다 나았어?”
옆에서 마르한이 같이 살펴보다가 묻자 짧게 부정하는 시히델.
“힘이 안 들어가. 애초에 그런 커다란 놈한테 물렸는데 겨우 일주일 만에 나을 리 없잖아.”
자신이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을 별 느낌도 없이, 그냥 남 일처럼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는 마르한. 곧 그는 작게 한탄하고는 그녀 옆의 바위에 기댔다. “저기,” 그리고 다친 친구의 눈치를 좀 보다가 말하기 시작하는데,
“혹시 후회하거나 뭐 그런 거 없어?”
자신도 바로 뒤의 바위에 기대는 시히델. “응?” 그러면서 마르한을 쳐다보자 그는 말하기를 주저했으나, 적어도 아직은 느긋해 보이는 태도를 확인하고 조그마한 기운으로 물었다.
“그 인간 여자 말야. 혹시 그 뒤로 봤다든가 한 적 있어?”
“아니.”
성이 나지도 않고, 딱딱해지지도 않고, 그냥 아무 감정 없이 대답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말에는 가시가 좀 있을 뿐이지.
“그 계집을 다시 봐야 할 일도 없잖아. 왜 물어, 그런 걸?”
“어…”
다시 주저하는 마르한. 하지만 오늘 그녀는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든 별로 화낼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재촉하는 태도만 보였다. 설령 그가 난데없이 그 계집에게 직접 찾아가라느니 뭐라느니 한다고 해도, 오늘은 그냥 대충 듣고 넘길 생각이었기에. 그리고 막상 마르한이 하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받아들일 만했다.
“솔직히, 그러니까 솔직히 하자. 그러니까, 사실 네가 그렇게 다치긴 했지만, 그게, 그게 저 애 때문은 아니잖아.”
시히델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응?” 조금 용기를 냈는지 마르한이 대답을 요구했고, 어쨌든 그녀 스스로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비록 무감각한 태도이긴 해도 어쨌든 긍정했다. 이에 마르한은 조금 더 이 주제를 밀고 나갈 힘을 얻었는지, 그녀를 보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네가 다친 건 그 애 때문이라고 하기도 힘든데, 너는 어찌 되었든 그 짐승을 잡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그 인간은 죽었고. 그러면, 그러면 결국 네가 그 애를 구해준 게 맞다고…봐도 되잖아?”
”…좋아,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시히델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그 인간을 구해줬어. 그리고?”
“그리고,”
마르한은 시히델의 감정 없는 기운에 대고 계속했다.
“아니, 그래서, 그 애는 분명 너한테 감사하려고 찾아왔을 거 아냐? 설마 자기 구해준 혼령한테 욕이라도 하러 왔겠어?”
“아니겠지, 아마.”
시히델이 긍정했다. 하긴 그녀조차도 자신을 구해준 이가 있다면 그게 인간이라고 해도 나름대로의 감사를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인정한 순간, “그러면,”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따지는 마르한.
“물어볼게. 왜 애를 그런 식으로 쫓아낸 거야? 주위에서 말릴 정도로 그렇게 욕이나 하면서 죽일 기세로 난리 친 건 뭐냐고?”
”……”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도 저 계집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가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조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마르한을 포함해 모든 혼령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그녀가 버럭 화를 낸 순간부터는 저쪽에 있는 두 지도자 또한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줬다고 대담하게 인사를 해오는 저 계집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겐 그게 당연한 것 같았다. 화를 내는 게.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시히델이 날뛰면서 뱉었던 말들이… 그래. 같은 혼령들조차 그녀를 말리게 할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애초에 저 계집은 인간이잖아. 아무리 지금 이 상처가 그 계집 때문인 건 아니라고 해도–그녀는 여기까지는 확실히 인정할 수 있었다–상처도 나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서 조금 그런데 불쑥 찾아와서 저런다니. 그녀는 모든 혼령들이 지켜보는 중에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하던 그 계집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렇게 당황한 적도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정신없이 둘러대는 중에도 그녀의 속에는 마치 가시가, 그 늑대의 이빨만큼이나 커다란 가시가 박힌 듯 약간 불편함이 없진 않았고, 이런 그녀의 기운이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걸 느낀 마르한이 한마디 꽂아 버렸다.
“인정해. 네가 심했어.”
“내가,”
시히델이 조금 불편한 기운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심해? 그게 심했다고?”
그녀의 말에 마르한은 대답이 없이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고, 그걸 가만히 마주하다가 슬슬 이런 시선마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 그녀는 결국, 조금 옆으로 피하는가 싶더니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내가,” 그리고 아직 앉아있는 마르한을 내려다보며 맞서는 그녀.
“심해? 그게 뭐가 심하다는 건데! 너 그따위로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 여기 상처 안 보여?”
“으음,”
마르한은 대답하기 불편한 듯 작은 한탄을 흘려보냈고, 이런 그가 다시 뭐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던 시히델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도대체 뭐가 심하다는 건지.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대는 그녀. 심하기는 뭐가 심하단 말야? 그게 심하긴. 심하다니. 그게 심하다는 게 대체… 그게 심하다고? 계속 비슷한 말만 반복하면서 달아나듯 자리를 벗어나는, 아예 어디에서든 벗어날 기세인 그녀의 기운이 탁탁 튀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은 충분히 화낼 만큼 화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듯 상처를 한 번 확인한 뒤 정신을 차리자,
“응?”
그녀는 순간 작은 불꽃처럼 튀기던 기운이 갑자기 굳어 버렸다. 거대하고, 정말 거대하고 어두운 기둥 세 개가 그녀의 눈앞에 솟아올라 있었다. 푹 꺼진 불처럼 아무런 생기 없이, 그러나 매끄럽게 빛나는 세 개의 기둥이 그녀의 바로 앞에 떡하니 있으니, 시히델은 미처 놀랄 것도 없이 그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슬슬 물러났다. “이건,” 뭐라고 막 투덜대면서 무작정 자리를 빠져나가니 어느새 문제의 유적까지 다다른 것이다.
시히델은 이 유적을 만들었다고 하는–사실 그녀는 이 말에 조금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신령들만큼이나 거대한, 단순히 그 크기뿐만 아니라 그걸 넘어선 어떤 감각에서까지 거대하게 느껴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뒤가 따가워 돌아보자 또다시 모든 혼령들이, 이번엔 쟤가 또 뭘 하는 거지 하는 태도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모두의 주목을 받자 왠지 온몸의 기운이 부르르 떨리며 다시 뒤를 돌아본 그녀는, 그렇다고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몰라, 주변에 호리에르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이 자리에 굳어서 유적만 멀거니 봤다.
이제 보니 기둥이 세 개가 아니었다. 가운데의 가장 거대한 기둥과 그것을 감싼, 단순히 감싼 게 아니라 덩굴식물처럼 타고 올라가는 듯한 네 개의 기둥. 그것들은 시히델이 저번에 본 바다에서의 밤과 비슷한 색으로 매끄럽게 빛났고, 다만 그 빛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안으로 가두는 듯한 빛이었다. 한편 가운데의 새까만 기둥은 역시 매끄럽지만 빛이 없어 보이는 대신 그나마 생기가 좀 있어 보였다. 조금 이상했다. 빛은 더 적은데 생기는 더 있다고? 시야를 젓는 시히델. 이건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거지?
[나무.]
“아?”
갑작스런 느낌에 기운이 쭈뼛 서며 뒤로 물러나는 그녀. 뭐였지? 갑자기 나무 같은 게 떠오른 것 같은데? 그녀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 다음 순간,
[서리, 비,]
“와앗,”
다시 한 번 자리를 피한 그녀였다. 갑자기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나무 비슷한 식물이 생각났는가 하면, 다음으로는 서리와 비가 생각난 것. 그녀는 뜬금없이 이런 걸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갑자기 왜 저런 것들이 생각나고–
[바위.]
“응?”
이번엔 바위였다. 딱히 어떤 형체나 모양이 정해진 게 아니라, 그냥 흔히 아는 바위. 세상 어디든 굴러다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이 아니라, 도대체 이런 것들이 왜 생각나는 거지? 시히델은 갑작스런 일이 이어지자 조금씩 겁이 나기도 해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싶어 물러나는데, 그럴수록 그녀의 생각 속에서 다른 여러 가지가 연달아 떠오르기에 도대체 뭘까 싶은 순간, “잠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곧 자리에서 딱 멈춰 섰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의 밑에는 작고 동그란 무언가가 별처럼 약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뭘까? 몸을 숙여서 그중 하나를 주워든 순간, 그녀는 산속에서 조그맣게 흐르는 물이 생각남과 동시에 바로 여기, 그녀가 있는 유적 근처에 이 작고 동그란 것이 거의 모래밭의 자갈처럼 널려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