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그래서, 인간계에 대한 건 지금까진 그게 전부인가.”
간트가 확인하자 다일은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어쨌든 말할 건 모두 말했다 싶어 뒤로 물러나자, 지금까지 가만히 듣던 영령들은 제각기 뭐라고 서로 얘기하거나 중얼거렸다.
”'기계'라는 게 대체 뭐길래 그거 하나에 의지해서 발전해온 거지?”
“의지한 게 아냐. 아마 그것도 하나의 도구겠지.”
“아젤리아가 정말 죽었다면 그녀가 알던 것들이 혹시나 그들 손에 넘어가진 않았을지…”
이렇게 제각기 말을 하는 중에, 공존파 측에서는 조용히 앉아서 중간에 몇몇 이들이 들어와 건넨 과일을 먹고 있었다. 민은 포도를 한 알씩 입에 던져넣는 중이었고, 사미는 조금 딱딱해 보이는 사과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먹고 있었다. 유랑 혼자서만 과일이 아닌 어떤 견과류–다일은 저게 아몬드라고 하며, 언제부터인지 이쪽 세계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를 야금야금 먹는 중이었고, 이진은 귤껍질을 까면서 이들을 둘러보고는 곧 켈샤가 허공에 대고 기운을 휘둘러 보더니 한마디 하는 걸 봤다.
“오늘은 이만 해가 졌으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내일 마저 끝내면 되니까. 다들 수고했다.”
그리고는 먼저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는 그였다. 이런 그를 두고 다른 혼령들은 제각기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는 하나둘씩 방을 나가기 시작했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진은 켈샤가 무엇을 하는지 호기심에 지켜보는데, 그가 보는 앞에서 계승자가 마치 바람을 뿌리듯 영을 가볍게 날리자, 이 안에 모여있던 영 덩어리들이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하면서 방이 점차 어두워졌다. 방을 비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가자.] 그가 일을 마치기 전에 다일이 말하자 이진은 곧 문으로 향했고, 이어서 난간 앞에 선 그를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이진이라고 했지. 수고했네.”
“네? 아, 네에.”
가까이서 보니 정말 거인을 보는 듯한 느낌. 간트가 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젊은 인간이 여기 오는 건 드문 일이라서 말야. 한창 활발할 때에 고생하는군.”
“네… 뭐, 괜찮습니다.”
제법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그에게 이진은 허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자 자신도 긍정하더니 곧 본론으로 들어가는 혼령.
“다일의 얘기는 잘 들었네만, 혹시 다음 집회에는 엔시나를 직접 오게 해달라고 부탁해줄 수 있나? 우리는 그녀의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해서 말이지.”
[이미 그 애가 들은 걸 다 말했는데, 직접 듣고 싶어하는 건가.]
다일이 언짢은 듯이 중얼거렸으나, 이진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간트는 고맙다는 한 마디와 함께 곧 난간 밑으로 풀쩍 뛰어 내려갔고, 이진은 얌전히 영 덩어리 하나를 불러 그것을 잡았다. 등 뒤에서 켈샤가 꺼진 방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계승자가 할 일이 꽤나 많나 보군.]
[마르한도 그렇잖아. 일단 우리 얘긴 내일 하자.]
다일에게 대답한 이진은 곧 유적의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 어느 산,
“다 왔으이! 여긴 왠지 저녁에 와야 좋을 것 같아서…”
아린이 조금 힘들어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먼저 돌바닥 위로 펄쩍 뛰어올랐고, 이런 그녀의 활발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은 솔을 제외하고는 저마다 헉헉대면서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여기가,” 제이미가 투덜거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길래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는…”
그러다가 곧 전당 위에 올라서자마자 [아아?] 엔시나가 놀라서 소리를 내고, 제이미도 자신의 눈앞에 쏟아지는 밤빛에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이는 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달빛이… 그리고 별빛도. 이런 곳은 처음이예요.”
“그러게.”
인간계에서는 물론이고, 이 혼령계에서도 이만큼 달과 별이 밝게 보이는 곳은 없음을 개인적인 직감만으로도 알 수 있는 그녀였다. 엔시나도 이에 동의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무언가 다른 것을 느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저 달과 별에서 영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 그저 내 느낌뿐이지만.]
“그래?”
한편 아린은 어느새 전당의 끄트머리에 가 서서, 솔이 그걸 보며 위험하다고 하는 말에 뒤돌아서 입을 열었다.
“어제 여기 와보고 생각했으야. 앞으로 밤엔 여기서 놀려얘. 솔직히 마을 밑에는 영도 여기처럼 많지 않야, 잔디가 너무 자라서 베이고 아야, 별로 좋진 않았으이. 그지, 서야?”
“응, 그건 그래.”
서아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밤하늘을 보면서 혼자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런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솔을 보고, 제이미를 본 뒤 다시 서아를 본 아린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그리고,” 말을 꺼냈다.
“여기라면 대련하기도 딱야. 서야도 그렇게 생각얘?”
“에?”
순간 서아의 얼굴빛이 변했다. 갑자기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살짝 어두워지면서 천천히 뒤로 빼기 시작하는 그녀. “어, 어,” 그러면서 웅얼거리는 서아를 보고 아린은 “야?” 재촉하면서 어느새 손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지, 지금 늦었잖아. 해도 졌고, 그, 마을에서 너무 멀고,”
“그게 무슨 상관얘? 야? 오늘 한 번만.”
이미 말이 안 먹히는 상황이 되자 서아는 슬슬 눈치를 보더니, 몸을 부르를 떨었다. 그리고 아린은 다짜고짜 이런 그녀에게 “으얏!”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고, 이에 서아는 “아앗–” 입으로는 비명을 토해내면서도 아린의 팔을 탁 잡아, 그대로 옆구리를 쳐서 날려 버렸다. 아린은 그대로 돌바닥에 떨어져 주르르 미끄러졌고, 이에 솔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으야야…”
아린은 끙끙거리면서도 곧바로 일어나고는 옆구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헤헤 웃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대련이얘. 대련. 어차피 친구끼리 가끔 이러고 노는야. 그리고 솔한테도 보여주이. 영이란 게 얼마나 강한야.”
“아니, 나 때문에 그렇게 싸울 것까진–”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시동이 걸린(?) 이상 그건 이미 핑계에 불과함을 엔시나는 알았고, 그걸 제이미에게 말해주며 가만 놔두라고 하자 동반자는 “흐응,” 눈썹을 치켜올리며 솔을 자기 쪽으로 불렀다. “흐얏!” 아린이 다시 한 번 덤벼들자 서아는 소리를 질렀다.
“싫다니까 그렇게 무작정 달려들면 어떡해!”
[또 시작이네. 내가 못 살아.]
리니아는 이미 이런 아린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곧바로 손끝에 영을 모아서 서아를 향해 할퀴듯이 휘둘렀다. 서아는 뒤로 펄쩍 물러나더니, 그녀의 옆으로 몸을 숙이고 빠르게 달렸다. “와,” 제이미의 눈에 그건 마치 발이 여러 개 달린 동물이나 벌레가 재빨리 도망가는 것 같았다. 아린이라면 공중으로 뛰어올랐을 텐데 쟨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름 흥미가 생겨 지켜보는 그녀.
“아, 정말 넌…”
이쯤 되자 서아도 별수 없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두 손을 꽉 쥐고는,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야?” 마치 뱀처럼 지그재그로, 바닥을 기듯 납작 붙어서 달려오는 서아. 자꾸 방향을 달리하며 접근하는 그녀를 보며 아린은 두 손 안에 영을 모았다. [저거,] 꽤나 빠르게 그녀의 손안에 모이는 영을 보며 엔시나가 말했다.
[여기에 영이 많이 흐르는 걸 알고서 일부러 대련하자고 한 거야. 둘 다 싸우다가 영이 부족해지거나 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모르겠어. 왜 유독 여기만 영이 이렇게 많지? 이 주위엔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데.]
“으음,”
한편 솔 또한 어제 아린이 영을 보여주겠답시고 그걸 손에 모으면서, 집에서 보여줬던 것보다 더 빠른 시간에 훨씬 더 큰 힘을 모은 것을 기억했다. 이곳엔 그게 많다는 게 저런 의미일까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또한 저 둘이 '대련'이랍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치고받는 게 신기해져, 어느새 조금씩 아린과 서아의 동작을 손으로만 천천히 따라 하기 시작했다. 저걸 저렇게 하고 저렇게 막는구나 하면서.
“여긴 영이 정말 많구나…”
서아가 중얼거리면서 한 손, 아니 손을 넘어 팔까지 영을 최대한으로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영을 모아 씨 뿌리듯 뿌려대는 것을 피하면서, 그리고 그 팔로 막아내고, 튕겨내면서 다시 바닥에 붙어 빠른 속도로 달렸고, 아린이 그녀가 가까이에 오자 자신도 손에 힘을 주면서 쭉 피고는 그 안에 커다란 덩어리 하나를 모았다.
“흐읍!”
“흐얏!”
둘이 동시에 기합과 함께 손을 뻗어, 그렇게 커다란 덩어리를 손에 쥔 아린과 손에 영을 잔뜩 주입한 서아가 서로 힘을 맞댔다. 곧 바람이라도 크게 분 듯 그 충격이 제이미와 솔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퍼졌고, 이어서 마치 유리가 깨지는, 아니 그보다 더 맑으면서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린의 손에 모인 덩어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터짐과 동시에 서아의 손이 뒤로 튕겨 나갔다. 둘 다 얼굴을 찡그렸으나 서아가 곧바로 다른 팔로 아린을 가격하려 들자 아린은 곧바로 제자리에서 뒤로 재주를 넘어, 그 팔을 위로 차냈다. “으앗,” 서아는 당황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아린은 물구나무를 선 채로 두 팔에 힘을 주면서 몸을 던져, 그녀를 발로 밀어붙였다.
“아하앗…”
서아가 뒤로 멀리 날아가 돌바닥에 뒹굴고, 아린은 그녀의 앞에서 착지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눈을 질끈 감고서 끙끙대는 서아였으나 곧바로 일어나고는 얼굴 표정도 몸도 침착하게 추스르는 모습. 제이미와 엔시나는 동시에 감탄했다. 저만큼 아린 같이 '활발한' 애를 많이 상대했으니 저럴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서아는 이에 대답하듯 이번엔 자신의 몸 주위에 영을 두르기 시작했다. “으야,” 아린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대련을 하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기에. [정신 차려.] 그녀가 몸을 숨겼음을 리니아가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혼령까지 가세한 건지 아린 혼자서는 알아보기가 힘들었기에 자신도 집중하며. 그리고 잠시 뒤 서아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이미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아는 재빠르게 아린의 등 뒤로 움직여서는 한 손을 휘둘러, 영을 모아서 마치 밧줄 형태로 모은 그것으로 아린의 두 팔을 휘감아 뒤로 당기고는, 다른 한 손에 있는 힘껏 영을 끌어모아 주먹을 쥐고 내질렀다.
아린이 숨을 토해내자 서아는 이번엔 발로 그녀의 등을 세차게 차냈고, 이에 아린은 영으로 만든 그 밧줄에서도 풀려나 앞으로 날아갈 정도로 강한 통증과 함께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서아가 이를 놓치지 않고, 아린이 미처 바닥에 뒹굴기도 전에 또다시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달려가서는 다시 한 번, 주먹으로 그녀를 저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으으,” 솔은 그걸 보면서 얼마나 아플지 스스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마치 학습하듯 비슷한 동작을 손장난을 치며 따라 했다.
아린은 공중에 뜬 채로 서아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보고 정신을 차려, 서아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두 손으로 영을 쏘아 보냈다. “아?” 그녀가 아닌 저 바닥을 향해, 그리고 이로 인해 그녀는 오히려 더 높이 떠올라, 자신을 놓친 서아의 위에서 이번엔 저 하늘로 다시 영을 쏘면서 떨어져, 곧바로 그녀를 두 손바닥으로 찍었다. “으흑,” 서아는 그 충격에 그대로 바닥까지 아린과 함께 떨어져 버렸고, 곧 하얀 돌바닥 위에 서아가 내동댕이쳐짐과 함께 아린이 간신히 착지하면서, 몸에 힘이 조금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으야,” 끙끙거리면서도 똑바로 서며 중얼거리는 아린. 그리고 이런 둘의 동작을 따라 하며, 마지막으로 아린이 어떻게 저 바닥 그리고 하늘을 향해 영을 쏘았는지 그 손동작만 조그맣게 따라 하는 솔.
“우와!?”
그리고 제이미는 갑자기 깜짝 놀라면서 옆으로 비켰다. 아린은 느릿느릿 서아에게 가서는,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 있는 그녀에게 “괜찮얘?” 물어보면서 손을 잡았고, 서아는 약간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친구를 보면서 기침을 했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본 순간 아린은 화들짝 놀라면서 “서야!” 얼른 그녀를 일으키더니, 또다시 손에 영을 잔뜩 끌어모으고는 이번엔 그걸 자신의 손에 바르듯이 두르며 서아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미, 미안얘. 여기 너무 영이 많아서… 그걸 까먹었으이. 미안얘.”
“괜찮아…”
목소리에도 힘이 풀려서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그녀에게 아린은 언제 싸웠냐는 듯, 온 정성을 다해 그녀의 상처를 찾아서 영으로 감쌌다. “너,” 서아는 이런 그녀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 흥분해서, 나도 너랑 대련하다 보면 정말 진심으로 해가지고,”
“으야, 미안얘. 으야.”
이렇게 숨을 몰아쉬는 서아와 이런 그녀를 감싸주는 아린. 하지만 다른 둘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다른 쪽에서는 깜짝 놀란 제이미, 아니 엔시나가 솔에게서 살짝 떨어진 채, 역시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의 손을 뚫어지듯 바라보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소년에게 말하는 엔시나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방금 영을 쓴 거야?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