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털썩,
“그, 그러지 말고 서야, 어어, 그러니까,"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자리에 쓰러지는 것 같은 서아를 부축하며, 아린은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미, 미안얘. 정말 미안하으얘, 너무 그렇게, 어어, 미안얘."
“그만 좀 해."
서아가 보다못해 아린을 한 번 노려보자 곧바로 조용해진 그녀. 한편 둘의 뒤로는 엔시나가 묵묵한 얼굴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그 뒤로는 솔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아보다도 더 힘이 없는 발걸음으로.
“너, 방금 영을 쓴 거야? 맞아?"
“야? 언니얘, 아니 엔시나얘 야?"
“아, 잠깐, 그, 어어,"
아까 전당에서 벌어진 일을 다시 돌려보는 소년.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저 둘이 대련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왠지 모르게 조금 들떠서, 몇 가지 동작을 어린애 손장난하듯 조그맣게 따라 해본 것뿐인데, 갑자기 그의 손에서 막혔던 물이 돌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듯, 어떤 기운이 튀어나온 게 아닌가. 이 탓에 안 그래도 한 명이 제대로 뻗어서 중지됐던 대련은, 이만 집에 돌아가자고 하는 결과가 되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고서 약 한 시간, 계속 그는 말이 없었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흐음,"
엔시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군 채 걸어오는 솔. 지금 그에게서는 확실히 영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혼령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엔시나. 혼령은 없는데 영이 느껴진다고? 혼자 고개를 저으면서, 엔시나는 다시 앞을 보면서 걸어갔다. 그런데 어느새 아린과 서아는 산에서 완전히 나가기 직전 딱 멈춰있었고, 그 앞을 보자 란이 그곳에 있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란.
“내가 졌다, 아린."
딱딱한 투는 버리고,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과 목소리로 말하는 그였다.
“앞으로 허락받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최소한 어디 간다고 알려주기라도 좀 해, 앞으로는. 네 오빠도 돌아오려면 며칠 남았는데 그러면 되겠니? 그리고 서아 너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저, 저, 으야,"
아린이 더듬거리자 서아가 말했다.
“산에서 굴렀어요. 집에서 바로 치료받으면 될 거예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서 들어가라고 하는 란. 아린은 서아와 함께 먼저 그녀의 집으로 갔고, 제이미가 이어서 란에게 말없이 끄덕임으로만 인사하고는 아린의 집으로 향했다. 한편 솔은 여전히 근심 섞인 얼굴로 제이미를 따라가는데, “잠깐," 아니나 다를까, 란 아니 마르한이 그를 멈춰세웠다.
“거기 잠깐만 있어보세요."
계승자의 말에 그 자리에 굳은 솔. 그리고 이런 소년을 잠시 눈으로, 그리고 감각으로 훑어보던 마르한은 곧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제 그곳에 갔다 온 겁니까?"
“네에."
솔이 대답하자 마르한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하지만 별 말 없이 “알겠습니다." 짤막한 대답과 함께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였고, 소년은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엔시나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렇다고 하더군요."
곧바로 산길 위의 우물 앞으로 가서, 란이 짧은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보아하니 거기서 아린과 서아가 대련을 한 모양입니다. 심하게 다쳤더군요. 아마 그곳에 영이 이상하게 많아서 그럴 거라고 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한 거지."
신령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언제나처럼 잔잔한 수면 위에 서서 저 별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도 느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저 아이를 잘 지켜봐야 할 것이야."
“하지만 그 성격은 꾸민 게 아니라서,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정말로 착한 애던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느냐."
신령이 천천히, 발도 몸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누가 그녀를 빙 돌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돌아서서,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란을 보면서 조용한 소리와 기운을 동시에 냈다.
“경계하라는 것이 아니야. 단지 지켜보라는 거다. 그리고 앞으로 그 광장엔 가게 하지 마라."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끄덕이는 란. “네." 그리고 허리를 숙인 뒤 산을 내려가는 그를 보다가, 유는 다시 몸을 돌려 저 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곧 우물 밖으로 걸어나가자 그녀의 몸이 닿는 땅에서는 마치 꽃이 빠르게 피어나듯, 작은 불꽃이 파랗게 솟았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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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이진은 하품과 함께 몸을 쭉 피며 걸어왔다. “응?" 이런 그를 먼저 발견한 건 사미.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오는 모습은 별로 피곤해보이진 않는 그였고, 이런 그를 훑어보면서 묻자 이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대답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이진.
“밖에서 놀다 왔어요. 다른 분들은 어디 있나요?"
“너 찾을 겸 먹을 것좀 구하러 갔지.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도–"
“흐으응,"
한편 주위의 혼령들 중에서 이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 명이 나와서는 말을 열자, 그 활발하면서도 날이 선 느낌에 이진은 움찔하며 옆을 보았다. “너," 하지만 랭은 그가 아닌 사미를 보면서 물었다.
“청화 소속이랬지? 어쩐지 맘에 안 들었어. 너희쪽 인간들은 아직도 우리를 망령이라 부르고 있더냐?"
"……"
어제 그녀의 말실수를 잡아서 찌르는 랭을, 사미는 아니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딱 어린애가 어른의 말실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태도. 단, 그 말실수란 게 정말 누가 들으면 기분나빠할 것이었기에–사실 랭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도 켈샤와 세느를 제외하고는 제각기 그 말에 제각기 반응했지만–여기서 뭐라 할 수는 없는 그녀였다. 사미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이런 자신의 입장을 잘 알면서 조용히 대답하는 그녀.
“그건 어제 분명히 사과했어. 하지만 나 하나 가지고 우리들 모두를 그렇게 묶어서 뭐라 하는 건 아니잖아."
“흥, 그거야 그렇지만."
랭은 한 발 물러서는 태도였으나 그래도 여전히 사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그리고는 마치 사람이 고개를 뻣뻣하게 높이는 것처럼 몸을 세우면서 무언가 말하려는데, 마치 이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슬슬 막아야겠다고 나선 듯, 다른 혼령 하나가 그녀의 기운을 가볍게 눌러 쳤다. “으왓," 어제 집회에서 지화일 다음으로 가장 말이 없던 여성, 페르였다.
“손님을 너무 홀대하면 안돼, 랭. 이럴거면 먼저 들어가 있어."
“아, 왜 꼭! 내가 입만 열면 누가 끼어드는 거야? 세느도 간트도 페르도 그런 식으로–"
“어서."
별 감정도 섞이지 않은 딱딱한 기운으로 못을 박자, 투정부리던 랭도 별 수 없이 먼저 유적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는 페르. 이진은 그녀가 이렇게 있는 도중 작은 한탄을 내보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닫힌 문틈으로 새어나오듯, 짧고 희미하게.
“혼령이나 인간이나 어린아이가 저러는 건 비슷하니 이해해줄 거라 볼게."
“그래야지."
하지만 이런 페르에게조차 웃음 없이 짤막하게 대답하는 사미였고, 곧 페르는 몸을 살짝 숙이더니 자신도 유적 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구나. 어느새 저쪽에서 민과 유랑이 아침을 구해오는 게 보였다. “하여간," 한편 여전히 두 혼령이 사라진 유적 쪽을 보면서 말하는 사미.
“저 페르라는 애가 더 맘에 안 들었어, 전부터. 볼 때마다 이상해가지고…"
“뭐가 이상한데요?"
이진이 묻자 사미는 흠칫하더니 그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그가 옆에 있다는 걸 잠시 까먹었다는 듯한 얼굴.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민과 유랑에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이진은 눈썹만 치켜올리다가, 곧 자신도 아침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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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난초가 부드럽게 핀 집 마당에서, 제이미가 두 번째로 인사를 했음에도 대답이 없자 그녀는 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방을 하나씩 둘러보다가 그 중 하나를 보자 안에서 아린과 서아의 모습이 살짝 보였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마에 약, 아니 일반적인 약이 아니라 영을 섞어서 바른 거라고 엔시나가 설명해주는 것을 바르고 자는 서아, 그리고 이런 그녀를 꼭 껴안고 자는 아린이 있었다. 제이미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애가 정은 있다고 저렇게 잘 때까지 달래주고 싹싹 빌었던 모양. 그리고 누가 왔다는 기척을 느꼈는지, 코를 드르렁거리는 아린 옆에서도 얌전히 자던 서아가 눈을 떴다.
“아, 안녕하세요…"
작게 웅얼거린 그녀는 자면서도 매달려 있는 아린을 보며 약간 비틀린 웃음과 함께 슥 밀어냈다.
“화 안났다고 하는데도 계속 이래가지고 참,"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며 미소짓는 제이미. 그리고 눈을 비비는 서아에게 얼른 말해주는 그녀였다.
“애 일어나면 나 이제 또 신령한테 가야하니까, 괜히 여기서 폐 끼치지 말고 얼른 집으로 오라고 말해줘."
서아가 끄덕였다. “네." 그리고 아린의 볼을 쿡 찔러보자, 소녀는 자는 중에도 배는 고픈지 입만 쩝쩝거리다가 다시 코를 골았다. 이를 본 제이미는 서아에게 잘 있으라 하고는 곧 집을 나섰고, 그렇게 크고 작은 난초들을 넘어 다시 마을로 나왔다. 다시 신령이 있는 곳으로 가기 전에 저 너머로 뜬 해를 가만히 바라보는 제이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내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몸을 청소하고 나왔다.
[다일은 잘 하고 있을까.]
엔시나가 중얼거리자 제이미가 아무 걱정도 없이 시원하게 말했다.
“너보다 더 빨리 여기 와서 살았다는데 뭘 걱정하고 그래? 들어보니까 그… 망령 말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쪽도 딱히 적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음, 잘 모르겠어.]
언제나 다 안다는 듯이 말하고, 그만큼 기죽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그녀가 이러자 제이미는 조금 불편해졌다. 그러다가 왠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도 느껴졌고, 이를 그대로 물어보는 제이미.
“그 아젤리아였나, 걔가 죽었다고 쟤도 걱정하는구나, 넌."
[……]
“그런데 정말 죽은 거 맞아? 찾아보면 어디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 더이상 나 말고 다른 혼령은 없었어. 분명히 확인했으니까.]
“그으래…"
제이미는 지금 엔시나가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전해주진 않는 모습에, 말로는 동반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별 많은 걸 나누지 않는 그녀가 조금 그랬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라면, 딱히 비밀도 없어야 할 게 아닌가? [그건,] 그리고 엔시나가 이에 대답했다.
[언젠가 너도 이해할 거야, 제이미. 나에 대한 것도, 네 엄마에 대한 것도 다.]
“그리고 그 전에 저 애가 보여주는 걸 다 보라는 거고. 안 그래?"
[나도 저 기억은 처음이니까. 시히델과 프리아라는 이름만 꽤 들었지.]
“아, 맞아. 말 나와서 말인데, 그 호구 기집애는 둘째치고, 시히델이라는 그 사람, 아니 혼령 어떻게 된 거야? 적어도 여긴 없는 것 같은데."
[그건 나도 몰라. 저쪽에도 없다는데.]
“죽었나, 그럼?"
제이미가 자신이 지금까지 본 기억을 떠올려봤다. 지금까지 그녀가 봤던, 아니 직접 경험한 시히델의 모든 감정과 생각이 마치 인물사전을 영상으로 보듯 빠르게, 그리고 선명하게 스쳤고, 지금 그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이상해지는 그녀였다. “맞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주제를 돌리는 제이미.
“그, 둘이 뭔 얘기를 하러 거기 갔다고 했지? 이진이랑 다일."
[사령들. 사령들이 좀 이상하다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