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좋아."
제이미는 어느새 영 덩어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걸 지켜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히델의 기억이 다시 멈추고, 그녀는 신령 유가 제이미 그리고 엔시나와 접촉하도록 부풀렸던 영 덩어리를, 자신의 기운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진정시키는 느낌과 함께 조금씩 작아지게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얌전히, 혹은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말하는 유.
“이제 엔시나의 기억은 다 받았다."
“벌써?"
수백 년 동안 이것저것 보고 겪은 걸 벌써 다 받아냈다고? 제이미의 눈이 동그래지자 유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전에 말했지만 이건 네가 인간계에서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이야."
어느새 영 덩어리의 크기는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고, 지금 제이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모습의 유는 그것을 천천히 당겨 품에 안고는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로 어린애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게 원래는 훨씬 거대했다고 했는데, 그걸 억지로 저렇게 줄여놓은 것을 저 덩어리 스스로는 좋아할 리가 없겠지. 저 영을 뭉쳐놓은 게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느낌은 전부터 받았던 그녀였기에, 대충 그럴 것이라 여기고 넘겼다.
“이제 앞으로는 굳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렇게 덩어리져서 작아진 영을 쓰다듬으며 신령이 말했다.
“시히델의 나머지 기억은 이미 엔시나가 공유했으니, 앞으로 알 수 있을 것이야."
“으응."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히델의 기억을 보다가 중간에 끊은 건 처음이라 그런지, 다리가 저려옴을 느낀 그녀는 유 또한 이를 알았는지 그녀의 다리 위에 자신의 기운을 대자, 저리던 것이 마치 막힌 목이나 코가 뻥 뚫리듯 사라지는 것에 흠칫했다. 지금까지 이랬구나. 하긴 몇 시간 동안이나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있었는데–엔시나가 그냥 편하게 앉는 건 예의가 아니라나 뭐라나–그냥 멀쩡했었을 리가 없으니까. 어쨌든 유는 그렇게 제이미가 바로 일어서서 나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뒤 말했다.
“이제 며칠 뒤면 집회에 간 대표들이 돌아오겠지. 그들이 오는 대로 의식을 시작할 것이다. 어느 일파로 들어갈지는 정했느냐?"
“난… 서릿눈. 아무래도."
당연한 듯, 제이미가 간단하게 대답하자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유 또한 조용히 긍정했다. “좋다." 그녀가 대답하고는 이제 그만 나가 보라고 말하자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다가 앞으로 이제 이곳에 올 일이 별로 없다는 말에, 왠지 발이 조금이라도 이곳에 더 머물려는 듯하여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유가 빤히 쳐다보자 “어,"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하고 입을 뻥끗거리다 뭐라도 물어보는 그녀.
“그냥, 묻고 싶은데, 정말로 얘… 엔시나 기억을 다 본 거야? 내 기억도?"
“그래."
대답하는 유의 모습은 천천히 어린아이가 되고 있었다.
“이미 말했지만, 그 모든 건 결국 너의 기억이야. 그만큼 소중히 하거라."
다시 한 번 조언하는 그녀. 제이미는 이런 신령을 보면서 뭐라고 더 말할 듯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방을 나갔다.
한편, 제이미 말고도 오늘 신령을 만난 이는 이후 아린의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소야," 속이 안 좋다는 그를 놔두고 밖에서 놀다가 돌아온 아린은 조용히 앉아만 있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왠지 속이 불편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괜찮으얘? 무슨 일 있으야?"
“아니, 별일 없어."
솔은 두 다리를 붙이고 아픈 사람처럼 앉은 채로 아린에게 웃어 보였다.
“오늘 잘 놀다 왔어?"
“으야. 소야 없으니까 왠지 심심했으이."
아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솔은 “미안." 대답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밖에 나가긴 싫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그를 보고 있자니 아린은 아예 자신이 속이 불편해졌고, 곧 이런 소년의 옆에 자신도 두 다를 붙이고 앉아, 무릎을 팔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으얘. 맞지야? 소야가 조용한 야긴 해도 이렇게 조용하진 않잖야. 말해보얘. 무슨 일 있었으얘?"
“별일 없었다니까."
아린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만 내려다본 채 웅얼거렸다가, 이런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이 없는 그녀에게 결국 한 번 눈을 슬쩍 마주하며 “정말로." 하고는 다시 고개를 홱 돌리는 그였다.
[저러면 너무 솔직하잖아.]
보다못한 리니아가 한마디 하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고, 아린은 계속 말없이 솔을 쳐다보다가 저쪽에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솔은 이런 아린의 뒷모습만 가만히 보면서 계속 방에 앉아있기만 했다.
“언니얘, 언니얘,"
이제 집에 들어오는 제이미를 보자마자 아린은 얼른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잡아끌고 갔다. “어어?" 평소처럼 웃으면서 안기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다짜고짜 끌고 들어가는 태도에 제이미가 당황했다.
“무슨 일이야?"
어쨌든 방문을 닫고 들어온 제이미. 아린은 “으이," 평소와 달리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며 언니에게 물었다.
“그, 오늘 소야 신령님한테 간 거 맞으야?"
[아, 그러고 보니 그게 그 애였구나.]
먼저 대답하는 엔시나. 시히델의 기억을 보던 도중 다른 영을 느꼈던 것이다. 신령 유와 구별되면서도 란, 마르한의 것이 아닌 조금 독특한 느낌의 그것. 그리고 이를 들은 제이미가 끄덕이자 아린이 시선을 기울여 방 밖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이어서 물었다.
“그럼얘, 오늘 소야가 뭔 얘기 들었는지 말해줄 수 있으이? 비밀로 지키는 야."
“어어,"
제이미는 엔시나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혼령은 자신도 시히델의 기억을 보느라 무슨 말은 듣지 못했음을 알려주었다. 단지 은연중에 그가 왔다 간 것만 느꼈을 뿐이지. 그리고 제이미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어떤 거 보는 중이었거든… 걔가 왔다 간 것만 알지 잘 몰라."
“으야,"
아린은 입이 삐죽 나오면서 몸을 막 꼬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눈썹이 올라가는 제이미. “왜?" 그녀가 묻자 아린은 다시 한 번, 문 앞에 누가 없나 확인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소야가 오늘 이상야. 어제 영 썼을 때부터 이상했던 야, 오늘 신령님한테 갔다 오니까 애가 푹 죽었으이. 놀지도 않고, 계속 방에서 저러고 있으얘."
“그래?"
제이미는 바로 몇 분 전 저린 다리도 풀어주며 조언도 해주는 등, 어쨌든 나름대로 친절(?)했던 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그런 애가 악의적인 말을 했을 리는 없고, 하지만 원래 애가 좀 소심하긴 했지만 저렇게 틀어박혀 있다는 말에 제이미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고, 이에 아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더이상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아직까지는 (평소에 자기가 그렇듯) 하루 자고 나면 애도 좀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며.
하지만,
“야?"
아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벌써 들어가이?"
다음날도 어찌어찌 밖으로 나와 놓고서, 그냥 마을 밑에서만 좀 돌아다니다 바로 들어가는 소년. 아린은 이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즉시 후다닥 달려가서 그의 앞을 막고 섰다. “소야," 흠칫한 그에게 말하는 아린.
“너 이상야.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으야. 야? 말해보이. 신령님이 뭐라고 말하셨으얘?"
“별거 아니라니까."
솔이 말하고는 아린의 옆으로 비켜 가려 했으나, 똑같이 옆으로 움직여 다시 막아서는 아린이었다.
“으야, 어제부터 니 얼굴에 다 써있으이. 애가 그렇게 죽어가지고… 사내애가 뭔 말 좀 들었다고 그러면 못쓰야!"
마치 자기가 어른이라도 되는 마냥 (나이만 따지면 어른이지만서도) 다그치는 아린. 하지만 솔은 이 말에도 별 큰 반응이 없다가, 다음 순간 아린이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아!" 언제 다그쳤냐는 듯 눈이 반짝이며
“그럼 오늘 산 가얘! 너 거기 좋아하니까, 가면 나아지야. 야? 오늘 가–"
“아, 안돼 거긴!"
말하는 것을 갑자기 막는 그였다. 아린이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가, 곧 자기가 너무 크게 반응했음을 알고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그였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그냥 집에 있을게. 응? 아린, 부탁이야. 그냥 집에 있으면 나아지니까. 그래도 되지?"
“으, 야아,"
아린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를 휙 지나쳐서 집으로 가는 솔을 멍하니 쳐다보며, 혼자 고개를 갸웃했다.
[쟤 왜 저러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으야. 일단 오늘은 됐으이."
자신도 솔이 저러는 걸 보니 맥이 빠져, 천천히 그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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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음 날,
“후우,"
마침내 마을로 들어오자마자 숨부터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닫게나."
민의 한 마디로 숲으로의 입구가 반응하고, 그 일행의 맨 앞에서 이진은 마치 몇 달은 여행하고 온 기분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역시 집은 좋아.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일이 웃었다. 그리고 “수고하셨어요." 사미가 먼저 말하고는 산길을 올라가려 하자 그녀를 멈춰세우는 민.
“신령님께 가서 얘기하는 게 우선 아닐까 싶은데. 이번에 좀 들은 게 많잖아."
“아,"
사미는 조금 내키진 않는다는 얼굴로,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발을 움직이는 일행과 맞춰 걸어갔다. 그렇게 가던 도중, 저쪽에서 갑자기 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 왔으야! 왔으야! 오라부이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냉큼 달려오는 아린은 이진에게 와락 안겨서는, 얼굴을 마구 부비적거렸다. 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미 그리고 심지어 유랑마저도 이런 아린을 보고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는 듯, 조용히 입을 가렸다.
“어, 어어, 아린. 응, 일단 집에 가서 있어. 나 먼저 신령님한테 갔다 와야 하니까, 응?"
“야, 야, 갔다오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린. 그리고 이진을 놓아준 뒤에서야 나머지 셋에게도 인사하고는, 산길을 올라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한결 밝아진 마음으로, 오늘은 일이 잘될 거라는 기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풀어서 들어가는 아린.
“응? 그랬구나. 으응, 다행이네."
그러나 아니었다. 솔은 오늘도 조용했다. 오늘은 마치 무언가를 계속 고민하다가 반쯤 지친 얼굴을 하고서, 건조한 대답을 하는 걸 본 아린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소야!!" 아린은 말하면서 자신도 속이 터지는 느낌에 생각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애가 그럼 안되이! 뭔 말을 들었다고 그렇게 죽어있으야! 소야가 약해지는 거 보기 싫은데 소야는 자꾸 앉아만 있으야!"
"……"
솔은 대답이 없었다. 기어이 화를 내는 아린 앞에 고개만 떨군 소년을 보고, 아린은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찡그린 얼굴로 그를 계속 응시하더니 결국 그의 팔을 덥석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너," 살짝 겁먹은 소년의 코앞에서 아린이 말했다.
“오늘 산에 가는야. 거긴 영도 많고, 네가 좋아하는 곳이얘. 가서 영이라도 한 번 실컷 쏴보면 나아지든가 하는야. 알았으이? 오늘 가는야!"
“아, 난 괜찮다니까… 갈 필요 없다고…"
솔이 뭐라 웅얼거렸으나, 성난 기세로 들이미는 아린 앞에선 개미 소리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하고서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간 아린을 그는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긴 한숨이 소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