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에필로그)
마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유적 앞에 하나가 되어가는 이들. 인간도 혼령도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충돌 없이 모여 사는, 옛날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미소 짓는 그였고, 그러다가 한쪽을 바라보자 그의 시야엔 연보랏빛이 섞인 머리를 한 인간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프리아. 그리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히델. 그는 이 둘을 지켜보며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 모든 감정, 그 모든 죽음 속에서 길도 제대로 찾지 못하던 게 엊그제만 같았는데, 이렇게 끝나 버리니 그는 굉장히 기쁘기도 했고, 한편으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죽어나간 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등, 이렇게 바위 옆에 앉아 조용히 생각했다.
사실 그는 신령님들이 다시 보고 싶었다. 시히델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열정적인 학생이 아니었던 그는, 그분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너무나 많은 후회를 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을, 하나라도 더 질문해야 했다고. 사실 그가 유적에 기대했던 건, 사라진 신령님들이 어떻게 된 건지 그곳에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이었다.
“아, 마르한. 안에 들어가 보려고?"
“네에."
물론, 그분들께서 남기신 게 틀림없다는 유산을 찾아냈으니, 그리고 더이상 싸움은 없게 되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는 계속 마음속 어딘가에 박힌 뾰족한 모래처럼, 그럼 신령님들께서는 어떻게 된 걸까, 어디로 사라지신 걸까 하고 잊을만하면 또다시 묻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 일이 이미 예정된 일이거나 했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어떤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는 어느새 구슬들이 있었던 그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 잠깐, 마르한. 지금 그,"
“네? 왜요?"
문 앞에 있던 몇몇 혼령과 인간 중 하나가 그를 막자, 조용히 기운을 구부린 마르한. 무슨 일이냐는 태도로 묻자 그 혼령은 꽤 난감해 하는 듯,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고집이 세더라고. 너라면 말이 좀 통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누가요?"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마르한은 그 혼령에게 비키라고 한 뒤, 문을 스윽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곧 그의 눈앞에서 조그맣게 빛을 내며 맞이해 주는 구슬들. 마르한은 시히델이 쉬지도 않고 만지작거리던 그것들을 둘러보다가, 이번엔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그것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는 걸 발견했다. “어?" 마르한의 기운이 곤두섰다.
“켈샤? 어쩐지 안 보이더니…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으음?"
시히델과 더불어 그의 또 다른 오랜 친구인 그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누가 들어왔나 하고 기운을 곤두세운 그였으나, 그게 마르한임을 알자 경계를 낮추고는 잡고 있던 구슬들을 천천히 내려놓는 켈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분들도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해줘."
켈샤는 조금 미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더 우선인 모양이었다. 다시 구슬을 몇 개 들고서는 유심히 바라보는 그를 마르한은 잠시 지켜보다가, “뭐해?" 조용히 물어보았다. 이에 방해받은 그가 다시 기운을 조금 세우면서 대답했다.
“그냥, 확인 중이야. 이것저것. 유적 밖의 조각들에선 영 답이 나오지 않아서."
“답이라니?"
마르한이 물었다.
“어차피 시히델이 다 찾아냈잖아. 그래서 유적도 열었고, 우리한테 필요한 건 다 그 안에 있었으니까, 으음,"
하긴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하니까 몇몇 이들이 이 방을 찾아오는 거지만. 마르한 자신도 마찬가지임을 알고서 말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령들과 함께 말야?"
“어?"
그의 말에 흠칫한 마르한. 켈샤의 지금 말에서 그는 묘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너는," 그가 말했다.
“저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저렇게 혼령과 인간이 하나가 돼서, 한쪽이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도 못하는 게?"
“어어, 글쎄."
평소엔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마르한과 이런 친구에게 계속 말하는 켈샤.
“아마 넌 내가 신령님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으음, 사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적어도 너한테는 거짓말 안 할게. 그런데 정말로 모르겠어. 신령님들께서 우리한테 이걸 남겨주셨다면, 왜 그 괴물들이 같이 있었던 걸까. 계속 신경이 쓰이더라고. 계속…"
그러면서 자신의 기운으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곧 한탄을 내뱉고는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움직여 왔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어. 와줘서 고마워, 마르한. 하지만 다음부터는 혼자 해도 되지?"
“어, 으응."
약간 당황하면서 인사한 그를 뒤로하고, 켈샤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마르한은 따라가지 않은 채 예전에는 조용하다 못해 소심하기까지 하던 친구가, 저렇게 문을 박차고 나간 쪽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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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온 걸까.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나무에 풀, 꽃뿐이었다.
소년은 잠을 떨치고 일어나 보았다. 정말로, 그의 주위엔 그것 뿐이었다. 온통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생명뿐이지, 발이나 날개 등이 달려서 움직이는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햇빛이 쏟아지는 밑으로 내리막길이 보였고, 그러나 역시 무언가 움직인다 싶은 것은 저 멀리서만 보였다.
자리에 주저앉듯 앉은 채 자신의 몸을 확인해 보는 소년. 이제 막 잠에서 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가끔 찾아오는 편함에 한숨을 푹 내쉬며, 그는 눈을 감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조용히 감은 눈앞에서 비록 며칠간의 짧은 일이지만 그동안 알아낸 너무나 많은 사실이 지나갔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해가 거의 다 뜨고, 아침 땅거미도 다 사라진 뒤였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래, 이만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 곳곳을 한 번 돌아다녀 보든가 하자는 게 지금 새롭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마치 아린처럼. 그래, 그 애처럼 생각한다면 적어도 우울해질 일은 없을 거라 믿으며, 한편으로는 그 활발함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곧 치워 버리는 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내려, 오늘 잠시나마 잘 자리를 내어준 꽃들에게 감사하는–
“아?"
소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자다가 한 대 치기라도 한 걸까, 꽃과 풀은 힘없이 시들어 있었다. 소년은 옆의 풀더미도 보았다. 역시 그것 또한 아무런 생기 없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렇게 시선을 내린 채 한 번 빙 둘러보자 “아아…" 완전히, 그의 주위가 온통 쳐지고 쪼그라든 꽃과 풀 투성이었다.
“도대체, 왜…"
자신의 주위에서 무엇도 못하고 죽어간 생명들을 보며, 솔은 일어나려던 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죽은 꽃처럼 축 처진 얼굴로 그는 밑의 흙까지 이상하게 차가워졌음을 느끼고, 이젠 아무것도 보기 싫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싫어, 이런 거. 정말 싫다고.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