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제이미,]
“그만."
마루에 올라오는 발소리가 굉장히 거셌다.
[제이미, 조금만 더 들어봐.]
“그만하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이미는 얼굴에 불이 나서는 성큼성큼 자기 방으로 걸어가려다가, 잠시 멈춰서 이를 악문 채 한숨을 내쉬고는 뒤뜰로 향했다. 시원한 물이라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제이미,] 엔시나는 아까 길을 내려오면서부터 그녀에게 별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으나, 그걸 제이미가 들을 리 없었다. 그래서 뭐야? 결국 뭐라고 지껄이든 결론은 그거잖아?
“왜 저러니?"
이런 제이미의 모습을 본 아레인이 묻자 이진은 쩝, 입가가 삐뚤어졌다.
“곧 알게 될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리고 정말 곧 폭발하는 소리가 뒷마당에서 여기까지 크게 들려왔다.
“내가 왜 거길 다시 간다는 건데! 너 내가 왜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잖아, 응? 알잖아! 그런데 이 난리를 만들어놓고선 이제 와서 돌아가? 돌아가서 뭘 하겠다고? 총질? 칼질? 해킹? 아니, 아니, 좀 닥쳐. 네가 내 말을 들어! 막말로, 좋아, 건너갔다 치자. 거기서 잡히면 어쩌게? 어? 니는 뭐, 무슨 수백 년 동안 거기 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옮겨다니고 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겠지. 사람이 죽어도 너만 살면 되니까! 근데 난 아냐, 이 기생충년아. 너만 니 몸 있어? 나도 내 몸뚱아리 있어! 내가 왜…"
“네에, 뭐, 저렇게 됐어요."
이진이 혀를 찼다.
“오래 걸리겠구나. 혼령과 속에서만 얘기하게 되기까진."
“알아도 그냥 말로 할걸요."
둘이 수군거리는 중에도 저쪽에서는 커다란 폭탄이 한두 개씩 펑펑 터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는 폭발 속에 결국 방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 나오는 아린. “으야," 제이미가 진짜로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언니얘 진짜 화났으이. 문 일이얘?"
“인간계로 간다니까 저러던데."
이진이 말했다.
“신령님이랑 얘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인간계에서 온 게 맞다더군요. 어떻게 왔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겠는데, 그걸 알려면 아무래도 직접 가서 보는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되도록 이미 경험이 있는 쪽이 가는 게 좋겠다니까 저러는 거죠."
“으야, 정말예? 인간계 다시 가는얘?"
갑자기 아린의 눈이 밝아졌다.
“나도얘! 나 거기 다시 가보고 싶으이! 야?"
“뭐?"
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넌 거의 죽을 뻔하고선 왜 간다고 그래?"
“에이,"
하지만 고개를 치켜들며 말하는 아린.
“사람이 어딜 가든 죽을 걱정은 하고 가는 거 아니겠으이. 어쨌든 살면 되는야. 야? 그러니까 나도 가얘."
아린이 동그란 눈을 반짝임에도 “됐어." 딱 잘라 말하고는 다시 뒷마당 쪽을 바라보는 이진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잠깐," 이번엔 아레인이 한마디 했다.
“그럼 혹시 너도 간다는 거니? 인간계에?"
“어어, 네."
그리고 이진이 대답하는 순간
“제정신이니!?"
곧바로 제이미 못지않게 얼굴부터 싹 변하는 아레인. 아린이 스윽 물러났다.
“동생한테는 죽을 뻔하니까 가지 말라고 해놓고서, 넌 뭐 대단한 게 있다고 그렇게 태평하게 간다고 그래? 잠깐 갔다 왔는데도 저렇게 애 한 명 죽다 살아났는데, 이젠 정말 작정하고 가면 네가 멀쩡히 돌아올 거라고 누가 말해? 대답 좀 해봐요, 카일!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아, 그, 그게 전,"
카일이 나오긴 했으나 어떻게 대답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레인은 성난 파도처럼 매섭게 몰아붙였다.
“안그래도 전에 애가 독립혼령들이랑 아는 사이니 뭐니 해서 그것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젠 인간계로 가겠다고? 도대체 애랑 어떻게 살아온 거예요? 이러고서도 내가 당신이 애한테 좋은 동반자가 될 거라고 믿을 수 있겠어요?"
“엄마, 잠깐,"
말 못하는 카일이 쏙 들어가고 다시 나온 이진은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잠깐, 좀 들어봐요. 일단 카일한테 뭐라 그러지 좀 말고, 네? 내가 스스로 가고 싶다 한 거예요. (“뭐어!?") 아니, 정말. 그런데 엄마, 어차피 누군가는 가서 봐야 한다고요. 그래도 경험 있는 사람이 가는 게 훨씬 낫다는 건 알잖아요, 네?"
“저 엔시나 기억 줬다며! 그건 어쩌고 네가 가?"
“그, 신령님이 몇 달 좀 걸릴 거라고 해서…"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든가!"
버럭 소리 지르는 아레인.
“뭐가 그리 급하다고 다짜고짜 두 명만 보내겠다는 거야? 거기서 네가 뭐 어떻게 되거나 그러면 누가 책임이라도 진대? 신령님이 뭐,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낸다고 했어? 전에 아린이 뭔 꼴로 돌아왔는지 너 벌써 잊은 거야? 니 동생이 그렇게 된 걸 직접 보고서도 이러니? 너도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으음,"
결국 이진도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아린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야단치는 엄마 얼굴이 더 구겨지자 슬쩍, 발을 내빼면서 마당으로 나섰다. 아레인이 뒤에서 잡거나 하진 않았다. “흐야," 마당에 나올 때까지 꾹 참고 있다가 내려오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는 아린.
“영결식도 망치얘, 인간계 가니 안가니 난리얘, 오늘 무슨 날이얘? 정신없으이."
[너야말로 애가 참 정신없어.]
이제는 리니아까지 면박을 줬다.
“이진 말대로, 너 정말로 죽을 뻔하고서 거기 또 가겠다는 건 뭐야? 무섭지도 않아?"
“야아, 리냐는 별걸 다 무서워하라고 하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혼령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말했다.
[집에는 좀 이따가 들어가자. 너까지 혼나기 전에.]
“야."
마당을 나간 아린. 잠깐 집을 돌아보자, 여전히 아레인이 야단치는 소리와 함께 제이미가 성을 내는 게 뒤섞여 들려왔다. 이쯤 되자 아린의 얼굴도 살짝 뒤틀렸다. 가족들이 저러는 거 보기 싫으이. 물론 몇 시간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산을 내려가는 그녀였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렇게 뭔가 되는 일이 없는 날은…
“아린,"
서아의 집에 다다르기 전, 누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이에 입을 삐죽 내민 채 돌아봤다가 “야?"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아린. 무슨 일인지 신령님께서 눈앞에 서 있었다.
“서아는 지금 자고 있다. 서아뿐만 아니라 다들 오늘 일 때문에 피곤하겠지."
유가 조용히 말하자 아린은 “야…"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 이렇게 비교적 멀쩡한 그녀가 특이함을 그녀 스스로도 조금은 알지만. 그리고 단번에 기운이 빠진 그녀에게 다가오는 신령. “심심하니?" 가벼운 기운이 어린 말로 묻자 아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이를 보며 살짝 미소 짓는 신령. 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신령님이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말한 일도 있기 때문일까, 어느새 아린은 평소에 느껴지던 (그 아린조차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그 기운이 지금은 별로 없음을 느꼈다.
“따라오거라."
신령이 먼저 돌아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얘기할 게 있다… 아니, 그 전에 재밌는 것도 조금 보여줄 테니 일단 와라."
“으, 으야,"
미끄러지듯이 앞장서는 신령의 뒤를 따라, 아린은 종종걸음으로 산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