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잘 먹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방에 들어온 제이미. 다 먹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여기서 먹는 밥은 그렇게 배부르게 먹을 만하진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음식일까? 다 먹더라도 그로 인해 조금 졸리다거나 하진 않도록 만든 듯한(십중팔구 아린 때문에) 그런 거. 설마 음식에까지 그 영인지 뭔지 하는 걸 조미료마냥 들이부은 건 아니겠지. 하긴 정말로 그랬다고 해도 별 해는 없기에 넣은 거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미는 이불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혼령 씨… 아니, 자는구나.”
그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면, 혼령계에 사는 사람들의 집 특유의 벽과 바닥이 보였다. 푸른빛의 눈을 깜박이는 그녀. 단순히 나무라기보다는 종이, 아주 두꺼운 종이를 겹겹이 붙인 듯한 바닥과 튼튼하면서도 매끄러운 벽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올리면, 역시 나무로 된 천장 아래에서 몇 개의 영 덩어리들이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
앉은 자리 그대로 푹 누운 제이미는 고개를 돌렸다. 합판이 아닌 진짜 통나무로 만들어 깔끔하면서도, 왠지 보고 있기만 해도 시원한 향이 나는 듯한 장과 서랍. 그리고 서랍 위를 보면, 가끔 피우라고 있는 것 같지만 제이미나 아린이 건드려본 적도 없는 향과 작은 거울. 그리고 시선을 좀 더 옆으로 돌리면 제이미(와 엔시나)가 저 너머에서 가져온 것들이 몇 가지 놓여 있었다.
제이미는 권총 몇 자루와 총알, 그리고 지갑 등을 바라보다가 멈췄다. 그리고는 거기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죽 둘러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움직였다. 허리를 숙이고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보면, 세 번째에서 나온 작은 액자 하나. 제이미는 액자에 담긴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아이와 그 엄마가 웃으면서 찍은 사진. 엄마가 꼭 안아주고 있는 금발머리 여자아이는 정말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제이미. 그러다 손을 뻗어 액자를 들어 보고는, 곧 후 불며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미는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언니얘,” 아린이 들어오자 홱 돌아봄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등 뒤로 숨겼다.
“다 먹었어? 하여간 진짜 빨리 먹네.”
“야. 근데 좀 피곤야. 좀만 더 잘래얘.”
“그래.”
그리고 아린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불 위에 몸을 던지는 걸 지켜보고는, 잠시 뒤 눈을 스르르 감자 다시 액자를 등 뒤에서 꺼내는 그녀. 무슨 본능이라도 되는 건지 뒤로 숨겼다가도 다시 한 번 그걸 바라보다 잠시 뒤, 제이미는 세 번째 서랍을 닫고는 첫 번째를 열어 그 안에 액자를 넣어놓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걸 서랍 위에 세우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엔시나가 자고 있다는 게 제이미에게 있어 굉장히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미는 방을 나갔다.
“음야…”
한편 아린은 누가 나갔는지 뭔지, 세상이 어떻게 되고 뭐고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으야,”
하지만 감겨있는 그녀의 눈앞에는 밤하늘이 보였고, 그 아래에서 빛나는 돌이 보였다.
“다 왔으이, 신령님얘.”
“그래.”
바로 어제, 둘은 산을 올라 이곳까지 왔었다. 그리고 먼저 폴짝 올라와서는 주위를 둘러보는 아린. 언제나처럼 밝게 빛나는 전당이었지만, 왠지 그 일 이후로 조금 사그라든 느낌의 빛이 그리 멀리 퍼져나가지도 않고 이곳에 머물고만 있었다. “이곳이,” 유가 물었다.
“그 애가 있던 곳이라는 거구나.”
“야.”
아린이 대답했다. 유는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의 돌을 만져보고는, 각 끝에 있는 기둥을 둘러본 뒤 자신의 기운을 살짝 퍼뜨려 보았다. 그녀를 돌아본 아린. 마치 두루마리 혹은 묶은 머리카락을 풀듯, 신령의 기운은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물처럼 흘러나와 둘이 서 있는 이 자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다 한 번 자신의 몸 일부를 크게 들어 올리자 갑자기 주위가 요동치는 것처럼 무언가가 일어났고, 아린이 살짝 비틀거리다가 다시 똑바로 섰을 때에는 유가 자신의 기운을 다시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 아이,” 그녀가 한탄했다.
“이곳에 있던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였구나. 하긴 본래 자신의 것이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조금이라도 덜했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는 걸…”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여, 전당의 한쪽 끝으로 가는 그녀. 아린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신령은 그곳을 바라보자마자 갑자기 뒤돌아서서는 반대쪽으로 걸어갔고, 아린은 이런 그녀를 계속 따라가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찾았다… 이리 오거라, 아린.”
그리고 전당의 오른쪽으로도 가서 밑을 내려다본 뒤 아린을 부르자, 그녀가 쪼르르 오면서 “야?” 대답했다. 유는 말 대신 그녀가 서 있는 앞을 가리켰고, 이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어?] 어째서인지,
[뭐야, 저거 다 시들었잖아?]
분명 다른 방향에서는 멀쩡하던 풀이며 나무며 그 모든 것이, 이쪽에서는 전부 녹빛을 잃은 채 힘없이 쓰러지고 비틀어져 있었다. 아린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무든 꽃이든, 잎이란 잎은 전부 검은 빛이 감도는 갈색 혹은 아예 잿빛으로 변해서는 줄기 끝에 대롱대롱, 아니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꽃송이는 거의 손톱 크기까지 오그라들어서는 역시 검은색과 회색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렸고, 나무들 또한 도저히 살아있다고는 볼 수 없는 빛으로 오래된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다 죽었으얘…”
심지어 집 앞 마당에 자리 잡아 아린이 심심하면 뽑아서 가지고 놀던, 그럼에도 어느 틈에 다시 자라났던 끈질긴 잡초들마저 여기서는 전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생기를 잃었다. 아린은 좀 더 자세히 보았다. 산짐승이나 벌레 등,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의 흔적은 애초에 사라진 모습. 이 광경을 멍하니 보던 아린은 같이 지켜보던 신령에게 물었다.
“신령님얘, 여기 왜 이러야?”
“무엇일 것 같으냐?”
아린에게 되묻는 유.
“네 눈에는 여기 있는 것들이 왜 죽었을 거라 생각하느냐?”
“으야…”
아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다 죽은 나무와 꽃에 대고 너야들 왜 죽었으이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중에 결국 리니아 혼자 생각하다가 곧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너 대체 얼마나 물을 줬길래 이래?”
“으, 으야,”
종종 그러듯, 아니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저지르고는 꾸지람을 듣는 아린. 그리고 이런 모녀의 옆에는 아주 예쁘게 피었어야 할 꽃 한 송이가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침마다 한 바가지 줬으이. 그럼 안되얘?”
“아이고, 정말…”
“앗,”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한숨을 쉬는 아레인의 얼굴이 사라지고, 아린은 전당 위에서 눈을 깜박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물 너무 많이 줘서 죽은 거 같으이.”
“그래,”
신령이 긍정했다.
“비슷해. 다만 이건 물을 먹어서 죽은 게 아니겠지… 혹시 그 아이가 힘을 되찾고 나서 이쪽으로 지나가지 않았느냐?”
[아아,]
리니아가 손뼉을 쳤다.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아린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에 말해주는 그녀.
[영을 과다하게 받았어.]
“영을 야?”
아린의 물음에 혼령과 신령이 동시에 긍정했다. “원래는,” 유가 말했다.
“이 세상에 평균적으로 흐르는 만큼만 머금어야 정상이지. 물론 별빛송이처럼 그걸 많이씩 먹고 사는 것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다.”
별빛송이는 영결식때 쓰이는, 이번에도 마을 사람 둘을 숲으로 보내 모아오게 한 그 꽃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린의 눈앞에 죽어있는 중에도 한 송이 보이는 듯하지만, 다른 꽃보다 덜 처참할 뿐 역시 죽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신령 또한 그 꽃을 알아보고는 전당에서 내려가 천천히 다가갔다.
“어떤 이유에서든 영이 비정상적으로 흐르게 되면 평소보다 부족해지거나 너무 많아져, 심할 경우 그게 생명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야. 영이란 건 그런 식으로 조금 위험하기도 하다, 아린.”
“야아…”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는 죽은 별빛송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아이는 자기 힘을 전혀 조절하지 못해. 그러니 자기가 퍼뜨리는 기운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아마 그 아이가 지나간 모든 곳이 이렇겠지.”
[지나간 곳이 전부… 이런 꼴이 된다고?]
그리고는 살펴보던 꽃송이를 조금 더 가까이 한 유는, 자신의 기운으로 그것을 살며시 감쌌다가 도로 놓아주었다. 아린이 지켜봤다. 신령이 잠시 가졌다 놓은 그 꽃은 잿빛이 사라진 대신, 다시 흙에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신령님,” 리니아가 아린에게 잠시 비켜달라 하고는 나와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이걸 따라가면 솔을 찾을 수 있다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지.”
유가 긍정했다.
“이렇게 죽은 것들을 따라가면 될 것이다. 아직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니면 이런 죽은 것들을 더 많이 보게 될 테니까 말야.”
“네에…”
리니아도 아린도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아린으로 돌아온 그녀는 죽은 꽃들을 한 번 더 둘러보았고, 솔이 지나간 곳마다 이렇게 되어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가가 비틀렸다. 그녀의 옆에서 신령은 다시 전당으로 오르더니 처음에 왔던 길로 돌아섰다.
“그럼 이만 내려가자꾸나. 그 아이를 찾는 게 급하긴 하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어. 어서 가자, 아린. 그러고 보니 집에서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나왔던 것이냐?”
“야아, 그…”
아린이 우물거리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다들 집에서 싸우고 있으이.”
“그렇구나.”
유는 아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옆에서 같이 산을 내려갔다.
“무엇 때문인지는 나도 알 것 같다… 걱정은 하지 말거라. 한 집에 살면 가끔 싸우기도 하는 게 당연하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야?”
아린이 유를 빤히 쳐다봤다.
“신관님이랑 싸우는 야?”
“가끔 그러지. 란이든 마르한이든.”
신령이 미지근하게 말하고는 작게 미소 짓자, 아린도 조그맣게 웃으면서 함께 내리막을 걸었다.
“음야, 야,”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드러누워 어제 일을 꿈에서 다시 보며, 아린은 침을 흘리는 입으로 뭐라 웅얼거렸다.
“죽은 거… 따라가는 그이. 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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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공기는 여전히 시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속이 몇 번이고 깨끗해지는 것 같아 계속 여기서 숨만 쉬고 싶었다. 게을러지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여기서 이렇게 숨을 크고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게 좋았다.
제이미에게 있어 이곳 공기란 게 그러했다.
“후우,”
저 앞에 뜬 해를 가만히 바라보는 제이미.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는 제이미의 안에서 어느새 엔시나가 잠에서 깨고 있었다. 하, 제이미는 (드디어) 입을 열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혼령이란 작자들은 진짜 불규칙하게 자는구만 그래.
[인간처럼 혼령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조금 그렇긴 해.]
엔시나가 대답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이제 해가 저 위에 있는 걸 보며 눈을 깜박이는 제이미.
“숨 쉬고 있잖아.”
[으음,]
하지만 제이미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녀석 태도가 꼭, 얘가 언제부터 자기 생각을 숨기기 시작한 걸까 하는 그런 얼굴… 아니 기운으로. 그리고 제이미는 그 느낌이 맞았음을 알고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정말, 내가 이 여자와 함께 사는 거에 익숙해져 갈 줄이야. 혼자 혀를 차는 그녀에게 혼령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제이미,]
“너,”
그런데 혼령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말하는 제이미.
“그래도 약속한 건 지키겠지… 나한테 약속할 수 있어?”
[무슨 약속?]
엔시나는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두 눈은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도 확실히 말하는 제이미.
“저기 갔다 오면, 엄마든 뭐든 저쪽 일에 대해 내가 보여달라는 건 다 보여준다고, 약속할 수 있어?”
[제이미?]
꽤 놀라는 엔시나. 제이미는 자기가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그랬는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이런 그녀를 보며 놀란 혼령에게 다시 물었다.
“전부 말야. 저기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엄마는 뭘 어떻게 한 건지, 뭐든 내가 알고 싶다는 건 전부 보여달라고.”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푹 숙이는 제이미였다. “그래도,” 그녀가 말했다.
“저쪽에서 이것저것 하는 중엔 바쁠 테니까 갔다 와서 해달라는 거야. 이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라고. 알았어?”
[……]
멍한 얼굴로 대답이 없는 엔시나. 이에 제이미는 결국 성질을 조금 섞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짜증을 팍 내는 그녀.
“내가 도대체 어떤 망할 난장판에 뛰어드는 건지는 좀 제대로 알아야 할 거 아냐, 응?”
[…그래,]
그리고 혼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전부, 너가 원하는 건 뭐든 보여주고, 알려준다고. 반드시 그럴게.]
마침내 대답하는 그녀의 앞에서 다시 숨을 들이마시는 제이미. 엔시나는 그녀에게 덧붙여 말했다.
[다 무사할 거니까 걱정 마. 너도, 나도, 카일과 이진도 모두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그리고 갔다 오면 네 말대로 전부 보여줄 테니까…]
“그래.”
제이미가 눈을 감았다. 어느새 조금씩 넘어가려는 해 밑에서, 잠시 시원한 공기를 더 마시던 그녀는 곧 “좋아.” 눈을 뜨고는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가보자고, 까짓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