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그날 저녁,
“뭐 빠진 건 없지?”
“네, 다 챙겼어요.”
이진이 대답했다. 스스로 허락했다지만 막상 보내는 자리가 되니 표정이 안 좋은 아레인 앞에서, 그는 실제로 챙긴 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어쨌든 웃어 보였다. “그래.” 아레인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고, 알았지? 이것저것 신기하다고 아무거나 건드리고 그러지 말고. 먹을 거 잘 챙기고.”
“하핫, 알았어요.”
이진은 아직 여덟 살 꼬마인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도 마중 나온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조금… “그럼,” 한편 옆에서는 민이 아레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야겠군. 이진은 괜찮을 거니 너무 걱정 마시오.”
이진과 함께 인간계를 살펴보고 올 사람을 찾을 때 스스로 나선 건 그 뿐이었다. 이진은 동네 아저씨와 등산을 가는 그런 게 아니었기에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그 동네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괜찮을 거라고 웃으며 넘긴 것이다. 무엇보다 아란 쪽 사람들이 그러하듯, 민 또한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별걸 다 신기해하며 살펴보는 사람이었고. 말이 동네 아저씨지 그냥 또래 친구와 얘기하듯 지내곤 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가는 게 맞긴 한 건가?”
그렇게 산 아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온 앞에 그가 물었다. “네,” 이진이 끄덕였다.
“지금이면 아마 오후 두 시쯤 되었을 거예요. 거기 도착할 즈음엔 밤인 게 좋으니까, 어서 가죠.”
설마 대낮에 멀쩡히 그곳에 발을 들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피곤하긴 하겠지만 괜히 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곧 이진은 카일이 가져가자고 한 걸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그런데 이런 그에게 툭 던지듯 말하는 목소리. 이진과 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저쪽에서 제이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다섯 시야. 가면 새벽이겠지. 그래도 새벽이면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둘이 선 자리로 천천히 들어선 그녀는 고개를 높이 치켜세웠다.
”…라고 엔시나가 지금 말했어. 애초에 내가 거기서 가져온 시계는 안 본 거야?”
“어? 어어, 미안.”
혼자 혀를 차는 이진을 두고 제이미는 고개를 돌려 민을 바라봤다.
“아저씨가 얘랑 같이 가기로 한 거예요?”
“그래. 알려줘서 고맙구나.”
민이 웃으면서 인사하자 제이미도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둘을 번갈아보다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하는 그녀.
“아저씨는 들어가 계세요. 내가 갈 거니까.”
“어?”
놀라서 제이미를 쳐다보는 이진. 민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란은 놀란 얼굴을 하는 대신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고, 신령 유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제이미. 생각이 바뀐 것이냐?”
“대충.”
제이미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현지인이 같이 가줘야지 뭐 어쩌겠어.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년인 줄 알아?”
“흐음,”
유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이에 엔시나가 슬슬 앞으로 나오려 했으나 “됐어.” 막아서는 제이미.
“이건 내 문제야… 그래서, 이럼 된 거지? 내가 간다고.”
“괜찮겠나?”
란이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신령님께서는 네가 그쪽 세상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하던데…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 신령이란 애도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어깨를 으쓱하는 제이미. 그리고는 곧 가볍게 웃는 그녀였다.
“이래 봬도 그쪽에서 나름 선생 노릇 좀 하고 살았어. 적어도 무식한 짓은 안 해.”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런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는 유에게 묻는 제이미. “괜찮지?” 혼령도 조용히 시키고 혼자 이러는 그녀를 신령은 잠시 더 지켜보았다. 제이미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했고, 이렇게 서로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알았다.”
짧게 긍정하는 유.
“오히려 너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 기쁘구나. 고맙다, 제이미.”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숙이는 신령이었다.
흠칫하는 제이미.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 물러나서는 “어,” 말을 더듬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피했다. 신령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지금 가면 새벽이라니까 어서 가자고.”
제이미가 말했다.
“너 준비 다 했지?”
“응. 너는?”
이진이 대답하면서 그녀를 훑어보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정말 별걸 다 챙겨온 그녀. 아니, 사실 대부분은 (카일이 이진에게 챙기라고 한 것처럼) 엔시나가 챙긴 거지만, 이렇게 그녀의 허리춤에 있는 권총이라든지 칼, 그리고 지갑과 함께 이진은 물론 카일도 이런 건 오랜만에 아니면 아예 처음 본다고 할 만한 도구들을 여럿 가져온 그녀였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거라. 너희 모두.”
신령이 물러나서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갔다 오고, 알았지?”
그리고 얼른 앞으로 나와서 이진을 한 번 꼭 안아주는 아레인. 이는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맛있는 거 많이 가져오얘!”
라고 말은 엉뚱하게 하는 동생이었지만 이런 애도 꼭 안아준 이진은 “갔다 올게요.” 자신을 마중 나온 이들을 둘러보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몸조심하게. 돌아오면 인간계 얘기 좀 많이 해주고.”
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언니얘도, 꼭 돌아오는야.”
아린이 제이미에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제이미는 웃으며 손가락을 걸고,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래, 너밖에 없다, 정말.”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런 제이미에게 아레인도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에 제이미도 미소로 답하고는 “갔다 올게요.” 아린이 손을 흔드는 앞에서 이진과 함께, 마침내 숲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다들 조용했다가, 곧 란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와서 입구를 닫았다. 숲으로 가는 길에 두꺼운 막이 쳐지는 모습을 모두들 바라보다가, 그렇게 길을 닫은 란이 돌아보며
“그럼 이만 돌아가죠. 아레인 씨는 계속 계실 겁니까?”
입을 열자 각자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뇨,” 아레인이 대답했다.
“잘 오겠죠. 그럴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아린과 함께 돌아가려 하자 아린은 “어,” 멈춰서 엄마를 보며 말했다.
“나 그… 오늘 신령님이랑 할 거 있으이. 엄마 먼저 가는 야.”
“애가,”
눈이 살짝 가늘어진 아레인이었다.
“오빠 보낼 때도 이상한 소리 하더니, 신령님 바쁘신데 귀찮게 할 거야?”
“아니,”
그런데 유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하자 아레인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괜찮다. 같이 좀 놀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거라.”
“네?”
조금 멍해지는 아레인. 비록 우리들을 보호해주고 가르쳐주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와는 조금 멀다는 느낌이 있는 그 신령님이었기에. 그런 분이 우리 애와 '같이 논다'고 하는 게 뭐라고 할까, 다소 생소했다. 하지만 아린은 “으야!” 하면서 신령님 옆에 (평소에 서아와 같은 친구에게 그러는 것처럼) 찰싹 달라붙고는 신령님도 괜찮다고 하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으음, 그럼… 네. 잘 부탁드려요. 너 괜히 신령님 힘들게 하지 말고.”
같이 논다니까 같이 노는 거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엄마였다. 그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다가,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자 얼른 “죄송해얘.” 신령님으로부터 떨어진 아린.
“그냥 어무얘한테 사실대로 말해도 좋은 야… 좀 미안해지네얘.”
“괜찮을 거다.”
유가 부드럽게 말하고는 먼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란, 마르한, 너희는 남아있거라.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하면 곧바로 부르고.”
“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령도 살짝 긍정하고는 어느새 옆으로 따라온 아린과 함께 움직였다. 란은 이 둘이 산을 올라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제이미와 이진이 들어간 숲을 바라보았고, 그러다가 자신도 곧 산을 올라 거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