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에어콘을 25도로 틀어놓고 개인 서재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 프랑소와 페늘롱, 그리고 이사야마 하지메의 저서를 벗삼아 무료하게 보내고 있던 주말의 어느 오후의 일이다.
벨이 울리더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 군이 찾아왔다. 김 군은 나보다 7살이 아래인 대학생이지만 사학과 특유의 영감 기질에다가 비슷한 성향의 크리스천이기에 종종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 날도 시켜놓은 처갓집 양념치킨을 뜯으며 인간이 거인 뒤통수를 따는 하위 문화을 논하며 기독교적인 경건한 농담 또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하다가 치킨살을 다시 뜯고 있던 차, 늑골 쪽을 포크로 휘적거리던 김 군이 나를 불렀다.
'전 형.'
'무슨 일인가? 양념충인 나에 대한 민원인가? 아니면 평소처럼 시덥잖은 조조-양수 애드립이나 하려던 것인가?'
김 군은 특유의 느끼한 웃음 실실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형이 고기부페에서 돼지갈비부터 굽는 양념충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통닭의 늑골을 뜯다가 계륵 이야기나 꺼내면서 요시카와 에이지가 유유히 흐르는 황하에 다이빙하던 시절 농담을 할 저 역시 아니지요."
"그러면 또 어떤 애드립을 하기 위해 미리 장전을 하던 것인가? 애드립 발도술에 있어서 내가 히코 세이쥬로라면 자네는 아직 히무라 켄신의 위치 아니던가."
김 군은 무슨 구두룡섬 캐스팅이라도 하려는 건지, 아니면 쭈그려 앉아 있다가 내 움직임에 따라 소닉 붐이나 섬머솔트 킥이라도 쓰려던 것인지 2초 정도 잠시 대기하다 말을 꺼냈다.
"전 형, 왜 픽션에서는 기독교 혹은 기독교와 유사한 설정의 종교가 나오고 능력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음 그렇지. 아주 흔해 빠졌지."
"그렇지요. 참으로 흔해 빠졌지요. 그러다 보니 동네 성당 보좌신부라도 라틴어 몇마디 읊으면 안데르센 신부나 박 신부 정도는 밑바닥에 깔 능력자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성공회인데 여기 역시 이미 레드오션의 경지에 오른 것 같지 말입니다."
김 군은 잠시 안경을 고쳐 쓰더니 특유의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설을 재차 풀어갔다.
"그래서 말이지요. 전통 개혁주의 교리에 입각한 개혁교회를 능력물에 등장시키면 어떻겠습니까?"
"허허, 이런 십자가의 도를 어지럽히는 난적을 보았나! 그러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운하에서 피터 아츠를 소환해 도끼 하이킥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란 말인가? 아니면 존 칼빈이 화형대를 소환해 세르베...아차."
"허허헛, 형이야 말로 점잖은 척 하면서 이런 소재를 마라나타 하면서 갈망하셨나 보군요. 제가 웨스트민스터의 요리난적이라면 형께서는 모즈구스와 그 제자들에게 심문당할 급수라는 것을 제가 일찍이 알고 있습니다."
김 군과 나는 일종의 상호확증파괴 관계에 놓여 있다. 마치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전면전을 벌이면 지구가 패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아마 우리 두 사람이 애드립에 있어 전면전을 벌이다간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엔딩과 같은 꼴이 날 지도 모르겠다. 그 뒤가 북 오브 일라이가 될지 매드맥스가 될지, 아니면 북두의권이 될진 모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허허, 이 사특한 것을 봤나! 내 발도술에 썰리더니 꽤나 함정을 파는 스킬이 늘었군. 마치 덫 사냥꾼 왈도를 보는 것 같네."
"본디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법 아니겠습니까? 여튼 제 안건이 어떻습니까?"
"허허허...자네의 말인 즉슨 이미 성공회 선에선 레드 오션이니 좀 더 우리 쪽까지 능력자들을 끌고 오자는 것 아닌가? 이 무슨 아주사에서 성령의 대부흥이 일어날 시절 이야기인가! 통기타만 쳐도 상스럽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 우리 선배님들께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김 군은 평소 고기부페에서 몇인분을 퍼먹고 화장실에 들어간 것 마냥 수심에 찬 표정으로 생각에 들어갔다. 생각이 빨리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인지 김 군이 다시 답했다.
"그러나 전 형, 그렇게 친다면 헬싱 역시 본래는 아카드를 부리던 능력자가 아니라 드라큘라로 가장한 게리 올드만이나 잡아 족치던 먹물 아니었습니까? 그나마도 퀸시 모리스가 아니었다면 스탠스 형사를 만난 마틸다 가족처럼 되었겠죠. 적당히 능력을 뻥튀기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종이를 하늘에서 몇천톤 소환해서 구교도들을 압살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탠스는 백스테이지에서 마틸다랑 친하지 않던가? 그리고 모리스 가문은 벨몬드 일가의 피가 흐르기에 생각보다 강하다네. 죠니 모리스와 조나단 모리스를 보면 알수 있다네. 이 참에 악마성 드라큘라 갤러리 오브 라비린스를 해 보게. 얼마나 재미있으면 고등학교 시험 문제지에 지문으로 등장하겠나?"
"형은 샬롯의 강철치마보다는 빼앗긴 각인 여주인공 샤노아의 뒷태나 보고 계시겠죠. 그리프도 없는데 방향키 윗버튼만 쓸데없이 누르시는 것을 잘 압니다. 여튼 전 형께서도 재미를 붙이셨나 봅니다.'
이 친구 역시 내가 즐기면서 까칠하게 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베지터스러우면서 점순이스러운 츤데레 기질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아니던가.
"허허, 좋네. 좋아. 자네와의 역적모의로 인해 내 머리가 존 파이퍼의 샤이닝 핑거에 불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농담 따먹기를 계속 하도록 하지. 하지만 내가 존 파이퍼의 손길에 잿더미가 된다면 자네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강해서 메테오 강림에 유카탄 반도 크레이터같은 꼴을 맞이할 걸세.
"형이 존 파이퍼의 불타는 손길에 잡힌다 하더라도 존 맥아더가 이상한 불이라며 꺼 줄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미 전 형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 친구가? 참으로 함정을 잘 파는군. 자네 말대로 내 입에서 답이 나오고야 말았어. 마틴 로이드 존스의 강해서 메테오는 꽤 써볼만 한 것 같군. 역시 우리 바닥에 학자들이 많다 보니 책이나 던지고 놀아야 하겠네."
김 군이 낄낄거리며 받아치기 시작했다.
"유카탄 반도 크레이터라 하심은 창조과학회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까? 이러다 방주B에 탑승한 공룡들처럼 되시겠습니다. 산소어뢰같은 성령의 날선 검을 장전해야 하겠습니다.'
"그 성령의 검은 물에서도 잘 나가는 메이드 인 저팬인가 보군. 김 군의 유머에 바다악어를 확! 뿌리고 가겠네.'
쓰잘데기없고 데인져러스한 농담을 하다 보니 시간은 오후 6시를 가리켰다. 저녁을 제공하기 싫어 김 군을 일찍 보내고 갓피플에 들어갔다. 상호확증파괴로 이어진 우리 사이는 존 칼빈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