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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2)


 "리젤로트. 고정하시고 앉으세요."

"올케 언니. 너무 언짢아하지 마세요. 미네트는 원래 아무에게나 저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아롈이 만약 이 곳으로 오는 도중, 온갖 사람들을 만나 용납할 수 있는 무례함의 정도를 조정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미네트와 마찰을 빚었으리라.

"그럴 리가요! 스무 해도 넘게 같이 자란 저도 미네트랑 몇 분만 대화를 나누면 속에서 천불이 치미는 걸요!"

탁자 주위를 한참 빙글빙글 돌며 미네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은 리젤로트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의 시녀가 내민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앉았다.

"오늘 저녁은 오라버니와 보내신다고 하셨고, 내일은 무얼 하세요?"

옆을 돌아보자, 앤이 얌전히 대답했다.

"따로 잡혀 있는 일정은 없사옵니다."

"그럼 우리 같이 옷이나 맞출까요? 사실 오늘 저녁에 재단사를 부르기로 했는데, 언니가 괜찮으시면 내일 오라고 할게요. 여름에 입을 옷은 항상 고민이거든요. 드레스 룸을 열심히 뒤져봤는데, 대체 입을 만한 옷이 없는 거 있죠. 작년에는 대체 뭘 입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롈은 잠시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았다. 여름옷을 몇 벌이나 맞출지는 모르지만 결코 적은 돈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지참금은 황실 재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아롈의 개인 재산이 아니었다. 또한 혼수품도 아롈이 사용하지만 소유권은 황실에 있었다.

"마담 리젤로트. 제가 아직 전달받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일 년에 받는 연금의 액수가 어느 정도 됩니까?"

"글쎄요? 그걸 알아야 하나요?"

리젤로트는 눈을 천진하게 깜빡였다.

"그냥 청구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복잡한 지불은 아바마마나 오라버니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 너무 많이 썼다고 잔소리를 하시는 일은 가끔 있어도 돈을 안 내주시는 일은 없는 걸요."

따로 정해진 액수의 연금을 받지 않고 되는 대로 쓴다고?

"그리고 올케 언니. 애정을 담아 조언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언니가 살다 오신 북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이블린에서는 점잖은 사람들이 금화와 은화의 일을 입에 올리길 저어하니까요."

북쪽에서 아롈이 매일 하던 일 중 하나가 보고서에서 예상 비용만 뽑아 조부가 보기 편하게 나열하는 것이었다. 아롈은 당황을 금치 못 했지만 일단 웃었다.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그럼 재단사는 내일 오라고 할게요. 혼자 맞추는 것보다는 여럿인 게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럼, 크리스틴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도 수도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큼, 의상이 필요할 텐데요."

"음, 새언니는 큰언니가 왔으면 좋겠어요?"

"나쁘지 않지요."
"네, 그럼, 새언니 마음대로 하세요. 자, 이제 이 튤립 꽃병을 어디다 놓는 게 좋을지 고민해볼까요? 빨리 놓고, 저는 미셸을 보러 가야겠어요."

그녀의 측근 시녀가 화들짝 놀랐다.

"마담 리젤로트.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을 못 한 듯해요. 리무쟁 공작 전하와 약속을 잡으셨던가요?"

"아니. 그냥 만나러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음, 어디가 좋을까?"

리젤로트는 아롈의 응접실에 꽃병을 배치해놓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아롈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활기찬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짙은 꽃향기가 남았다.

아롈은 탁자에서 아까의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목도, 인장도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전하. 다과라도 올리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지금이 몇 시냐?"

"네 시를 조금 넘겼사옵니다."

"그럼 차만 조금 내오너라."

아롈이 마지막으로 읽은 부분을 찾기 위해 책장을 들추는 사이, 앤은 따뜻한 차를 끓여왔다. 남쪽의 차는 잼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설탕만 조금 넣었다.

책은 중부의 서사시를 갈리아 어로 번역해둔 것이었다. 아롈은 중부와 남부 말을 번갈아 보며 단어를 눈에 익혔다. 하지만 이내 지루해졌다. 아롈이 읽다 만 부분은 지독히도 재미없었다.

태양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타고난 주인공이 성검을 받아 용을 무찌르러 떠날 때만 해도 흥미진진하게 책에 빠져들었던 아롈은, 성에서 그를 맞이하여 환영의 입맞춤을 건네는 귀부인들의 의상 묘사에 그만 질려버렸다. 대체 왜 책에서까지 의상을 고르는 걸 봐야 한단 말인가? 간혹 묘사가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앞에서 금강석으로 번쩍이는 관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줄에서 화려한 머리띠를 쓰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아롈은 대충 대충 묘사를 흘려 읽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내용을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한 쌍의 팔과 한 쌍의 다리가

오래된 덩굴처럼 서로 얽혔네.

겨우 이슬이 한 방울 떨어질 동안

천 번의 달콤한 입맞춤이 오갔고,

꽃봉오리는 피지 않았으되

기사는 흰 꽃봉오리에 입 맞추었네.

창문을 두드리는 건 산들바람이나

연인을 흔드는 건 거친 폭풍이더라.

 

아롈은 앤에게서 부채를 빼앗아들고 얼굴을 식혔다. 몇 줄의 줄글일 뿐인데 너무 적나라한 광경을 떠올려버린 자신에게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앤은 눈치 찬물을 따라서 내밀었다.

잔을 단숨에 비운 아롈은 한 잔을 더 마시고야 겨우 진정하고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다음 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밤을 보낸 귀부인에게 약속의 증표를 쥐어주고 용이 산다는 험준한 계곡으로 향하고, 마침내 용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때까지 간간이 생각이 튀어나왔다.

갈리아 어는 본 척도 않고 중부 말로 된 부분만을 통해 단숨에 내용을 읽어버린 아롈은 책을 덮고 다시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공들여 고정해 둔 머리칼이 흐트러져, 석찬을 위해 다시 머리를 손질해야 했다.

 
이 정도면 전연령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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