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8)


     

"그랬답니다. 망신스러운 일이지요.“

소피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 저런 가십거리를 늘어놓자,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변덕스레 변하는 화제들 사이에서, 아롈은 의례적으로 웃으며 남편을 생각했다.

결국 간밤엔 놀았다.

남편이 무릎을 베고 잠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탓인지, 정사 중 저도 모르게 서두른 탓인지, 일을 마치고 밀쳐놓았던 시계를 열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일렀다. 서두른다면 석찬만을 거른 듯 아무렇잖게 연회에 참석하여 점잔을 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문자판 위로 드러났다.

땡땡이도 쳐본 사람이나 마음 놓고 치는 것이다. 적어도 아롈은 정말로 아프지 않는 이상 ‘불성실’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물론 짜증과 신경질을 달고 살았지만 어쨌거나 해야 할 일은 해냈다.

‘여름 감기 때문에 앓아누운 걸로 하자’고 비장하게 결심하고 시계를 치워버릴 때에는 언제고, 시침과 분침의 위치를 확인한 부부는 서로를 머쓱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남편이 단호하게 아롈의 손을 잡아 시계를 치웠다. 자고 일어나 미지근하게 식은 손에 입술이 닿자 어깨가 움찔했다.

-오늘은 놀지요.

-저는 지금이라도 내려가도 괜찮습니다만.

스스로 졸라놓고 이제 와서 손바닥을 뒤집듯이 말을 바꾸는 것도 민망했 . 그러나 그 때 남편은 잠시 저울질 하는 듯하더니 털어버리듯 웃었다.

-오늘은 제 아내의 곁에 있기로 해서요.

가슴이 쿵 떨어지고 귀까지 달아올라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도망쳐 한참 동안 부채질을 했는데도 열이 식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서류 작업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 남편은 조금 투덜거렸다.

-조금 억울해지는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이 있어달라고 했잖아요?

-지금 옆에 계시잖습니까.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제가 생각했던 방식은 아니로군요.

하지만 말 뿐이었던 듯, 남편은 금세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롈은 양초 가격을 써낸 보고서를 보다가 짜증을 눌렀다.

처음에 아롈은 양초의 개수나, 주문할 가게 등을 정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롈은 최종 결정권자지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그런 세부사항의 조율은 어디까지나 아랫사람들이 해서 보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부름꾼이 제대로된 결과와, 그 결과를 도출해낸 과정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대체 아롈이 ‘항상 주문하던 가게’가 어디인지, ‘항상 주문하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게 무어란 말인가?

보고서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시녀들은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아롈이 다그치자 몇 군데 잉크마저 얼룩진 종이를 가져왔다. 페란토 어로 작성할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끔찍한 낙서를 보고서라고 들이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게의 이름들과 주문 가능한 양과, 다른 연회의 예를 봤을 때 총체적으로 필요한 양초의 양과, 가격의 총합을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일일이 지적을 해줘야 하는 건가.

도무지 체계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이 큰 건물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르치는 것에 시간이 더 들 듯했다. 아롈은 이제 고인이 된 조부의 답답한 심정을 겨우 이해했다.

하지만 아롈은 조부가 자신에게 그랬듯 시녀들의 얼굴에 대고 서류-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

그나마 좀 나아지긴 했다며 속을 달래고 일을 처리했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생각보다 셈이 빨리 끝났다. 일을 끝낸 다음에는 카드놀이를 하며 놀았다.

누가 부르러 오면 카드를 내려놓고 갈 때까지 숨을 죽였다. 어린애처럼 앉아 질릴 때까지 카드를 했다. 남편은 아롈에게 몇 번 져주더니만, 아롈이 그를 지적하자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남쪽의 규칙을 정확히 숙지하기 전에는 무참하게 지다가, 나중에는 아롈이 연승을 했다.

눈을 뜨자마자 다가온 것은 다정한 입맞춤. 끌어안은 몸이 더웠지만 싫지 않았다. 심장도 함께 잠들었던 듯이 두근거리고, 풍성한 목소리의 아침인사가 귀에 닿았다. 일어나자마자 몸이 가뿐했다.

아롈은 이본느와 소피가 찾아와 시간을 내어줄 것을 청하기 전까지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날로 알고 있었는데 날짜를 착각했다. 민망해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남편이 오늘도 예쁘니 이대로 가도 괜찮을 거라 웃었다. 그는 아롈을 남겨두고 센 궁으로 떠났고, 아롈은 이블린에 남았다.

보르디 가문의 아가씨들과 앉아 의례적으로 친목을 쌓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아롈은 달콤한 생각으로 도피했다.

외롭다고 붙잡자, 옆에 있어주었다. 아롈은 그것만으로도 평생 비어있던 한 구석이 채워지는 듯 섬뜩하게 충족감을 느꼈다.

고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다시 남편이 무언가를 물어보면, 조금은 솔직히 대답하자. 파피나 벨타의 일은 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미 말해버린 마법사의 일은 적당히 혈통 얘기로 둘러치자. 유모에게 맞았다든가, 사생아로 오해를 받았다든가, 마리야의 일 같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잖은가. 그냥, 예전에 아롈이 자랐던 시골은 참 눈이 많이 내렸고, 아주 많이 춥고, 조금은 외로웠노라고, 그런 얘기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여전히 미안하다. 하지만 그것은 빚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계속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리지만, 언젠가는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평생을 같이 살아갈 사람이다. 이 마음의 빚, 한 번 갚을 날이 없을까.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그만한 무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빚을 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약속해주겠냐고 물었을 때, 아롈은 남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와 나눈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아직 짧은 결혼 생활 내내 충분히 아롈에게 신뢰를 주려고 노력했다. 입 밖에 내어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알았다. 그래서 약속했다.

남편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아롈에게 ‘약속’이란 최소한 목숨에 견줄 만큼은 굉장한 무게였다.

-이따가 데리러 오지요. 재미있게 놀아요.

아침에 받은 입맞춤, 그리고 따라오던 따뜻한 얼굴을 떠올리자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손을 가져가다가, 간밤 남편이 손수 미간을 문지른 게 생각나 조금 더 부끄러워졌다. 소소한 버릇이었는데 알고 있었던가.

손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아롈은 괜스레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떨떠름한 차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호호호호호.”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혹시 뭔가 정치적인 이야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긴장했는데, 가신들의 딸도 불러 모아 가볍게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 그런지 필리프의 언질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가벼운 잡담이야말로 아롈이 가장 취약한 분야였다. 문학작품이나 공연,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끼어들 자신이 있었지만 가십에는 약했다.

오찬 시간이 되었건만 아가씨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롈은 차를 하도 마셔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오히려 물배가 차서, 졸라맨 허리가 답답했다.

계속 앉아서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확히는 궁정의 뒷면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미네트가 들어왔다. 아롈은 그 손목에 팔랑이는 리본을 훑었다. 틀림없이 아롈의 것이었다. 미네트도 아롈이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 어렴풋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미네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고, 아롈 역시 그렇게 받았다.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센 궁에 가신 게 아닙니까.”

“아뇨. 오늘 미령하시어 이블린에 남으셨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며느리를 꼭 보고 싶다 하셨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아가씨들은 죄다 보르디의 아가씨들이었다. 황후의 성격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전운이라고 할 만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롈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뭔가 시작하려는 것이다.

“지금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예. 오찬이라도 함께 하시자는 게 아닐까요?”

“크리스틴이나 오거스트, 리젤로트도 같이 있습니까?”

“친딸보다는 ‘친딸이나 다름없는’ 며느리를 더 보고 싶으신 것 같답니다.”

유치하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고, 아롈은 그녀의 며느리였다. 필리프의 말마따나, 아롈은 황후의 밑이었다.

“오늘 모임은 이걸로 파해야 할 것 같군요, 이본느.”

둥근 얼굴의 사촌 언니이자 사촌 올케는 빙긋 웃었다.

“황후께서 찾으시는데 어찌 거역하겠어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