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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0)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이블린에 도착하자마자, 세시안은 황제의 방에 불려갔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아들에게,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일어나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후 떨어진 말은 뺨을 후려갈기듯 싸늘했다.

"죄송합니다."

"차라리 지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그러느냐."

당연한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뜻이었고, 거의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은 후계자에게 하는 말로는 더없이 모욕적이었다. 세시안의 숨이 잠시 가빠졌다가, 가라앉았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내 사랑하는 아들아.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마. 네가 만회할 다음을 위해 용이 한 번 더 나타나게 해달라고!"

"..."

세시안은 거의 세 시간 동안 질책을 참아냈다. 황제는 선심을 쓰듯 의자에 앉게 해주었으나, 정신을 쉬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는 혀를 깨물며 인내했다. 괜히 믿었노라는 질책은 뼈아팠다. 그는 부황의 건강이 나빠진 요 몇 년 간 거의 참견을 받지 않고 일을 처리해왔다. 황제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확실히 안일했다. 오를레앙은 바다가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다. 오히려 부르고뉴 쪽에 공을 들였으면 들였지, 오를레앙에는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함대 창설로 인해 오를레앙이 볼 피해가 상당했으므로. 그런데 찬성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칼레와 오베르뉴가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했기에 넘어갔을까.

아들을 앉혀놓고 온갖 독 같은 말을 토하던 황제는 어느 순간 안색이 나빠졌다. 너무 무리한 것이다. 그는 손수건에 대고 기침을 했다. 가래에 피가 묻어나왔다.

"나가라."

그는 다시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황제의 침실을 나섰다. 침실 문 밖에는 공식 정부가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여자 취향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똑똑하지 않은 여자. 얼굴과 몸매는 곱지만 순종적으로 복종하는 여자.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스쳐지나갔다.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요즘 쓰지 않아 싸늘한 티가 났다. 사람이 쓰지 않는 방은 표가 나기 마련이다. 그는 코트를 벗어서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어질어질했다. 하루 쉬어 회복해놓은 기력이 쭉 빠지며 삽시간에 피곤해졌다.

아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어제 놀았으니 오늘은 나가야 한다.

-무리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려 왔습니다.

-부디 전하의 사정을 우선해주십시오.

깨끗한 인정, 그리고 어쩐지 어설프던 LSJX.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금세 제자리에 돌아왔다. 아마 오늘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해도 아내는 서운해할지언정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혼자 가만히 쉬는 것보다,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끌어안고 싶어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예."

"세르."

벨망 경의 뒤에는 자비관에서 일하는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현기증이 났다. 그는 당장 일어나 자비관으로 향했다.

 

황후는 아롈이 멀쩡히 일어설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변해 잡담을 좀 나누다가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파해버렸다. 황제도 그렇고, 도대체가 이 부처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해놓고는 자기 할 말만 다 하면 끝인 줄 안다. 눈치를 보고 체면을 살려주는 법이 없었다.

아롈은 온갖 자긍심과 자부심을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려 냉막한 얼굴을 유지했다. 부축을 받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황후의 침실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도 잠시, 발바닥으로 땅을 딛는 감촉이 없다보니 어느 순간 무릎이 바깥으로 꺾였다. 아롈은 계단 바로 앞에서 나동그라졌다.

"어머나!"

아롈은 신음을 참았다. 남자분을 불러오네 마네 하며 소란을 피우는 것들을 잡아서 족치고 싶었다. 이본느와 소피가 오층에서 뛰어내려왔다. 아롈은 그녀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롈을 데려다주면서도 황후의 무도함에 대해 어이없어했다. 전처들을 볶기는 했어도 이렇게 노골적인 일은 없었다고. 전처인 루이즈 마리 역시 뒷배 없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후국(侯國) 출신 여자였지만 말로나 구박할 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면서. 아롈이 말을 막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사실 답을 안다. 쫓겨난 신세라 그렇다. 아롈이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한 코시카에서 부드럽게 돌려서라도 항의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는다.

비번인 시녀들이 전부 나와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아랫것들 앞에서 눈물을 짜는 것이야말로 가장 칠칠치 못한 행동이다. 앤은 아롈의 옆에서 부채를 부치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제정신이었다면 아롈은 세시안이 왜 이 시간이 들어오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겼으리라. 그는 항상 규칙적인 시간에 자비관에 왔다. 하지만 지금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흉한 꼴을 보이기는 싫었다.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치장을 해야 한다. 완전히 끝내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그러나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롈은 결국 포기하고 시녀들을 내보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위장을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처럼 아팠다.

"으."

뱀처럼 차가운 손이 종아리를 눌렀다. 아롈은 소스라쳤다.

[멍청하긴.]

릴레벨트였다. 아롈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리를 거두었다.

"뭐냐."

푸른 용은 작고 귀여운 외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꿈, 혹은 환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검푸른 머리카락. 호박색 눈. 키가 큰 여자의 모습으로 화한 그녀는 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롈을 조롱했다.

[그냥 고개 한 번 숙이고 못 하겠다고 울고 불든, 기절을 하든 할 것이지.]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아롈은 황후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황후 역시 아롈에게 왜 이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져주어야' 하는 건가. 아롈이 윗사람으로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왜 남편의 어머니에게 숙이고 굽히고 울어서 그 부당한 욕망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헛소리 하지 마라. 그런데, 너, 왜 갑자기..."

왜 갑자기 잠들었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는지. 아롈은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왜 하필 이 때 나타났는지. 아롈은 어이가 없어 물어보려 했다.

[너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야.]

"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갑자기 벨타가 침대 위로 기어올라왔다. 아롈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벨타는 앞으로 다가왔다. 이내 푹신한 베개가 등에 닿았다. 아롈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

[아, 이렇게 보고 있었구나.]

팔이 뿌리처럼 뻗어와, 흰 손이 목을 쥐었다. 전혀 힘을 주지 않아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차가울 뿐이었다. 하지만 아롈은 공포를 억누르려 이를 악물었다.

-죽어주세요.

아니, 옐레나 파블로브나. 기억해. 이름을 나누었잖아. 이 짐승은 널 못 죽여.

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공포스럽고 화가 났다.

"놔."

[다 보고 있었지. 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 차라리 배와 가슴을 갈라서 창자를 드러낸 시체도 그것보다는 속을 덜 드러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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