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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겨울싹 - 옐렌세스 연령반전 AU 외전


 “황후. 일어나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이마를 살짝 가린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새벽 햇살을 녹여 가늘게 뽑은 금빛, 같은 빛깔의 속눈썹이 정중하게 받치고 있는 홍채는 봄날 새싹처럼 여릿한 연둣빛이다.

속삭여 깨우는 목소리도, 일으켜 이끄는 손길도, 하다못해 손등에 닿는 입술의 감촉까지 설렌다.

이토록 잘생기고 키 크고 지고한 신분의 남자를 남편으로 두어, 황후로서 존중받고 사는 삶. 누구나 부러워하겠지. 나이차이가 조금 많이 나는 편이지만 푸른 피 간의 혼인에 드문 일도 아니다. 황후 자리도 아니고 황제의 정부 자리를 차지하려 내일 모레 예순인 남자에게 몸을 던지는 미녀들은 백사장의 모래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로렌의 루이즈 세바스티엔 조제핀 자비에라, 남쪽 제국의 마담 르와이얄이자 북쪽 제국의 황후인 소녀는 요즘 뾰로통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대체 남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남들은 황제의 장녀로 태어난 적도, 황제와 혼인한 적도 없을 텐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는 대신 세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한데다 몸이 잘 짜여있어 침의만을 걸쳐도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옐렌 1세가 세스의 손을 잡았다. 손이 폭 감싸였다.

“황후?”

세스는 숲 같은 초록빛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서리로 빚은 듯 고상하기만 했다. 밤새 몸을 섞을 때에도 저런 얼굴이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 다문 입술. 미지근한 조각상도 아니고.

열여섯 소녀는 스물여덟 살의 남편을 볼 때마다 항상 물어보고 싶었다.

있잖아요, 저를 좋아하기는 하는 건가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도 짐작할 길도 없었다. 그 흔한 정부 하나 없이 세스에게 잘 해주는 걸 보아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도 같은데. 꽃도 가져다주고 연회에 나가면 세스의 옆에 꼭 붙어서 근사하게 같이 춤을 추어주면서도 좀처럼 웃어주지는 않는다.

입술이 불만스레 튀어나왔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악! 악! 악!

세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요, 이 바보 같은 황제 폐하!

북쪽의 절대자, 용의 계약자, 오백 년 만에 나타난 마법사, 온갖 휘황한 칭호는 다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마법은 없는 건가요?

제 얼굴을 봐요. 이렇게 시무룩한 얼굴에 말투인데 정말 그걸로 납득한 거예요? 아니면 대꾸해주기 귀찮아서 납득한 척 하는 건가요?

“저기…….”

방을 나가려던 옐렌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말씀하십시오.”

“아니에요.”

그는 믿었다.

세스는 속절없이 서러워졌다.

 

“카나예프의 예브게니가 황후 폐하를 알현합니다. 폐하. 카나예프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키옌의 것입니다.”

아주 충직한 개처럼 단단한 인상의 사내가 무릎 꿇고 치맛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남자가 데려온 어린아이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이마를 손등에 붙인 탓에 둥그런 엉덩이가 하늘로 치솟았다.

“카나예프의 옐렌이 황후 폐하를 배알합니다.”

“일어나세요. 백작, 그리고 어린 카나예프 군도.”

“황공합니다.”

세스는 차를 내오라고 시키고 아이를 안아 올렸다.

“어디 보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군요.”

“귀한 관심을 나누어주시니 황감할 따름입니다.”

“황후 폐하. 오늘도 예쁘세요.”

“어머나, 고맙군요. 어린 공자님.”

보답으로 뺨에 키스해주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옐렌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남편인 황제, 옐렌 파블로비치 키옌 황제에게서 딴 것이었다. 황제는 이 아이의 대부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총애라고 할 만 했다.

뺨을 비비자 젖 냄새가 났다. 뽀얗고 통통해서 안고 있으려니 팔이 무거웠다. 바닥에 내려놓자 아이는 또 웃었다. 똑같은 ‘옐렌’인데도 이 옐렌은 생글생글 잘만 웃는다.

그걸 보니 또 심통이 났다. 대자의 반의 반만 웃어줘도.

아니 입도 달리고 눈도 달렸건만 왜 웃어주질 않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아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예쁘게 웃어보였다.

“폐하. 옐레니는 폐하의 거예요.”

목에 울컥 응어리가 치밀었다. 방금의 인사는 작위를 받은 가문의 주인이 아닌 귀족의 자제가 황족에게 하는 인사였다. ‘저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키옌의 것입니다.’아이가 긴 인사를 착각했나보다.

“레냐. 그 인사가 아니다.”

카나예프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황송합니다, 폐하. 신(臣)의 가르침이 부족한 탓입니다.”

“아니에요, 백작. 이런 어린아이가 저를 좋다 해주니 그저 고맙군요. 나중에 근사한 청년이 되면 꼭 데리고 와요. 손등에 키스 정도는 하게 해줄 테니.”

물론 그 때가 되면 그런 말을 모른 척 하고 싶어지겠지만요. 화사하게 웃으며 하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무척 속상해졌다.

어린 아이가 하는 말에 진심을 푹 찔린 기분이었다.

세스는 잠시 아이와 놀아주다가, 시녀를 불러 아이를 내보냈다.

“있죠, 백작.”

“하문하소서.”

“폐하께 여자가 있나요?”

마침 차를 마시려고 하던 제냐는 사레가 들렸다. 황후의 권력을 활용해서, 황궁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정사의 기미는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요즘 황제는 자다 말고 갑자기 슬금슬금 침실을 나갔다가 한참 뒤에 돌아왔다. 대체 뭘 하다 오는 걸까.

“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세스는 그의 표정을 보고 다소 안심했다. 이 젊은 백작은 황제의 젖동무로, 내내 붙어 자랐다.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면 정말 없는 것이다.

“그럼 옛날에는 있었나요?”

“폐하.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그럴 일이 있답니다. 그래서 대답은요?”

“소신이 알기로는……. 폐하. 차라리 직접 여쭈는 것은 어떠하신지. 신으로서는 감히 답변 드리기 어렵습니다.”

“있다는 뜻인가요?”

“비약이십니다.”

있다는 뜻인가보다. 해가 떨어진 듯 우울해졌다. 제냐는 세스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지만, 대답하기 싫었다.

세스는 어린 옐렌을 데려와 다시 예뻐했다. 아비를 닮아 어두운 갈색 머리에 검은 눈. 남편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아이는 뽀얗게 통통해서 귀여웠다. 놀아주다보니 금세 밤이 되었다.

시녀들이 들어와 치장을 풀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금세 노곤해졌다. 우울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왜 이렇게 우울할까. 처음에는 좋았다. 열두 살 위라 시커먼 곰 같은 사내가 나오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도착해보니 이교도의 남신상 같은 눈부신 미모의 청년이 남편이라 했다.

한눈에 반한 기분이었다. 예쁜 여자도 드물지만 잘생긴 남자는 더더욱 드물다. 하물며 이렇게 잘생기고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라니. 표정이 없는 것도, 다소 무뚝뚝한 것도 어린 세스의 눈에는 그저 근사하게만 보였다. 더군다나 흉악한 소문과 달리 그는 세스에게 꽤 정중했다.

정해진 결혼식과 정해진 초야를 치를 때에도 무섭지 않았다. 밤을 보낸 다음부터 열두 살이나 어린 세스에게 말을 지극히 높여줄 때에는 꺄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뻔했다.

그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입 맞추는 것도 좋고, 끌어안는 것도 좋고, 밤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가벼운 호감은 금세 사랑이 되고, 세스는 그렇게 꽃밭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헤롱헤롱 옐렌에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육 개월. 세스는 점차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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