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싹 - 센티넬버스 AU 외전 (3)
세스는 수액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 둘. 한 방울.
하나, 둘. 한 방울.
하나, 둘. 한 방울.
기계는 정확히 이 초에 한 방울씩 액체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액체는 긴 관을 따라, 바늘을 타고 소년의 몸으로 들어갔다. 흰 피부 아래로 파르스름한 핏줄이 훤히 비쳤다. 세스는 잠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아이는 어쩜 초췌한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있어도 이렇게 예쁠까.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성 안 침대에 고이 잠들어있는 공주님 같다. 그리고 그 공주님 같은 외모 안에 들어있는 건 홀로 개미들의 여왕을 무찌르는 굉장한 정신력이다.
공주님께서 저주에 걸린 지 벌써 삼 주째였다.
센터의 의사들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혼합성 폭주인데도 이렇게 조용한 센티넬은 처음 본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옐렌은 조용히 발작할 뿐, 단 한 번도 염력을 내뿜지 않았다. 폭주하는 센티넬을 수없이 보아왔을 의사들의 의견에, 세스는 정말로 착잡해졌다.
-가요! 가라고!
사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옐렌은 한 차례 발작을 일으켰다. 존슨이 운전하는 트리버의 차에서, 옐렌은 세스의 무릎을 벤 채로 깨어나 울먹였다. 흰자위가 새빨갛게 물들어, 여전히 뺨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요?
-아니.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목숨을 거는 거야. 알고 있어요?
-알아.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요?
-내가 네 가이드니까.
세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옐렌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세스의 뺨을 만지려는 듯이 손이 올라왔다가, 그 손은 허공을 쥐었다. 옐렌은 눈을 감았다.
차가 덜컹거렸다. 더이상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존슨은 발바닥으로 쭉 엑셀을 밟았다. 기록적인 속도로 도시를 주파한 그들은 센터의 주차장에 차를 댔다. 사실 처박았다는 말이 좀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신을 사랑해요.
옐렌이 그 말을 한 것은 절뚝거리며 존슨과 트리버가 먼저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기 직전의, 단 둘만 있는 찰나였다. 선팅이 덜 된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세스는 숨을 멈추었다. 옐렌은 원망스럽다는 듯이 눈을 꼭 감은 채로 마치 시라도 읊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제발, 사라져줘요.
세스가 같은 공간에 있었으므로, 옐렌은 제대로 혼절조차 하지 못한 채로 치료를 받았다. 세계 최강 센티넬의 폭주에 유서를 점검하고(‘써놓고’ 아닌 이유는, 센터의 모든 요원들은 의무적으로 유서를 쓰기 때문이다) 치료실로 들어간 의사들은 몇 시간 뒤 병실에서 한결 밝은 얼굴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집에 가셔도 됩니다, 미스 발루아. 혈장 분리 반출술이 아주 잘 듣는군요.
그런 대답을 들었음에도, 세스는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지난 삼 주 동안 세상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기물, 죽은 사람들. 개미들은 지구를, 아니 인간의 문명의 소산을 상당부분 무너뜨렸고, 인간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그것을 추모하고 슬퍼하고 다시 세우기 위한 힘을 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세스는 옐렌의 곁을 지켰다.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고, 집에도 가지 않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소년의 옆에 있었다.
핑계는 아주 다양하게 댈 수 있었다. 옐렌이 염력을 뿜어내지 않는 것은 세스 때문이었다. 센터의 의료진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조심해야 했다.
옐렌은 고아였다. 큰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옐렌이 십대 초반일 시절 사망했다고 들었다. 친척도 없어 병문안을 오는 사람 없이 병실은 적막했다. 옐렌과 안면이 있는 강력한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죄다 실려 나가 다른 병실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스는 옐렌의 가이드였다. 현재는 필요 없지만 옐렌의 의식이 돌아오면 옐렌을 위해 ‘일’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세스는 알았다. 그녀가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는 죄책감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차라리 한숨에 가까운 말이 계속 생각났다. 센터에 마련된 침실에서 자려고 누워도, 휴게실에서 잠깐 마실 커피 한 잔을 타도, 하다못해 복도 창문에서 살랑 들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쳐도 머릿속에서는 그 얼굴과 목소리가 자동재생을 걸어둔 동영상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몰랐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세스는 옐렌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고, 연애 경험도 적당히 있었다. 그 눈길, 표정, 말투, 태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렇게 강력하고 아름다운 소년이 그녀에게만 보이는 맹목적인 호의를.
부러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봄바람만큼 가벼운 애정이리라 생각했다. 애정 결핍이라 그럴 거라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몸을 섞다보니 여린 마음에 싹튼 호감을 애정으로 착각한 것뿐,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 금세 옮겨갈 애정이리라고.
정색하고 밀쳐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고백할까 말까 그가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면 포르르 날개 쳐 도망쳤으나, 그 이외에는 평소처럼 웃고 장난치고 떠들고 진하게 ‘일’을 했다.
일상이야말로 그를 변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리라고 믿었다. 괜히 받아주거나 내쳤다가 타오르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책임질 수 없는 애정을 깊게 만드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었다.
세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너는 진심이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가만히 있었는데, 왜 계속 다가오는 거니?
왜, 나를 흔드는 거니.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센터의 상급 센티넬, 트리버는 드디어 병실에서 나가도 좋다는 의사의 ‘안정’판정을 받자마자 옐렌 P. 키옌의 병실로 달려왔다. 깐깐한 그의 주치의는 한사코 동료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체 여기에 개인 정보니 하는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물론 센터가 폭발하지 않은데다 트리버가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옐렌이 통제력을 잃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
병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다른 여자의 손과 겹쳤다. 상대는 예의바르게 웃으며 물러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트리버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스 발루아.”
허리까지 닿는 새카만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는 한눈에도 초췌해보였다. 솜씨 좋게 화장을 하고,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어 꾸몄지만 눈이 붉었다.
“미스,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세스는 담담히 웃었다.
“제가 쓰러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밥도 먹고, 잠도 잘 자는데.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 해요.”
“사람을 지탱하는 건 잠과 식사뿐만이 아닙니다.”
고양이 같은 초록색 눈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잠깐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제가 살게요.”
트리버 역시 세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환영하는 바였다. 사실 용건이 없다고 해도 센티넬은 대체로 ‘가이드’에게는 관대했다.
둘은 근처 커피숍에 가서 마주하고 앉았다. 트리버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옐렌 그 녀석이 이 광경을 보면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볼 텐데. 스물네 살의 아가씨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김을 뿜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트리버 씨. 폭주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예.”
“많이 아픈가요?”
“잠들기 전에는, 예.”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사들이 진통제 처방을 해줍니다. 사흘 정도면 괜찮아지는 게 보통입니다. 옐렌 녀석의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한 달 째 깨어나지 않고 있어요.”
“접근 금지 신청 이후 한숨도 못 잤지요. 몰아서 자고 있는 걸 겁니다.”
세스는 두툼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쥔 채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에 대한 심리학적 용어가 있는 걸로 알아요.”
“미노츠 신드롬(Menottes syndrome, 수갑 증후군) 말씀이십니까?”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일방적이죠.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괜찮지만,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죽어버리니까요. 오감을 완전히 느끼지도 못하고, 이능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그녀의 말은 마치 연극배우의 대사처럼 들렸다. 트리버는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가씨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수갑을 양손목 모두에 차고 있는데, 열쇠는 가이드만이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죠? 납치범이 테러리스트에게 애정을 느끼고, 정신과 환자가 의사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그런 것처럼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건 ‘증후군’에 불과해요.”
“실례지만 미스, 지금 누구를 설득하고 싶으신 겁니까?”
트리버는 그 뒤에 이어질 긴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직접 옐렌에게 가서 이야기하라는 요지의. 그러나 황제 폐하의 가이드, 일명 ‘황후 폐하’는 과연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웃었다.
“일단 들어주시겠어요?”
“예.”
트리버는 그 기묘한 위압감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세스가 속으로 ‘과연 리트리버’라고 생각하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진심 같아요.”
“그 녀석이 미스 발루아를 좋아하는 건 센터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트리버 씨. 저는 지금 설득이나 해결책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제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 거죠.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건 부끄럽잖아요? 생각은 제가 하고, 결정도 제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부디 가만히 들어주세요.”
녹색 눈이 가늘어지며 그를 흘겨보았다.
“여자 친구 없으셨죠? 여자인 친구도요.”
트리버는 꼬리 내린 개처럼 닥쳤다. 한탄이 이어졌다.
“어린 애인 줄 알았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아기들이 나중에 커서 누나랑 결혼해야지 하는 거. 그러면 앞에선 오냐오냐 해주잖아요? 당연히 바뀔 거니까. 거기에 정색하고 거절하는 게 오히려 더 우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애가 아니라 아기인 척 하는 남자였던 거예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예뻐했고요. 사람 민망하게. 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런데요, 그 남자가 제가 좋대요. 저를 사랑한대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기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그는 여유작작한 얼굴 속에 당황을 감추고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세스가 질문했다.
“그럼 이제 결정을 해야죠, 저 좋다는 남자가 생겼어요. 받아줄까요, 아니면 걷어찰까요?”
“결정은 직접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스는 핸드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소가 맺혀있었다.
“네, 그렇죠? 고마워요.”
봄바람 같은 감사의 입맞춤이 뺨에 닿고,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 처녀는 날듯이 센터로 사라졌다. 그리고 커피숍에는 맹인안내견을 닮은 남자 한 명이 병문안이라는 목적을 잃고 씁쓸하게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