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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십이국기 세계관을 그대로 따온 AU 2차 창작입니다. 
2차 창작이므로 본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름 눈송이 - 세시아롈 십이국기 AU (1)


서(序)

 천제가 만들기를 땅 열세 개, 그리고 하나의 바다. 중앙의 땅을 황산이라 이름붙이고 바다를 허해라 하다. 황산을 둘러싼 연꽃 모양의 열두국가에 각각 이름을 내리니 이를 십이국이라 하다. 십이국에 왕과 기린을 한 명씩 내리고 천도를 지키며 나라를 다스리라 천명하다. 이 이야기는 십이국 중 하나인 주남국(奏南國)의 이야기. 


일(一). 아롈

 "전하."

 수도인 융합(隆洽)의 청한궁(淸漢宮).

 왕의 침실인 내전에 한 미인이 사뿐히 발을 들였다. 희끄무레한 여명 같은 금발을 종아리까지 늘어뜨리고, 화사한 비단옷을 걸쳤다. 주남국은 날이 덥다. 가냘픈 상체를 감싼 유는 하늘하늘한 항라로 둥그런 어깨와 가는 팔, 미숙한 목 근처를 어슴푸레하게 비추었다. 금빛으로 봉과 황을 수놓은 청색 허리띠로 가슴을 싸매고, 그 아래로 매끄러운 보랏빛의 치마를 드리웠다. 허리띠 아래로 구슬과 보석을 매단 끈을 여러 줄 주렁주렁 늘어뜨려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왕의 가장 은밀한 침소에 발을 디디는 데도 군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소우린(宗麟), 왕을 선택한 주남국의 기린이며 누구보다 귀중한 태보인 것이다. 왕과 기린의 목숨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왕이 죽으면 기린도 죽는다. 만약 소우린이 왕의 암살자라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암살자일 터였다.

 소우린은 내전에 들어서자마자 흠칫하고 발을 멈추었다. 주상을 '전하'라고 부른 말실수 때문이 아니다. 영롱한 감람석 빛깔 눈에 촛불빛 아래 잠든 남자가 고였다. 그녀는 피로에 지쳐 잠들어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히 종왕(宗王)이라 불리는 주남국의 왕이었다. 당연히 주남국 출생, 부모에게 받은 어엿한 성과 명과 자가 있다. 

 지금은 얼굴도 신분도 지위도 이름도, 그리고 관계까지 모든 것이 바뀌어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예전과 지금이 같이 남아있는 것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피로와 중압감 뿐. 그러나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소우린에게 종왕은 언제나 '전하'였다.

 소우린은 옅은 꽃잎색 입술을 꾹 깨물며 벽에 걸려있는 장포를 찾아 양손으로 펼쳐들고는 잠든 왕의 등에 살며시 덮었다. 왕은 신선이라 감기 따위에는 걸리지 않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행하길 바랐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은 소우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잠시 등을 바라보다가 미련을 남기고 뒤돌아서 내전을 나가 자신의 처소로 향하려 하는 그 순간이었다.

 "가는 거예요?"

 "꺄악!"

 뒤에서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는 통에 소우린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왕이 도리어 더 놀라서 소우린을 놓았다.

 "괜찮아요?"

 소우린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린은 나라를 지키고 왕을 보필하기 위한 짐승. 그러나 심장만은 달려있었다. 그 심장이 공포에 잠식되었다. 기린은 본디 폭력에 민감한 짐승이라고 한다. 이 세계로 넘어와 기린이 되기 전, 허해 건너 저 먼 세상의 황녀였을 때부터 소우린은 폭력에 약했고 어둠과 피를 두려워했다. 

 잘 짜인 마룻바닥과 왕의 옷자락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데 저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보(台輔)! 무슨 일이십니까!"

 눈 앞이 까매졌다. 소우린은 여전히 자존심이 드높았고 스스로의 연약한 부분을 남에게 내보이기 싫어했다.

 "별 일 없으니 물러가도록."

 모든 것이 변했다고 했는데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몹시 풍부한 음색의 부드럽고 매력적인 음성. 왕은 그 미성(美聲)으로 달려온 군사들을 물렸다. 

 "미안해요. 고개 들어볼래요? 괜찮아요?"

 왕은 소우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복숭아 같은 뺨을 어루만졌다. 

 "진정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런 말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내게 미안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니잖아. 그런 울분이 속에 또 한 번 맺혔다. 그러나 감히 토해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소우린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흉한 꼴을 보여 송구합니다."

 소녀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그저 경국에서 청조를 보내었기에 그 건으로 찾아뵈었을 따름이옵니다. 날이 밝으면 태사에게 일러 정식 문서로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서는 황녀가 아니라 해도 황녀로 자란 기억과 그렇게 키운 자존심은 여전했다. 소우린은 굳이 대나무처럼 허리를 세워 턱을 당겨서고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왕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굴욕감과 서러움이 뒤통수를 잡아서 눌렀다. 

 소우린의 이마, 전변(転変)하여 숨겨진 뿔이 바닥에 닿을 듯했다. 때문에 소우린은 왕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물러가옵니다, 주상."

 맹세의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다 할 것을 서약합니다. 

 뿔이 발등에 닿는 순간 하였던 맹세는 주박이 되어 지금껏 가졌던 마음과 과거를 꽁꽁 묶어버렸다. 가져서는 안 되고 품어서는 안 될 부정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예전에는 그저 사랑과 신의가 다였는데 그 자리를 충성과 약속이 메워버렸다. 그것이 못내 저주스러운데도 소우린은 그 때의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달콤한 걱정의 말 한 마디가 마음을 에이었다. 괴로웠다.

 "……!"

 뒤에서 이 땅의 것이 아닌 저 세계의 황녀가 가졌던 이름이 들려왔다. 소우린은 돌아보지 않았다. 왕은 다시 소우린을 잡지 않았다. 



 한 때 다정한 말과 뺨에 닿는 입맞춤 한 번에 속절없이 마음을 내어주었다. 따지고 보면 원수이나 자신이 잃은 모든 것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마음을 짓이긴 채로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 끌어안겨 웃고, 입맞추고, 셀 수 없는 밤을 같이 보냈다. 
 그는 손가락을 나뭇가지처럼 얽고는 수없이 약속했다. 그녀의 곁에 있겠노라고. 그에게는 그녀 뿐이라고. 그녀가 그의 삶의 끝이라 몇 번이나 속삭였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어겼다.



 소우린은 며칠을 앓았다. 본디도 몸이 약했으나 기린은 정말이지 연약한 생물이었다. 기린은 자비와 민의의 현신,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아프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두문불출하기 위해서는 고기 약간을 구해서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녀를 시켜 약간의 육포를 구한 소우린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고 육포를 씹었다. 결국 삼키자마자 토해냈으나 부정한 사기가 침범한 가냘픈 몸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소우린이 앓아누운 것은 희귀한 일도 아니었다. 여타의 기린이라면 앓아눕는 것이야말로 실도의 증거일 터이나, 태과 출신인 소우린은 유독 몸과 마음이 약하여 황산에서부터 자주 앓곤 했다. 처음 쓰러졌을 때에는 천붕이라도 겪은 양 호들갑을 떨던 시중인들은 상전의 병세를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

 소우린은 처소에 틀어박혀 자신이 주후(州候)로 있는 성주(誠州)의 일을 처리하며 콜록콜록 기침을 토했다. 열이 올라 흰 얼굴이 발겠다. 밍밍하고 쓴 녹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설탕과 밀가루, 우유를 듬뿍 쓴 과자들이 그리웠다. 

 "들어가도 될까요?"

 소우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언제나 기척 없이 들어왔다. 낯선 얼굴, 낯선 옷을 걸친 그가 서 있었다. 여전히 머리는 검은색, 그리고 눈은 숲 같은 초록색. 하지만 기억하는 그 얼굴은 아니었다. 정돈된 분위기는 묘하게 닮았으나 생김새만은 분명히 다른 이였고, 그리고 그였다.

 소우린은 짐짓 태연하게 붓을 정리하고는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 말아요."

 명령조의 어투에 소우린의 몸이 멈칫했다. 기린에게 있어서 주명은 무엇보다 우선한다. 이런 몸이 된 것이 서러워 무릎을 꿇어보려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예, 전하."

 그녀는 혀가 끊어져나가라 깨물다가 다시 바꾸어 말했다.

 "아니, 주상."

 왕은 소우린의 소복을 훑어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시녀들을 전부 해임해야겠군요."

 "월권이십니다."

 "예전에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이 아픈데 내게 알리지도 않았으니까."

 왕은 다가와 소우린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입술을 댔다. 

 "아프면 이야기를 해야죠."

 "그저 사소한 신병이온데 일일이 알려 번거롭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소우린은 입귀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함구하라 명한 것은 저이니 저부터 해임하소서."

 기린이 죽으면 왕도 따라 숨이 끊어진다. 

 왕은 문득 상처받은 듯 숨을 들이키고는 말끄러미 소우린을 바라보았다. 아, 또. 소우린은 숨을 들이켰다. 사랑의 흔적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꼭 그 모양 그 크기로 조각되는 것 같았다.

 "이야기 해주지 않을래요?" 

 "무얼 말씀이십니까?"

 "그 어떤 것이라도요."

 열이 올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왕은 소우린을 이끌어 앉히려 했다. 소우린은 어깨에 닿는 왕의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마세요."

 소우린은 연둣빛 눈을 치떴다.

 "저는 이제 전하의 아내가 아니고, 제 몸에 맘대로 손대시는 것을 참을 이유도, 전하께서 그러실 권리도 없습니다."

 또 전하라고 불렀다. 이 나라에는 전하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고칠 기력이 없었다. 세상이 핑 도는 듯 어지러웠다. 왕은 소우린을 부축하려고 하다가 손을 물렸다. 그는 굳이 자신이 상처입은 것을 숨기지 않았으므로 피가 철철 흐르는 듯한 참혹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 눕는 게 좋겠어요."

 왕은 신중히 단어를 골라 권했다.

 "당장 쓰러질 듯한 얼굴을 하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꼭 지금 해야 하는 일인가요?"

 "오늘까지 정리를 마쳐 상서성으로 넘기기로 했습니다."

 초록빛 시선이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소우린은 왕의 감정을 읽고 싶지 않았다. 더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소우린은 왕을 무시하듯 자리에 앉았다. 예의를 거스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참았다. 의자에 누군가 가시덤불이라도 깐 듯 따끔거렸다.

 ​"​명​령​하​시​겠​습​니​까​?​ 칙명이시라면 마땅히 신하로서 ​받​들​겠​사​옵​니​다​만​.​"​

 명령할 텐가? 그것도 좋았다. 이 마음 말려 죽이기에는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터이니. 실제로 소우린은 그런 생각으로 기린에게는 면제된 복례를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왕의 앞에 고개 숙여왔다. 소우린의 이죽거림에 결국 왕은 뜻을 꺾었다.

 "그럼 제가 기다리지요."

 왕은 보랏빛 장포를 벗어 벽에 걸고는 남는 의자를 찾아 앉았다.

 "예?"

 "어서 마치도록 해요. 누워서 잠드는 것까지는 보고 갈 테니까요."

 명백히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쫓겨나주고 싶어도, 이건 양보 못하겠어요. 제가 나가면 그 몸으로 밤을 샐 게 뻔하니까요. 미안해요."

 오리 모양 청자 연적에서 물이 너무 많이 흘러나온 것은 그저 조찬을 걸러 손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우린이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운 것은 먹물의 색이 평소보다 너무 옅어 글씨를 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때문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써지는대로 가져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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