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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겨울싹 - 옐렌세스 연령반전 AU 외전 - (2)


 마담 르와이얄, 로렌 황제의 외동딸.

 세상의 온갖 번드르르한 말이란 말은 다 듣고 자라났다. 로렌의 혼인 적령기보다는 한창 어렸지만 걷는 곳마다 소네트와 찬사와 꽃이 수북하게 쌓였다. 약속된 지참금은 사람의 자존심이며 배알을 포기할 만큼의 액수였다. 

 세스는 검은 곱슬머리가 간신히 등을 덮었을 때부터 쏟아지는 아첨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따라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이라는 동물은 진심 없는 구애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

 세스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미녀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요람에서부터 찬사에 휘감겨 자랐다고 해도, 젖동무가 그 유명한 오를레앙 대공녀 미셸 이라면 도저히 착각할 수 없기 마련이다. 

 잠시 착각해서 들떴다가도 고개를 들어 수은을 칠한 유리 거울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저 사람들도 눈이 있을 텐데. 미셸이 아닌 내게 더 아부하는 이유는 뭐지. 나는 누가 봐도 그렇게까지는 아름답지 않아.

 때문에 로렌 황제의 외동딸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칭찬과 찬사를 흘려들으며 중심을 잡는 법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안다. 

 말은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런 의미 없는 말조차 해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한편 코시카의 옐렌 1세는 세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파란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평생 솔직해도 된다는 강렬한 특권을 타고났다. 옐렌 파블로비치는 황제의 손자로 태어나, 삼백 년만의 마법사로 각성하여 즉위한 가장 정통성 있는 황제였다. 하고픈 말을 삼키고 우물쭈물 참아본 경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따라서 그는 막연하게 세스의 말을 믿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된다.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황제와 대등한 지위인 황후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고, 말하면 옐렌은 마땅히 들을 테니. 

 마치 지금처럼.

 "피어라."

 온통 초록빛이었던 줄기가 옐렌의 명령에 빠르게 자라났다. 그것은 흡사 시간을 빠르게 돌려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새하얗고 수줍은 봉오리가 맺히고, 이내 꽃망울이 터졌다. 그리고 흰 꽃이 푸르게 물들어갔다. 

 나른한 오후, 그는 괜히 황후에게 시종을 보내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답이 돌아왔다.

 -Rosa bleu

 갈리아 어로 푸른 장미라는 뜻이었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왠지 모르게 글자에서 심술이 묻어난다고 생각했겠으나, 옐렌이 그것을 느낄 리 만무했다.

 그는 단순히 생각했다.

 파란 장미가 갖고 싶다면 파란 장미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평범한 남자라면 '상식적으로 푸른 장미를 정말로 가지고 싶어서 요구했을 리 없으며 무언가 속뜻이 있을 것' 정도는 파악했을 테고, 따라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정도로 세스가 토라져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가서 멱살을 쥐고 싸우든 무릎을 꿇고 살살거리든 무시하고 기다리든 해결을 봤을 테지.

 안타깝게도 옐렌은 코시카의 황제이며 북부의 황제이며, 전능한 신의 대리인이며, 삼백 년만에 이 세상에 나타난 대마법사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아직 피어나지 않은 흰 장미 묘목을 파란 장미로 바꾸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약간 더 어려운 일에 불과했다.

 이윽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파란 장미 한 아름이 황제의 품에 들렸다. 풍성한 장미 다발은 옐렌의 아름다운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는 뿌듯함에 젖은 채 온실을 나섰다. 




 [친애하는 사촌에게. 

 안녕, 내 아름다운 사촌. 구구절절한 인사는 생략할게. 있잖아,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대체 눈치 없는 남자는 어떻게 해야되는 거니?]

 깨끗한 갈리아 어로 휘갈기듯 펜을 움직이던 세스는 한숨을 쉬며 종이를 찢었다. 손 끝에 잉크가 물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를 팽개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리기를 한참이었다. 그러던 세스의 눈에 장미 가득 꽂힌 화병이 들어왔다. 울분이 치솟았다.

 "아니,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파란 장미를 가져오랬다고 진짜 파란 장미를 만들어서 가져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세스는 씩씩거렸다.

 이 얘기를 들으면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괴짜인 사촌은 세스를 붙잡고 낄낄대겠지. 바다 너머 저 먼 곳에 있는 미셸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세스는 여전히 남쪽의 대화 문법에 더 익숙했다. 숙녀가 불가능한 것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면, 신사가 살살 구슬려 비위를 맞추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방식. 

 로렌에서 푸른 장미는 천사가 내려준 계시의 상징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약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노라는 증표로 사용되었다. 푸른 장미를 갖고 싶다고 한 것은 황제와 세스 사이에 있는 가장 중한 약속, 즉 결혼에서의 정절의 맹세가 여전한지 묻는 것으로,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인 그녀가 쓸 법한 세련된 투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아니면 못 알아들은 척 눙친 거야? 세스는 화병에서 장미를 한 송이 뽑아올렸다. 흰 장미에 잉크로 물을 들인 싸구려와는 달랐다. 수줍게 벌어진 봉오리, 보드라운 꽃잎은 싹틀 때부터 그랬다는 양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마법사, 그래, 마법사지. 

 열다섯 살에 즉위한 황제. 십 년도 넘게 치세 중인 아름다운 청년. 파란 장미를 갖고 싶다면 뚝딱 만들어서 갖다주는 사람. 하지만. 세스는 엉켜버린 마음으로 장미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냈다. 봉오리가 점차 얇아져 초라한 꽃술이 드러났다. 마치 그녀가 공공연히 가지고는 있지만 구차해서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마음 같았다.

 세스는 진녹색 눈을 내리깔아 노란 꽃술을 바라보았다. 

 이걸 꼭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는 거야? 달라고 졸라야만 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러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말할 수는 있다. 달라고 조를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세스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올라오고, 창백한 분홍빛 입술이 거절의 말을 내뱉는 상상을 한 순간 세스는 저도 모르게 장미 줄기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가시에 찔려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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