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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멸망했다.
아니, 문명이 멸망해야 했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아직 세상은 있으니까.
하지만 문명이 존재하던 세상은 사라졌다.
축축하게 젖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흠칫하며 잠에서 깨어난다. 이틀째 회색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습기가 몸속까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담요를 치워 말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전에 아파트였던 이 건물은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했다. 나는 어제 그나마 쓸만하던 방을 찾아서 몸을 뉘였었다. 다음날의 세상은 별반 다를게 없었다. 헐거워진 가방을 들쳐매고 문을 열었다. 녹슨 목제 문의 연결고리에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아파트를 수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위험했다. 감염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6년 이상 전의 일이었다. 새로운 암 치료제, 열광하던 세상, 그리고 변이와 바이러스의 활동. 다행인 것은, 바이러스는 체액으로만 전의가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빈 총포점을 털때 운 좋게 건진 리볼버가 어딨는지 다시 확인했다. 왼쪽 가슴의 홀스터. 자켓 안의. 어릴적 할아버지가 리볼버에 대해 극찬하던 것이 생각났다. 리볼버는 자동 권총보다 장기간 사용할때 좀 더 낫단다. 왜요? 총구압 가스를 걱정할 필요가 없거든.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44 매그넘 탄은 5발 장전되어 있었고, 6발 장전 가능했다. 한 발은 달려들던 감염자를 처리할때 썼다. 그때 기억이 생각나자 몸이 자동으로 떨렸다. 정말 죽을뻔 했어. 그땐. 나는 아파트 건물을 빠져나와서 방수포를 몸에 휘감고 쭉 걷기 시작했다.
잿빛의 세상은 가면 갈수록 그 색을 잃어갔다. 마을 너머에서의 나무들이 하루에 한 두개씩 쓰러졌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쓰러지면 그때는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걸까? 아니면 이미 세상은 멸망한 걸까? 구시대의 유물과 파편들이 있는 세상은 과연 멸망한 걸까 아님 그 명을 유지하는 걸까. 나는 잡념들이 뒤섞이는 것을 내버려두고 쭉 걸었다. 남쪽으로 가야했다. 적도로. 세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잿빛으로 바뀌면서 그 온도 또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10월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 11월 일지도. 빗살이 약하지만 상당히 추웠잖아. 맨 가방에는 담요들과 2~3일치 식량들밖에 없었다. 카트를 찾던지 아님 식량을 찾던지 해야했다. 가방은 무거웠다. 카트가 훨씬 더 쓸만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몇백 미터 정도를 걷자 큰 대형 마트가 보였다. 페인트가 거의 벗겨져 있어 알아볼수 있는 것이라고는 '월'밖에 없었다. 아마, 월마트 일 것이다. 저런 대형 마트는 위험했다. 대규모의 약탈자들이 있을 확률이 다분했고, 식량이란 식량은 전부 털린지 오래일 것이었다. 나는 그 마트를 지나쳐 마을을 빠져나왔다.
사람을 만난지 이주가 가까이 넘어갔다. 머리가 미쳐가는 기분이 들었기도 했지만, 아직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혼잣말이 늘어난다면, 당장 머릴 날려버려야 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머릴 날려버려야 한다고.
마을을 벗어나서 쭉 걸어서 숲에 접어들자 깊은 숲 속에서 총성이 울렸다. 나는 자동적으로 작은 언덕에 몸을 숨기고 앞을 봤다. 수북하게 쌓인 죽은 낙엽들과 고사한 나무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숲속은 그 아무것도 그 안에 있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품속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다섯발이야. 다섯발이라고. 만약 적이 여섯명이 온다면, 넌 네 명을 쏘고 머리에 총을 쏴야해.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언덕을 넘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중앙에 여러 약탈자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약탈자들. 무기를 가지고 집단을 이룬 자들. 세상은 생존자들과 약탈자들로 구별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먹었고,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쐈다. 그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마치 악마같았다. 나는 모여있는 그들을 조심히 노려봤다. 그들 사이에서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게 똑똑히 들렸다. 여자는 내가 먼저 먹는다. 아이는? 내가 먼저 할께. 남자여도 후장 조이는 맛은 있을걸. 놈들은 열 명 가까이가 모여있었다. 대부분 권총이나 볼트액션 라이플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지나가길 그저 엎드려서 기다렸다. 열 명 이상이다. 나에겐 다섯 발 뿐이었고, 네 발을 쏘면 한 발은 자살하기 위해 쏴야했다. 나는 그들이 지나간 것을 보고 경계하며 그들이 있던 곳을 지나쳤다. 그들은 마을쪽으로 향했다. 내 예감이 맞은 것이었다. 그 마트는 약탈자들의 소굴이었다. 아이 한명과 여자 한명.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잔인하고, 현실적인 운명이었다. 나는 그걸 되새기지 않으려했다. 지나쳐온 어느 비극중에서도 평범한 비극이었다. 그렇게 숲을 통과했다. 멸망한 세상에서는 감염자들 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살아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인간들은 이제 서로를 죽이고 있다. 살육의 끝은 끝이 없으리라.
운이 좋게도, 숲속에 있는 오두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예전에는 오두막 촌이었지만 두 세개만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그 형태만을 알아볼 수 있는게 끝이고 사용할 수는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스가 반 정도 남은 원터치 라이터를 꺼내들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불을 키자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눈으로 보자 코에 강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먹은것도 없는 위에서 무언가 올라오려고 했다. 목젖까지 올라온 구토물을 밀어삼키고 나는 앞을 주시했다. 벽면이 전부 피로 덮혀져 있었다. 아마 인간의 장기인 것들이 있었다. 대장, 위. 갈비뼈와 허벅지뼈. 나는 곧장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오두막촌을 뒤로하고 쭉 달려서 빠져나왔다. 허겁지겁 달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치 사냥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나를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숲의 수목선에 다다르자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 아니, 운이 좋은 것 이상이었다. 자칫하면 죽을뻔 했다. 나는 방수포를 좀 더 단단히 여맨 다음 수목선 앞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해는 하늘에서 지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건물에 들어갔다. 여관이었던 건물이었다. 연두색으로 칠했던 페인트는 이제 전부 벗겨져 있었고 콘크리트는 군데 군데 금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품속에서 꺼낸 리볼버를 앞으로 내밀며 여관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감염자나 다른 약탈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1층에 있는 모든 방을 열어보고 확인해보았다. 전부 털려있었지만, 허무함 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여긴 약탈자나, 다른 생존자들의 숙소가 아니였다. 나는 안전을 위해 2층의 방들도 체크했고, 역시 1층과 똑같은 것을 확인하고는 창문이 하나뿐인 방에 짐을 내려놓았다. 사실 이 방만 유리가 온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문도 있고 말이지. 나는 창문 유리밖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세상은 아직도 잿빛이었다. 멸망은 가속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곳에서는 사람들이 뭉쳐서 국가를 만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마을도. 하지만 그건 전부 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현실은 아니였다.
나는 가방에서 담요와 지도를 꺼냈다. 아까의 마을과 지금의 마을을 확인했고, 내가 지금 옳게 가고 있는 것인가를 확인했다. 마이애미로 가야했고, 마이애미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가던도중 죽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그래,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해가 지기전까지 권총을 들고 근처의 건물 두 셋을 뒤졌으나 나오는건 없었다. 그저 누군가 털어간 폐허뿐이었다. 나는 허탈감으로 져가는 해를 보며 여관으로 돌아와 가방에서 오늘자 식량을 꺼내들었다. 차갑게 식은 콘 통조림. 몇주전 마트에서 운좋게 주운 것이었다. 나는 그걸 뜯은 뒤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몸을 뉘우고 담요를 덮었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꿈을 꿨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풍요롭던 세상의 꿈을. 아직 푸르던 세상을. 아내도, 아들도 살아있던 꿈을. 따뜻한 햇살과 상쾌한 공기와 소소한 행복들. 어린 아들의 웃음과 아내의 표정. 아침 식사였던 구운 빵에 바르는 블루베리 잼. 나는 빵에 잼을 바르는 장면에서 깨어났다. 늘 항상 꿈을 꾼다면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꿈이었다. 세상은 변함없이 잿빛이었다.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