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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세계


투고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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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장 나는 그러고나서 차 뒤에 몸을 숨겼다. 응사되는 화살은 없었다. 나는 자동차의 깨진 창문 사이로 화살이 날아온 맞은편 건물의 2층을 노려보았다. 창문이 반 정도 열려있었고, 방금전까지 화살을 쏘아대던 그곳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나는 그 안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확인해내지 못했다. 하늘을 보자 해가 져가고 있었다. 혀를 차고 라이플을 맨 뒤 품속에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세 발. 나는 리볼버에 남은 권총의 탄약수를 상기했다. 그리고 맞은 다릴 절며 건물에 들어섰다. 약탈자나 감염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방금 본게 약탈자였으니까. 아님 다른 생존자거나. 나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어젖혔다. 여자가 있었다. 활을 들고있던 남자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30 윈체스터 탄은 자비 없이 남자의 머리통을 깨트려버렸다. 뇌수와 뇌였던 파편들과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여자는 깨진 남자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총을 조준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하지만 그녀는 그이를 잃었다는 슬픔에 오열하며 나를 저주했다. 이 살인마! 이 잔인한 약탈자!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죽인 것은 나였으니까.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저주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어서 쏘라고 부추겼다. 나는 그런 그녀를 그저 보고있었다. 총탄을 허비하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깨진 머리통을 내려놓고 화살을 들더니 자신의 목을 찔렀다. 피가 튀더니 컥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는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흠칫하며 뒷걸음 쳤다. 나는 처음으로 약탈자가 아닌 생존자를 죽였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허벅지에 박힌 화살만이 욱신거릴 뿐이었고, 이 아픔이 성가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죽은 여자의 시체를 멀쩡한 쪽의 발로 밀어두고 옷장을 뒤졌다. 이들은 그래도 살림이 좋은 편이였군. 그들의 옷장 속에서 나는 알약 통에 담긴 페니실린 두 정과 조금 지저분한 거즈, 그리고 가위를 발견했다. 저택에서 찾은 것 보다 더욱 큰 횡재였다. 항생제는 끝장나버린 세상에서는 성배와도 같은 물건이니까. 마치 죽어버린 신이 내게 행운의 미소를 짓는듯 했다. 나는 페니실린을 먹고 더러운 군용 침대에 앉아 화살을 빼냈다. 빌어먹을! 화살은 다행히도 동맥과 뼈를 빗나가 있었다. 아님 지금쯤 죽었으리라. 거즈로 허벅지의 상처를 꽉 매듯 감고 묶은 뒤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반 정도 남은 페니실린 두 병과 조금 남은 거즈와 가위. 나는 다른 방을 더 뒤졌다. 별 다른건 없었다. 잘 들어보이는 나이프 한 정과 썩어 문들어진, 아마 스팸이었던 무언가. 나는 시체가 있는 바로 옆방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놨다. 여기에도 창문이 있어서 밖을 볼 수 있었지만 최적의 자리는 옆 방이었다. 하지만 옆 방에 자리를 잡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기 있는 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나는 창문 바로 옆에 다친 다리를 쭉 핀 다음 주저앉았다. 계속해서 욱신거렸다. 진통제가 필요할 지도 몰랐지만 나에겐 항생제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있는게 어딘가. 그거라도 없었으면 이주 내에 파상풍으로 고통스러워하다 죽겠지. 피식 웃었다. 마치 내가 약탈자가 된 기분이었다. 단 몇 분전 죽은 여자가 날 매도하던 것이 생각났다. 잔인한 약탈자. 그렇다, 우린 모두 약탈자인 것이었다. 그 정도는 단 하나일 뿐이었다. 인육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그리고 죽은 시체는 지구 최고의 약탈자인 박테리아들이 남김없이 먹어치울 것이었다. 멸망한 세상에도 시체는 썩었고 생명은 죽어갔다.
 목이 말라왔다. 빌어먹을, 물이 없군.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라이플을 지팡이 삼아 안을 돌아다녔다. 반 정도 있는 생수통을 찾아냈고, 통조림 하나가 있었다. 콘 통조림이었다. 여기 있는한 필요한 모든것을 가지고 가야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어짜피 지금 세상은 그랬으니까. 나는 생수를 한모금 마시고 통조림을 들고 다시 방으로 되돌아와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밖을 보면서, 잿빛 하늘의 석양이 져가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보았던 아름다운 석양이 생각났다. 하지만 기억속의 석양과 지금의 석양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나는 창문의 아래를 보면서 다른 약탈자나 생존자가 지나가지 않길 바랬다. 오늘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건 사절이었다. 탄이 없을테니까. 나는 해가 눈에서 사라지고 칠흑같은 어둠이 다시 또 내려앉는 것 까지 확인한 뒤 담요를 꺼내 덮었다. 많은 죽음을 봤지만 잠은 잘 왔다.
 다시 또 꿈을 꿨다. 아들의 어리광에 옮겨 심은 사과나무 묘목. 그걸 흐뭇하게 지켜보던 아내. 가족을 태우고 바다로 향하던 드라이빙. 시원하고 짠내가 스며있던 바닷 바람과 바다를 처음 본 아들의 환호성과 기쁨. 아내의 키스. 야영. 따뜻했던 이불 속 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습관적으로 옆을 만져 아내가 있는지 확인했다. 당연히 아내도 아들도, 따뜻한 이부자리도 없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벼운 상실감에 잠겼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향수는 너무나 짙었다. 담요를 걷어 말고는 집어넣었다. 허벅지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도 않았다. 나는 품속에 넣어둔 페니실린 통을 꺼내 한 알을 먹고는 주변을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멍청했군. 리볼버도 라이플도 챙기지 않은 채로 잤던 것이었다. 나도 지쳐있었던 하루였는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창문 밖으로 잿빛 세상은 다시 한번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으로 돌린 시선을 다시 안으로 돌렸다. 리볼버를 주워 품속의 홀스터에 쑤셔넣고 가방과 라이플을 챙겼다. 나는 그리고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시체가 있는 방에 들어섰다. 이제는 피비린내 보다는 부패해 썩어들어가는 역겨운 냄새만이 났다. 박테리아가 시체를 먹어치우는 냄새였다. 나는 터진 남자의 시체에게로 다가가 손에 쥔 활과 화살통을 꺼내 챙겼다. 민수용 컴파운드 보우였다. 남자의 키에 딱 맞았고 남자는 나보다 작았다. 나는 활을 확인했다. 장력은 충분해보였다. 곧바로 챙기고 화살통도 챙겼다. 긴 라이플이 성가셨지만 뭐 어쩔 수 없으려나. 총보단 활이 좋았다. 정숙성이 있었고, 무엇보다 회수만 한다면 총알 걱정을 안해도 되니까. 나는 그러면서 라이플의 노리쇠를 당겨 열어 약실에 있던 빈 탄피를 빼냈다. 어제 쏘고 나서 당겨 여는걸 잊고 있다가 지금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전부 늦었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와 비틀거리며 남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허벅지때문에 나는 자주 쉬어야했다. 쉬면서 드는 생각은, 활과 항생제를 포기하는 댓가로 트럭을 타고 마이애미로 일자로 향했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상처와 항생제를 맞바꾸는 댓가로 트럭은 너무 위험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약탈자들과 감염자들을 자석마냥 끌어당기는 미친 물건이니까. 소음도 너무 크다고. 그렇게 자신의 자기합리화를 매번 끝마치고는 늦어진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마을에 닿기도 전에 지쳐 쓰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다음 바로 옆길의 숲에 깊숙히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잖아. 항생제도 있다고. 나는 다시 한번 항생제를 먹고 밤을 보낼 각오를 했다. 길에서 얼마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불을 피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얕은 비트를 파고 비트 안에 방수포를 깔고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길쪽으로 머리를 놓고 누웠다. 땅에서 지독한 한기가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활을 비트 옆에 두고 라이플을 길쪽으로 겨눈 후 잠에 들었다. 저녁도, 뭣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도 나답게 조금 숲 안쪽으로 깊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수목선이 50m 앞에 있었고, 밤에는 이 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불이 있으니, 나는 그들을 저격만 하면 되겠지. 하지만 소리를 주의해야 할 것이었다. 숲에서 총성이 난다면 녀석들은 분명 찾으러 올 테고, 난 다리를 다쳐서 멀리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까. 나는 가방을 머리에 배며 자기로 했다. 죽지 않기를. 살아서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지진이 난 듯이 울려댔다. 나는 욕을 내뱉으면서 라이플을 꺼내 단단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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