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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무언가가 텅텅 거리면서 떨어졌다. 나는 씩 웃으며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빨간 캔. 아이는 내가 쥔 물건을 유심히 보고있었다. 아이에게 캔을 건내며 말했다. 이게 코카 콜라라는 거야. 코카 콜라요? 그래, 한 번 먹어보렴. 캔을 따주자 아이는 몇모금 마셨다. 맛있어요. 정말? 네. 정말 맛있어요.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자판기를 뜯어서 몇 번 두드렸지만 나오는건 생수 두 통이 끝이었다. 그래도 그거라도 어딘가. 이런 세상에서 생수는 귀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얻은 생수 한 통을 집어넣고 다른 통을 까서 쭉 들이마셨다. 좀 괜찮군. 아이와 나는 뒷문을 따라서 주차장으로 빠져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생수 두 통과 아이의 행복. 통조림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얻은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 최단 루트를 잡아서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마 생각대로라면 저긴 생존자 밖에 없을 것이다. 시선이 계속해서 달라붙었으니까. 약탈자가 없는게 어딘가. 다시 아스팔트 도로와 숲으로 돌아오자 나무가 하나 쓰러졌다. 고사한 나무였다. 아이는 나무의 쓰러짐에 움찔했다. 무슨 소리예요?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서 아이의 페이스에 맞춰 함께 걸었다. 숲속에 감염자나 약탈자가 나오지 않길 빌면서. 어느 정도 기도가 효과를 봤다고 생각했다. 길은 조용했다. 그 어느때와 똑같이 말이다. 아이는 그 길 위에서 가끔 뛰었고, 어린 아이 다운 왕성한 호기심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곧 지쳐 꾸준히 걷는 나를 앞에 서서 기다렸다. 나는 아이에게 간단한 주의만을 줬다.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서렴. 알았니? 아이는 내가 걱정하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승낙했다. 그것만 지키면 나는 아이에게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잊고 있었던 걸까? 저렇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의 등과 웃음을 말이다. 나는 한 여자의 죽음을 눈 앞에서 경험한 결과로서 지금 저 아이를 맡게 된 것이다. 여자의 죽음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아이를, 아이를. 입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그녀. 나는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정말 잘 보호했다고 문득 생각했다. 평화의 여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밀어버린 이미지 위에서 무수한 잡념들이 잡초처럼 솟아났다. 우린 계속 걸었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늘 항상 잿빛이었다.
도로의 끝이 보이기도 전에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려고 했다. 아이는 뒤돌아서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해가 지고 있어요. 오늘은 길 위에서 자야될성 싶구나.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마침 샷시와 유리가 남아있는 승용차가 보였다. 안에 보자 앞좌석 등받이가 어딜 갔는지 사라져 있었다. 핸들도. 하지만 중요한 시트는 남아있었다. 어떤 바보들인진 몰라도 시트를 안가져 가다니, 정말로 바보같은 녀석들이었구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는 빨리 가라앉았고 또한 그 연한 불빛을 빨리 져버렸다. 어둠이 찾아오자 한기가 몰아쳤다. 나는 아이와 함께 근처 숲속에서 죽은 나뭇가지들을 주워 늘 그렇듯 승용차 근처에 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아이가 말했다. 코카 콜라가 그렇게 맛있는 건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 옛날 세상에서는 그걸 원없이 먹을 수 있었단다. 우와, 정말요? 그럼, 물론이지. 좋은 세상이었네요. 그래, 정말 좋은 세상이었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제는 끝나버린 과거의 단편적 기억들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잘 기억나진 않았다. 꿈이면 선명했지만, 아니면 흐릿할 뿐이었다. 꿈이라는 영상기만이 흐릿한 기억들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옛날 세상은 어땠어요? 옛날 세상? 네, 옛날 말이에요. 아이는 내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마 코카 콜라가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다. 조금 귀찮아 졌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이에게 옛날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언제일까. 이것도 소중한 추억이 될 지도 몰랐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옛날 세상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 정부, 사람들, 경제,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들과 내 기억들. 아이는 그걸 어려워 했고 상상할 수 없어 했다. 당연한 것이리라. 세계의 사람들이, 그 먼 과거에 걸쳐서 이룩해낸 거대한 체제들과 물건들과 변화되어버린 세계를 내 단편적인 설명 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이는 내 설명을 전부 듣고 그래도 좋은 세상이었겠네요 라고 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간단했고, 명료했다. 코카 콜라를 원없이 먹을 수 있는 세상이었잖아요. 뭘 먹기위해 누굴 죽여도 되지 않는 세상이었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누굴 죽여도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과거는 좋은 세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말을 납득했다. 가방에서 통조림을 꺼냈다. 이번엔 햄이었다. 나는 남은 두 개의 통조림의 종류를 봤다. 햄과, 참치였다. 참치는 다시 내일 아침에 줘야겠군. 만약 햄을 싫어한다면 강제로라도 반 정도를 먹여야했다. 먹어야 걷는 것을 버틸테니까. 아이에게 햄 통조림을 보여줬다. 아이는 와, 하며 통조림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아이에게 통조림을 건내주고 물었다. 아는 거니? 네! 아이가 활짝 대답했다. 햄 통조림이잖아요. 엄마랑 아빠랑 같이 먹은 적 있어요. 아이는 그 기억을 소중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나는 끄덕이고는 햄 통조림을 피워놓은 불 위에 달구기 시작했다. 남은 통조림의 숫자를 되새겼다. 하루 치군. 하루 치 남았단 말이지. 내일 도착할 마을에서 어떻게든 통조림이든 뭐든 얻어야만 했다. 생존자를 약탈해서라도 말이지. 결심을 굳혀야만 했다. 아이를 굶길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달궈져가는 통조림을 보며 문득 내게 물었다. 우린 사람 안먹을 거죠, 그렇죠? 그래. 정말이죠? 그래, 맹세하마. 작게 대답했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사람도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생존이라는 늪은 매우 질척하고 깊어서, 모든걸 그 안으로 끌어당겨 잠식시키기 마련이였다. 내가 지키고 있는 불문율인 식인 금지마저도 굶다 굶다 안돼면 저지를 수도 있었다. 적절하게 달궈진 통조림을 불 위에서 빼내 조심스럽게 깠다. 온기가 훅하며 올라오며 익은 햄이 보였다. 나는 숫가락과 함께 아이에게 건냈다. 아이는 오랜만에 먹어본다는 햄 통조림을 처음 봤을때 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에게서 시선을 때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에 겹쳐 흐릿한 달빛은 약하게 내리고 있었고 지상에 내려앉은 어둠을 내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반달이군. 일주일 후면 보름달인가. 나는 날짜 개념을 달로 잡았다. 별자리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날이 가는 것을 보름달로만 계산했다. 숲속에서 다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벌써 나무의 쓰러짐에 익숙해진 듯 했다. 오늘 아침과 비교되게 1/4가 남은 햄을 전부 먹고나는 담요를 아이에게 건냈다. 아이는 나와 함께 자고싶어 했지만 승용차의 뒷자석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아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난 어디 가지 않을거니까. 알았지?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이가 잠들때까지 담요를 덮어주고 불 앞에 앉아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보자 아이는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온기가 남아있는 몸이 식기전에 앞좌석의 시트에 들어가 몸을 뉘였다. 브레이크와 기어는 떨어진지 오래였다. 불편했지만 못잘 정도는 아니였기에, 나는 곧 빨리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박살나 부서지기 시작한 세상. 비명들. 시작되는 약탈. 아들의 울음과 아내의 걱정어린 표정. 두 번째로 죽인 감염자. 주 방위군의 전멸. 약탈자들과의 전쟁. 아들이 잠들고 나서 아내와의 대화. 우린 전부 죽을꺼야. 아냐. 아니, 우린 전부 죽을꺼야. 당신은 그들을 막을 수 없어. 당신을 죽이고 죽어가는 당신 앞에서 나와 우리 아들을 강간하고 죽이고 찢고 먹을거야. 아니야,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거야.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그래, 맹세 할 수 있어. 절대 놈들이 당신과 우리 아들을 건들지 못하도록 할게. 불안해하던 아내의 떨림과 체온. 사랑해, 여보. 아내와의 입맞춤에서 나는 눈을 떴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이가 자고있는지 확인했다. 좀 뒤척였긴 해도 새근거리며 잘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차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