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남매
누군가 쿡 볼을 찔렀다.
잠들어 있던 소녀는 정수리에 찬물이라도 쏟아진 듯 소스라쳤다.
"누구냐!"
상대는 기겁해선 소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토닥였다.
"쉬, 쉬, 아롈, 나야. 진정해."
분명 아는 목소리였다. 아롈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달을 등진 그림자 역시 곰처럼 듬직한 것이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이었다.
"사샤?"
그림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품위 없는 한숨 한 줄기가 입술 밖으로 새어나왔다. 아롈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이제 보니 모든 것이 다 눈에 익었다. 천장, 창문, 흐릿하게 보이는 가구. 황도에 있는 아롈의 방이었다.
진정하자. 여기는 키예프가 아니야.
아롈은 혹여 심장이 튀어나올까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잠이 안 와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지. 차를 마시는 건 숙면에 하등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각설탕을 집어 먹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던가. 탁자를 흘끗 보니 보던 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입 안은 설탕 때문에 텁텁했다.
안도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을 것 같은 경악과 공포가 가신 자리에 물밀듯이 밀려온 것은 다름 아닌 짜증이었다. 아롈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미쳤어?"
사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을 뿐인데 태산이라도 움직이는 듯 요란했다. 하여튼 나이 먹고 덩치만 커져서.
"우리 공주님 깼어?"
"근위대 불러서 연행하기 전에 당장 꺼져. 대공 전하께서 감옥에 갇히는 꼴도 참 볼 만 할 거야. 그것도 여대공의 방에 멋대로 침입한 죄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네, 네, 알겠습니다, 여대공 전하. 이 오라비가 다 잘못 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말끝을 길게 늘이는 말본새가 대단히 거슬렸다. 저게 정말 하나뿐인 오라비만 아니었어도. 생각 같아선 치한이 들어왔다며 빽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저 웨데나에서는 혼인 날짜 받아놓은 왕녀의 침실에서 벌거벗은 사내가 발견되어 다혈질인 왕이 사내를 거세해서 내쫓았다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롈은 끙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천천히 깨지 않고 갑자기 깨면 꼭 이랬다. 감기도 아닌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알렉산드르는 소녀의 이마에 거대한 손바닥을 얹었다.
"왜 그래? 또 머리 아파?"
"사샤가 깨웠잖아. 정말로 겨우 잠든 거였단 말이야."
소녀는 볼멘소리로 투정했다. 아롈은 어머니를 닮아 잠귀가 밝았다. 인기척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잠을 못 이뤄 법도 상 같이 밤을 새야하는 당직 시녀도 두지 않는 마당이었다. 잠에서 깨면 있는 대로 성질을 내는 소녀의 성정을 아는 이들은 소녀의 방 근처를 지날 때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찬 대리석 복도를 걷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롈은 사흘 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그 놈의 동화책이 화근이었다. 삽화가는 실력을 그리 뽐내고 싶었는지 마녀의 얼굴을 쓸데없이 자세히 묘사해 놓아 소녀의 마음에 악몽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눈만 감으면 매부리코가 잡힐 듯 보였다.
"한 번 깨면 잘 못 자는 거 다 알면서 꼭 깨우지? 자꾸 그러면 회랑을 이용해서 내 방에 몰래 들어오는 거 폐하께 다 일러버릴 거야."
"미안해. 이번에는 정말 얼굴만 살짝 보고가려고 했는데 불편하게 자고 있어서 그랬어."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알렉산드르를 작은 주먹으로 투덕거리노라니 조금은 분이 가셨다. 알렉산드르는 눈치가 좀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좋은 오라비였다. 아롈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것도 알렉산드르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덟 살 소녀는 마치 여든 살처럼 한숨을 쉬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곰이 아니라 썰매 끄는 개를 닮은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털이 난 모양새가 비슷했다. 아롈은 오라비의 북슬북슬한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나 잘래. 침대로 데려다 줘."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라 걸어가면 그만이지만 그냥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여동생의 잠을 깨운 오빠는 여동생을 침대로 데려다 줘야 할 의무가 있다. 게다가 저 덩치에 나 하나 옮긴다고 무슨 탈이라도 나겠어?
아롈은 그렇게 제멋대로 합리화를 끝낸 채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는 군말 않고 여동생을 가뿐히 안아 올렸다. 아롈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먼지 냄새, 술 냄새,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바깥의 냄새. 지금까지 못 맡고 있었던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바보, 사샤는 바보. 또 나갔다 왔구나.
알렉산드르는 조부에게 '회랑'의 사용권을 얻은 뒤부터 신이 나서는, 변장을 하고 성 밖에 나가 평민들과 어울리는 천박한 취미를 개척했다. 심지어 아롈을 몰래 데리고 나간 적도 있었다. 아롈은 대체 그런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왜 나가려고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을 놔두고 왜 천민 소굴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아득바득 악을 쓴 끝에 아롈을 데리고 나가려는 시도는 없어졌지만 한심한 건 여전했다.
아롈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래, 밖으로 구경 다니는 건 그렇다고 쳐. 이런 누더기는 왜 걸치고 다니는 거야? 누가 보면 날 납치하는 불한당인줄 알고 총부터 쏘겠네. 내가 이런 더러운 옷 입고 만지지 말라고 얘기 했는데. 사람이 말을 하면 꼭 안 듣지.
온갖 생각이 뒤엉키는 와중에 그는 아롈은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고운 면사에 빽빽하게 수를 놓고 솜을 채운 이불은 대단히 값진 물건이었다. 침구류를 지저분한 손으로 만지는 행태에 잠시 욱했지만, 이미 침의 차림으로 품에 안긴 마당에 뭐라 할 것도 못 된다 싶어 타박할 마음을 고이 접었다. 날이 밝으면 시녀를 시켜 요부터 베개까지 죄다 바꾸라 할 요량을 품고, 아롈은 베개에 등을 묻었다.
"고마워."
"동화책이라도 읽어줄까?"
그 놈의 동화책은.
"누가 옆에 있으면 잠 못 자는 거 알잖아."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싱긋 웃으며 사라졌을 오라비였다. 그런데 거기서 알렉산드르는 쓸데없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타샤는 꼭 내가 손을 잡아줘야 자던데."
아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알렉산드르는 제가 만든 작품에 당황하는 듯했으나 아롈은 도저히 얼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타샤란 나탈리야 돌로루코바의 애칭이었다. 그녀는 남매의 어머니인 옐레나 키릴로브나 대공비의 시녀였는데, 두 살 연상의 그녀를 흠모하던 알렉산드르는 나탈리야의 슬리퍼를 훔쳐내 안고 자는 등 온갖 주접을 다 떨었다. 온 궁정에 소문이 퍼지자 나탈리야는 못 이기는 척 알렉산드르와 교제 중이었다.
"화났어?"
아롈은 웃으려 애쓰며 미간을 문질렀다.
"아냐. 어차피 그 여자랑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그 둘은 세상이 끝나도 결혼할 수 없었다. 돌로루코프 가는 공가이긴 해도 독립된 공국과 전하 호칭이 없는 비통치가문이었다. 황실의 내규 상 키옌/키예나의 성을 지닌 대공과 여대공-즉 황실의 직계손-은 반드시 통치가문과 혼인해야 황제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정교회의 수장인 동시에 나라의 수장이니 황제의 승인 없이 하는 결혼은 모두가 무효였고, 그 사이에 낳은 아이들도 계승권을 받지 못 하는 사생아가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했다.
"왜 안 된다고 생각해?"
아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샤, 미쳤어?"
"안 미쳤어."
"그런데 나탈리야랑 결혼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
"나는 타샤를 사랑해. 타샤도 날 좋아하고. 그런데 결혼 못 할 이유가 있어?"
"사샤가 황궁에 돌아다니는 시종 나부랭이인 줄 알아? 폐하께서 승인해주실 리가 없잖아!"
알렉산드르는 이반 3세의 유일한 직계 손자로 차차기 황제가 될 몸이었다. 정부와 사랑놀음에 빠진 아들을 못마땅해 하는 조부는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황위를 물려주는 것도 고려하는 눈치였다.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지금은 자유로운 연애를 용인하는 궁정의 분위기 상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지만 알렉산드르에게 약혼녀가 생기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그는 벌써 열여덟이었다.
"황위는 누가 이으라고?"
"네가 이으면 되겠네."
"헛소리 마."
"나만 없어지면 네가 차차기 여제 아니야? 옐레나 1세도 왕명으론 괜찮지 않나?"
아롈은 이마를 꾹 찌푸렸다. 짜증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우리 공주님이 나보다 공부도 더 잘 하고, 열심히 하고, 동쪽 말도 더 잘 하잖아. 그러니까."
"폐하께서 사샤를 그냥 놔둘 거 같아? 요절을 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쫓아내시기 전에 도망가서 둘이 잘 살면 되지."
"아, 마리야 고모님처럼? 천한 이들 사이에 섞여서 맨발로 밭이라도 갈 셈이야?"
그렇다고 나탈리야를 정부로 들일 건가? 절대로 정부 따위는 들이지 않겠다고 아롈의 앞에서 다짐한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냥 헤어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겨우 여덟 번째 생일을 치른 아롈도 다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열여덟 씩이나 되면서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아롈은 주먹을 꼭 쥐었다. 정말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안온하던 분위기는 벽에 던진 도자기처럼 박살나서, 시퍼렇게 날 선 조각처럼 흉흉하기만 했다.
평소라면 먼저 져주고 미안하다 했을 오라비가 벙어리인 양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도망이라도 칠 요량이었어?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정말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요새 타샤가 달거리를 안 해."
한숨 섞인 목소리가 뒤통수에 철퇴처럼 떨어졌다. 아롈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가."
"아롈."
"나중에 얘기해. 오늘은 이만 잘 거야. 사샤가 무슨 거짓말을 하든지 안 들을 거야. 지금 안 나가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근위대를 부를 거야. 아니면 비명을 지를 거야. 살려달라고 할 거야. 아니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거야!"
숨도 안 쉬고 말을 내뱉자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띵해졌다. 가빠진 호흡을 추스르면서도 아롈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파란 눈이 아주 슬픈 빛을 띠었다.
아롈은 부러 매몰차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가. 당장."
"그래. 확실하지 않은 얘기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쓸데없이 따뜻한 손이 소녀의 정수리를 덮었다. 아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 자, 옐레나 파블로브나."
알렉산드르는 '회랑'의 문을 열고 떠나갔다. 그리고 아롈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리고 여섯 달 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의 작위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탈리야 돌로루코바 공녀와 귀천상혼하여 도망친 죄였다. 노발대발한 이반 3세는 귀족들의 거센 반대를 찍어 누르고 그의 모든 작위와 영지를 회수한 다음 그의 이름을 황실 계보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아롈은 외동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