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금의 비 (5)
결혼식은 떠들썩했다.
원래 코시카의 결혼식은 사흘 밤낮으로 먹고 노는 잔치였다. 지방의 세도 있는 귀족 집안에서는 일주일 동안 잔치를 여는 경우도 흔했다. 농한기에 식을 올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봄맞이 축제도 부활절도 지난 따뜻한 봄이었다. 일반적으로 봄에서 가을까지 하는 결혼은 혼전에 아이를 배고 하는 결혼이라 하여 축제를 짧게 마쳤다.
그래서 아롈의 결혼식은 전통식으로 하루, 정교회식으로 하루 그렇게 이틀로 잡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겨우 해가 졌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다가 하마터면 식순을 놓칠 뻔했다. 이걸 일주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까마득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신부는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 의식을 치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자연적으로 흐르는 샘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아주 얇은 천만을 걸쳐, 절로 이가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궁정에서 아롈 다음으로 지위 높은 여성인 예카테리나 대공비가 손수 몸을 닦아주었다.
신부의 어머니가 입혀주어야 할 혼인 예복도 그녀가 대신 시중들었다. 아롈은 여제가 오는 걸 전혀 바라지 않았으므로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롈이 태어난 직후부터 정말 시종일관 무심한 어머니였다. 오히려 식장에 신부의 부모가 들어올 수 없다는 표트르 대제의 칙령이 마음에 들 정도였다.
아롈은 어머니의 부재보다 예복에 더 마음이 쓰였다. 예복은 피처럼 붉은 비단에 금실로 다복, 다산을 기원하는 수를 가득 놓아 만들었는데,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하게 공이 들어갔다 싶었다. 아롈은 이 옷에 바늘 한 땀 뜨지 않았으니 다른 누군가가 바느질을 했겠지. 대체 그 여자는 얼굴도 모를 여자의 혼인 예복을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짧은 회한은 물거품처럼 금세 사라졌다.
몸에 가득 금붙이를 매달자 너무 무거워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목에 금목걸이를 셀 수 없이 걸고,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찰랑거리는 팔찌도 했다. 마지막으로 성 소피야 훈장의 별을 매달자 아롈은 웬만한 자산가도 덥석 집어가고플 만큼 번쩍거렸다.
그래도 신부가 납치되는 꼴은 두고볼 수 없었나보다. 대공비는 그 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과 같은 색의 베일을 감았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였다간 마귀가 쫓아와 행복한 신부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에서 비롯한 풍습이었다. 옛날 한 공주가 미모를 뽐내며 베일을 들어 올렸다가 갑자기 용에게 납치되었다던가.
그 같잖은 이유 때문에 아롈은 식장에서도 베일을 벗고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그나마 첫날밤을 보낼 때까지 베일을 쓰고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로렌에 도착할 때까지 베일을 쓰게 하자는 멍청한 의견을 낸 대신도 있었다. 다행히 무산됐지만.
아롈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부디 그 돼지 같은 피가 대대로 내려가서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성 불구자나 되라지.
대리 신랑인 필리프가 말을 타고 데리러 오자, 신부는 슬픈 노래를 부르는 여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식장으로 이동했다. 부모와 형제를 떠나 먼 곳으로 가는 것을 한탄하는 노래는 신부가 가장 슬프게 불러야 했지만 이동하는 내내 아롈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하는 육신의 어머니, 나의 경애하는 육신의 아버지. 나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여. 이제 나는 떠나네. 먼 곳으로 가 다시는 볼 수 없다 하여도 주께서 내리신 천국의 문 앞에서는 볼 수 있겠지.
가사가 정말 청승맞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노래를 불렀다간 멀쩡한 결혼도 단박에 파국으로 이를 것 같았다. 그렇게 식장으로 도착해서 먹고 마시는 걸로만 해가 저물었다.
혼인식의 잔치는 대사와의 만찬과 달리 정말 북부식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구수한 음식 냄새가 홀에 가득 차 있었다. 돼지 통구이, 칠면조, 양갈비가 끝도 없이 나왔고 투명한 보드카를 마치 물처럼 퍼마실 수 있었다. 북쪽에서는 귀한 초콜릿도 아낌없이 나왔다. 어린 신부는 입술만 깨물었다.
정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목구멍에 신물이 올라왔다. 아침부터 입에 들어간 음식이라곤 물 몇 모금에 포도주 몇 모금 뿐이었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통구이에 다 눈이 돌아갔지만 신부가 베일 속에서 돼지 다리를 뜯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군침만 삼킬 뿐이었다. 저 멀리서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 미셸이 다 얄미웠다.
자신의 결혼식인데도 한 팔촌쯤 되는 이의 결혼식인 양 현실감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극심한 배고픔과 졸음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데 신께서 보우하사 드디어 뿔피리가 세 번 울렸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식장 중앙을 비웠다. 귀족과 하인을 가를 것 없이 모두 힘내서 탁자를 치우고 움직이자 순식간에 홀 입구에서 아롈이 앉아있는 단상까지 거대한 대로가 만들어졌다.
은은하게 식사를 돕던 음악 대신,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박자 중심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 아무리 뚱한 사람이라도 슬쩍슬쩍 어깨를 흔들 정도로 흥겨운 전통 음악이었다.
한 사람이 먼저 탁, 탁,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발이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이내 수백으로 늘어났다. 홀을 통째로 무너뜨리려는 적국의 음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리가 커졌다. 손뼉 소리, 발 구르는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고 악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피리를 불었다. 이 날을 위해 수십명의 악공이 홀 가장자리를 빙 둘러 대기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익숙한 리듬. 심장이 음악에 맞춰 피를 흘리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일었다.
아롈은 배고픔도 잊고 홀린 듯이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 음악의 절정에서 다시 웅장한 뿔피리가 울렸다. 모든 소리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뚝 멈췄다.
아롈은 화들짝 놀라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베일 너머로 보는지라 정확하지 않지만 다행히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궁정무관이 배에 힘을 가득 주고 소리 질렀다.
"토끼 납시오!"
과연 토끼가 나타났다. 단 짐승 토끼가 아니라 사람 토끼였지만.
엉덩이에 앙증맞은 털복숭이 꼬리까지 장착한 채로 나타난 소녀는 콘스탄틴 대공과 예카테리나 대공비의 막내딸 아나스타샤 여공이었다. 갈색 머리칼에는 응당 있어야 할 모자나 베일 대신 북슬북슬한 토끼귀가 비쭉 솟아 있었다. 토끼로 분장한 어여쁜 아이는 장내에 웃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 토끼 요정은 구둣발로 탁탁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모두들 숨죽여 구경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붕붕 떠올랐다. 소녀가 몸을 날렵하게 돌릴 때마다 은실로 수놓은 흰 치맛자락이 둥그렇게 잔상을 남겼다.
코시카의 전통 춤은 박자가 분명해야만 했다. 아롈은 가만히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손놀림 발놀림은 정확하진 않아도 꽤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빠른 박자에 맞춘 춤이라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토끼는 잘 넘겨냈다.
토끼는 무사히 대로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혼인을 축하드리옵니다! 아름다우신 신부님."
토끼는 사랑스러운 아나스타샤로 돌아와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자그마한 어깨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바빴지만 축복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부디 전하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 하기를. 전하께서 닿으시는 곳마다 밀이 풍성하게 자손을 낳고, 전하께서 숨을 내뿜으시는 곳마다 양이 알곡을 맺기를."
뭔가 바뀐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소녀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궁정 무관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공 납시오!"
순서대로 공, 멍석, 처녀의 아름다움, 말, 침묵으로 분장한 남녀가 차례대로 춤을 추며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부에게 축원을 하곤 금비를 내려달라 소리쳤다.
은으로 도금한 거대한 공을 들고 나타난 라트비아 공왕의 아들, 카펫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운 멍석을 든 리투아니아의 젊은 대공, 당나귀 분장을 한 스미르노프 공작의 딸 리디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리본 달린 봉을 꼭 잡은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그리고 침묵을 상징하는 입 막힌 가면을 쓴 뚱뚱한 여인이 토끼를 가운데에 두고 죽 늘어섰다.
일곱 상징에게 금품을 주는 것은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만약의 일을 방지하기 위한 미신이었다. 공은 미혼 남자가, 멍석은 기혼 남자가, 토끼와 말은 어린 소녀가, 처녀의 아름다움은 미혼 여자가, 침묵은 기혼 여자가 맡는 것이 상례였다.
모두가 모이자 아롈은 일어나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수도 없이 걸고 나온 화려한 장신구들은 다름 아닌 이 식순을 위한 것이었다. 목걸이들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철렁철렁 몸에 부딪혔다. 금은 무거운 금속이었다. 다음날 온 몸이 다 쑤시리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아롈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결혼식의 하객들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금비를 내려달라고 외쳤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없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롈은 넘어지지 않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신부는 이윽고 토끼 요정의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베일을 한 겹 한 겹 벗었다. 어찌나 칭칭 감았는지 스스로 풀어내기도 힘들었다. 가장자리에 금실로 사악한 것을 막는 주문을 수놓은 천은 손이 희게 비쳐 보일 정도로 얇았다.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뒤를 이었다.
아롈은 베일을 밟고 걸었다. 공부터 차례차례 목걸이를 벗어 걸어주고, 팔찌를 벗어주고, 반지를 빼주었다. 토끼에게는 키예프 공국의 독수리가 새겨진 로켓과 사파이어 반지를 주었다. '처녀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배신감이 치밀어 차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지만 애써 반지를 주었다. 처녀의 아름다움은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푹 꺼진 볼에 보조개를 그리며 웃었다. 당나귀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침묵이었다. 침묵에게는 처녀의 흠을 눈감아달라는 뜻으로 가장 비싼 것을 쥐어주는 것이 상례였다.
아롈은 침묵의 손에 큼지막한 다이아몬드와 금팔찌를 쥐어주었다. 그녀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떠서 웃고는 뒤로 물러났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아롈의 몸에 남은 장신구는 훈장의 별 뿐이었다.
금을 기원하는 환호성은 갈수록 커져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이제 절차는 하나만 남았다. 아롈은 중앙에 있는 토끼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음의 각오를 한 다음, 아이를 높이 안아 올렸다.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창 검을 배울 때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그만둔 지 너무 오래되었다.
토끼는 앳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디 금비를 내려주세요!"
아롈은 보란 듯이 육촌 동생의 솜털도 안 가신 뺨에 키스를 하고는 잠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감각이 거의 없는 한쪽 팔을 들어 흔들었다.
"금비를 내려라!"
모두가 합창하듯 외쳤다.
"금비를 내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