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7)
소녀는 처음으로 밤에 계곡으로 향했다.
파프너가 보고 싶었다. 정신없이 훌쩍이면서 걷다가 하마터면 성벽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성벽은 위험한 짐승들을 막기 위해 대단히 높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미 피를 줄줄 흘리는 머리통이 한 번 더 깨지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아롈은 눈밭에 사뿐히 엉덩이부터 내려앉았다.
아무도 잡아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 일어나야 했다. 간신히 성벽을 붙잡고 홀로 일어났다. 하얗게 쌓인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냥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싶었다. 너무, 너무 아팠다.
소녀는 희미하게 목소리를 흘렸다.
"파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질색하는 애칭이어서 그럴까? 소녀는 글썽글썽 울면서 다시 조그마하게 불렀다.
"파프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프너는 그 계곡에서 떠날 수 없는 몸이라고 했다. 소녀가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소녀는 다시 절뚝절뚝거리며 걸었다. 바람이 너무 찼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다. 눈보라를 보고 비키라고 빌면 되는데 머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그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온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정신없이 기침을 하며 걸었다.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소녀가 본능적으로 빈 기원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소박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책상 위에 있던 양초가 붕 뜨더니 소녀의 목을 조르는 유모의 등에 기름을 쏟아 붓고 불을 붙였다. 유모는 불에 타는 옷에 당황해서 등을 바닥에 굴렸고 소녀는 그 틈을 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원망에 잠겼다.
유모, 왜 그랬어? 유모가 날 키웠잖아!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 심지어 파피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 날 죽이려고 했어? 전하라는 거 중요한 거였어?
핏자국이 한 방울, 두 방울 소녀가 가는 길을 표시해주었다. 소녀는 겨우 파프너가 사는 계곡에 도착했다. 신발을 신은 발가락은 그나마 상태가 나았지만 손가락은 파랗게 얼어 떨어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괜찮아. 파피가 다 치료해 줄 거야. 이렇게 후, 하고 불면 하나도 안 아픈 걸.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적우적 개들이 삶은 닭을 통째로 씹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대단히 선명하고 귀에 박히는 소리라서 의아했다.
"파프너?"
짐승 특유의 안광이 두 개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눈은 상당히 환했다.
소녀는 흐릿하게 시야를 가리는 눈을 비볐다. 붉은 피를 훔쳐내자 조금 앞이 잘 보였다.
아주 커다란 용이었다. 지금껏 소녀는 파프너가 자기는 용이라고 계속 말해도 실감한 적이 없었다. 소녀의 파피는 아주 작고 귀엽고 예뻤으니까.
자잘하던 비늘은 한 개 한 개가 성에 걸려있는 방패만큼이나 커졌고, 소녀의 이불이 될 만큼 아담했던 날개는 산이라도 들고 날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눈. 저 유령의 불꽃처럼 차가운 파란 눈.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파피……."
흰 용이 입을 벌리자 뭔가 둔탁한 것이 뚝 떨어졌다. 주둥이에서, 그 사이로 보이는 허연 이빨에서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액체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면 배와 목에도 가득 붉은 것이 튀어있었다. 소녀의 몸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액체였다.
소녀의 눈이 가만히 아래를 향했다. 갈색 머리카락, 뚱뚱한 몸, 이미 하나 없어진 팔, 너덜거리는 머리,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선명한 피. 소녀의 손이 저절로 코를 감싸 쥐었다.
아까까지 몰랐던 피비린내가 어질어질하게 풍겨왔다. 사람, 사람이었다. 어딜 봐도 사람이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친구를 찾았다.
"파피."
그 아름다웠던 용은 소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가에까지 튀어있는 피얼룩이 꼭 엉망진창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거대한 주둥이에 뾰족뾰족한 이빨이 하나하나 다 보였다. 그걸로 내 머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을 거야?
"파피……."
파프너가 후, 입김을 불었다. 유모에게 맞은 날 소녀를 치료해줬던 반짝이는 가루였다. 거짓말처럼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아팠다. 가슴을 도려낼 것처럼 아팠다.
"파피."
얼굴에 조금 묻은 핏방울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파피는……, 사람을 먹어?"
[내가 말했지 않느냐.]
달빛이 너무 밝고, 계곡은 너무 조용했다. 봐서는 안 될 것들이 모두 보이고 들어서는 안 될 것들이 모두 들릴 정도로.
[내 사생활은 어린 아이의 정서 교육에 안 좋다고.]
전설 속의 용들 중 착한 용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사람을 잡아먹거나, 마을을 불태우거나 금은보화를 훔쳐서 가득 쌓아놓거나 하는 해악을 떨쳤다.
파프너는 그 중에서도 특히 악명을 떨쳤던 자로, 용사 지크프리트에게 상처입고 눈 속에 묻혀 잠들어 있던 용이었다. 그런 용을 그 주변에 있는 유일한 마법사였던 아롈이 깨웠고, 깨어난 용은 아롈을 불렀다. 낮에는 아롈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법을 받아먹었고 밤에는 받은 마법을 이용해 인간들을 꼬셔내어 잡아먹었다. 파프너는 당시 용의 현혹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법사인 아롈에게 의지했다.
낮에 그렇게 작은 모습을 유지했던 까닭은 아롈의 동정을 사기위한 것도 있겠지만 힘이 모자란 탓이 가장 컸을 것이다. 파프너는 음기를 먹고 사는 냉기의 용이었으니까.
다 크고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되는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인간을 먹지는 않았으리라. 공국에선 사람이 실종되는 일이 그렇게 잦지 않았다. 아주 가끔 잡아먹었겠지. 하필 그 밤에 파프너를 찾아간 것은 불운이었을까? 그 때 파프너가 '사생활'을 즐기지 않았더라면 아롈은 쓸데없는 맹세를 하는 대신 이 용을 날려버릴 수 있었을까? 아니, 맹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롈은 옥좌에 앉아 있으리라.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돌덩이라도 하나 올려놓은 것 같다. 아롈은 용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가 뭘 어쩌겠어. 죽이기밖에 더 하겠나? 죽여도 어떻게 죽이겠어. 으적으적 씹어죽였다간 피가 몸으로 들어갈 텐데 고작해야 물에 빠뜨려 죽이겠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으면 용에게 물려죽기 전에 먼저 울화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머리가 뜨거웠다. 어린 치기는 사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아롈은 이제 열여섯이었다.
"알비다가 해적질을 한 게 아니라 네가 그녀를 구하려고 달려드는 배의 사람들을 먹어치운 거겠지."
그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심장이 그 곳으로 가라고 노래하는 감촉.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짜릿한 쾌감. 저 끝으로 가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두근거림.
그걸 네가 뭐라고 이용하나. 그러니까 너희들이 진 것이다. 지금 세상에 활개 치는 용이 얼마나 남아있어? 마법사는 얼마나 남아있지? 마법사를 인정하는 정교회 신자들조차 외지인의 영향을 받아 마법사를 비난하는데!
용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약간의 거리가 생기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너는 건방지다.]
"그래서?"
[네 몸에서 다른 용의 냄새가 난다. 왜 그 용을 부르지 않지?]
"내가 그걸 왜 네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지?"
[인간이라는 건 살려는 집착이 굉장히 강하지 않나? 그냥 그 용을 부르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안 부르지?]
"용이라는 건 탐욕으로 줄줄 흘러넘치지 않나? 그냥 다짜고짜 배를 덮쳐서 선원들을 건져먹으면 될 텐데 왜 시간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 하는 양 장난질을 쳤지?"
코에서 물이 주룩 흘렀다. 손가락으로 훔쳐보니 물이 아니라 피였다.
[흰 계집. 너는 네가 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지.]
아롈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은 뭐가 그리 좋은지 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정하지. 너희를 잡아먹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맞다.]
인정해봐야 뭐가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나.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인간이 만들어둔 예의와 상식과 양심을 강요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아, 피가 짜증난다. 아롈은 아예 손등으로 피를 훔쳤다. 고운 결 사이에 피가 스며들어 잎맥 같은 무늬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곁에 시중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이런 게 불편하다. 손수건을 건네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그래서?"
[사실 사람만큼 맛없는 동물도 별로 없단 말이야. 뭘 그렇게 껴입고 다니는지 통째로 씹으면 이에서 낀단 말이다. 벗겨먹긴 또 귀찮고. 게다가 살은 어찌나 뒤룩뒤룩 쪘는지 쫀득쫀득한 씹는 맛 대신 기름기만 가득 하고.]
그럼 먹질 마시든가.
[하지만 이 몸을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는데 그걸 위해선 또 인간만한 별식이 없지.]
원래 용이라는 생명체가 다들 이렇게 수다스러운 건가. 만나본 용이 단 둘 뿐이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째서 이럴까. 아롈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재촉했다.
"그래서."
[원래는 이백 명쯤 되는 너희들을 죄다 잡아서 훈제해 먹을 생각이었지만, 멀쩡하게 각성을 마치고 자각까지 한 마법사를 수백 년 만에 본 기념으로 특별히 봐주겠다.]
무슨 서론이 이렇게 길어. 제가 무슨 용들의 황제라도 되나.
[딱 열 명만 내놔라. 그럼 나머지는 그냥 보내주지.]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나.
[의논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오늘 자정까지 기다리겠다. 아.]
용은 머리를 물속까지 담갔다가 꺼냈다.
[시체는 안 된다. 살아있는 놈으로 데려와라. 자원하는 놈이 없으면 함대를 통째로 삼키겠다.]
사람을 잡아먹는 푸른 용은 흰 포말만 남기고 물결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