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8)
넋이 나가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배의 영주라고도 할 수도 있는 선장이었다. 그는 코시카의 백작 작위까지 받은 귀족으로 이 결혼행렬을 작센까지 무사히 인수인계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놈들! 일어서라! 네놈들이 그러고도 뱃놈들이냐!"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선원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성인을 보듯 그들의 선장을 우러러 보았다.
"일어나! 배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해야지! 일항사! 일항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있는 그는 '장검'이라는 선명에 꼭 어울리는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동조연쇄 작용이 일어났다. 선장은 지팡이로 일항사의 머리를 두들겼고 일항사는 이항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항사는 삼항사를, 삼항사는 갑판장을 구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온화한 표현이지만-하고 나자 갑판장은 모든 선원들을 시체에서 사람으로 부활시켰다. 즉,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깃발 신호를 이용하여 다른 배 세 척을 세우고 널빤지를 댔다. 배의 장교들이 차례로 장검 호에 넘어왔다.
미셸은 그 모든 광경을 혼 없이 보다가 선장이 눈 앞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화들짝 정신을 챙겼다.
"괜찮으시오?"
코시카의 북쪽 우월주의 사상에 찌들어있는 선장은 비교적 가무잡잡한 피부와 녹색 눈을 가진 '남쪽 놈'을 우습게 알았다. 미셸은 힘없이 웃었다.
"괜찮소. 여대공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저기 계시오. 일단 안으로 모실까 여쭈었더니 생각할 것이 있다며 홀로 있고 싶다 하셔서. 그보다 샤를루아 공작이 큰일이신데."
"무슨 일 있소?"
"기절하셨소이다. 선원들을 시켜 방으로 옮겨드리라 했소."
"연세가 있으신 분이니. 고맙소.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선장은 보기와는 달리 힘이 굉장히 강했다. 한 번에 쑥 올라왔다. 오히려 잡은 손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미셸이 제자리에 선 것을 확인한 선장은 고개만 까닥하고는 금세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미셸은 고개를 잠깐 돌리자 금세 앙투안과 아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아롈은 바다를, 앙투안은 아롈을 보고 서 있었다.
"앙투안."
"형."
"다친 곳은?"
"내가 다칠 일이 뭐 있었겠어."
아직도 머리 한 곳을 두드려 맞은 듯 얼떨떨했다. 용이라니? 대마법사조차 난 적이 없는 곳이 남쪽이었다. 동쪽, 서쪽, 바다, 북쪽의 마법사들이 세계를 휩쓸 때 로렌은 오직 인간의 힘으로, 기사의 힘으로 용을 해치우고 세운 나라였다.
북쪽에는 아직도 용이 잠들어 있다고들 하지. 그 전설이 진짜였단 말인가?
미셸은 얼떨떨한 기분을 떨치려 아롈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표정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한눈에 봐도 화가 나 있었다.
아까 코피를 흘렸던 것 같은데. 자국 여대공에게는 극진한 선장이 그새 손수건과 물을 갖다 바쳤는지 흰 얼굴은 핏자국 없이 깨끗했고, 바닥에는 붉게 물든 손수건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롈?"
"혼자 있고 싶습니다."
"논의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부디 잠시만."
"제물의 문제라면 알아서 하시지요. 겨우 열 명이잖습니까."
"아까도 용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약속을 어길 지 누가 알겠습니까? 저희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앙투안이 끼어들자 아롈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비록 남쪽의 예에는 능하지 못하지만 신분 낮은 이가 먼저 말을 걸 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아롈."
"경이 황자라도 되는가? 그럼 내가 사과하지."
망했다. 앙투안은 정말 대단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같이 여행하며 관찰한 바로는 아롈의 성격도 만만찮았다. 그리고 앙투안은 역시나 져주지 않고 당당히 대들었다.
"맞습니다."
아롈은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미셸을 쳐다보았다. 미셸은 고개를 숙였다.
"그간 정식으로 인사드리게 하지 못 한 점 송구스럽습니다. 이 자는 멘 공작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로, 폐하와 클라리 후작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갸름한 얼굴에 진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사생아?"
"적자입니다!"
"예, 폐하께서 성총을 베푸시어 적자로 인지(認知)하셨습니다."
"과연. 알 만 하군요. 혼외정사로 태어난 사생아가 알량한 공작 지위 하나 쥐고 황자랍시고 뽐내다니."
'따위'라는 단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셸은 뒷목이 다 아파왔다. 로렌에는 귀천상혼의 개념이 그리 잘 잡혀있지 않았다. 황제가 공식 정부를 두는 것은 꽤 오래 내려온 일이었고, 정부의 자식을 적자로 인정하고 황가의 성을 주는 일도 왕왕 있었다. 질투 많은 이모는 그걸 못 견뎌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전하 칭호는?"
"His Serene Highness입니다."
"Imperial은 아니로군요."
'전하'라고는 해도 다 같은 전하가 아니었다. 아롈은 제국의 여대공으로서 Her Imperial Highness로 불릴 자격이 있었고, 미셸의 His Grand Ducal Highness보다 두 단계 위, 앙투안의 His Serene Highness보다 네 단계나 위였다.
사실 아롈이 지적한 것이 예에 맞았다. 로렌의 방식으로 엄격하게 따지자면 대공가의 후계자인 미셸조차 아롈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세시안과 결혼한 아롈의 지위는 여성으로서는 황후 바로 다음, 남녀 통틀어서는 황태자와 동급이었으므로. 애칭을 허락한 그녀의 호의가 미셸의 '무례'를 관대하게 넘긴 것이고 앙투안에게는 그를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극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아롈은 앙투안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게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대단히 급했다.
"아롈.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저희가 나누어야 할 말이 많습니다. 제발, 앙투안의 무례를 헐후히 넘겨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바득바득 날을 세우고 있던 것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미셸은 사정하듯 자신을 낮췄다. 아롈은 미셸의 호의를 얻고 싶어 했고, 그만큼 그에게는 약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롈은 찌푸린 미간을 펴고 그 사이를 슬슬 문질렀다.
"나중에 이야기 하되 그냥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나중에 이야기 할 수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미셸은 평생 자기가 용을 만날 거라는 허황된 상상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이 살았다. 용의 뱃속에서 마감하는 인생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사촌은?"
"샤를루아 공작은 혼절했습니다."
"그럼 선장과 미시에시 경을 불러오세요. 멘 공작. 그대가 가시오."
'가라', 혹은 '가게'보다 격상된 어조였다. 소녀는 무뚝뚝한 어조로 덧붙였다.
"물론 신분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대에게 하대한 것은 분명 본인의 실책이오. 부디 빠르게 움직여주길 바라오."
앙투안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달려갔다. 그 뒷모습에 잠깐 시선을 주던 아롈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생아임은 짐작했습니다만, 황제 폐하의 소생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찌 짐작하셨습니까?"
"적자였다면 미셸이 내게 소개하지 않았을 리 없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은 나중에 묻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멘 공작이 말한 대로 그 노망난 용을 어떻게든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노망난 용이라. 이 소녀는 평생 험한 것이라곤 본 적도 없어 보이는 가녀린 외모와는 다르게 은근히 말에 성깔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면 아까 용을 상대로 반말을 써대지 않았던가.
"아롈. 용이 약속을 지킬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요. 자기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꼬라지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까 용이……."
아롈은 빈정대듯 말했다.
"인간을 열 명 내놓으라고 했지요. 그거야 노잡이 노예를 던져주면 끝날 일 아닙니까. 문제는 그 다음에 얼굴을 바꾸고 달려들 때의 이야기지요. 왔군."
앙투안이 장검 호의 선장과, 다른 배의 선장들, 미시에시 경, 그리고 필리프와 같이 나타났다. 선장이 아롈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춰 예를 표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촌은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미셸이 보기에는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필리프는 항해 내내 멀미로 누워있었던 데다 충격까지 겹쳐 얼굴이 황달이라도 온 듯 샛노랬다. 아롈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것이 낫겠지요."
"여대공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갑판에서 이런 중대사를 의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 하다 사료되옵니다. 선장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랬다가 갑자기 그 용이 불쑥 튀어나오면 다시 언제 달려 나오겠소? 이편이 낫소."
"아롈.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선원들이 들으면 불안해 할 겁니다. 지금 난리도 아니잖습니까."
실제로 선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아롈을 흘끔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바다에 내던지고 싶다는 눈치였다. 배에 여자가 타면 침몰한다는 속설과 어마어마한 신분이 합쳐져 안 그래도 선원들은 아롈을 꺼렸는데-선장이 입에 거품을 물어 대놓고 터부시하는 것은 없어졌다- 용이 마법사라고 명토를 박아주자 바다에 던지면 다행이고 산 채로 불태울 것 같았다.
귀하게 자라 아랫사람들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는 미셸이 눈치를 챌 정도였으니 말을 다 했다. 앙투안이 끼어들었다.
"게다가 용이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이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보이는 소녀는 잠시 앙투안을 노려보았지만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은 아롈을 앞질러 선장실의 문을 열고 가장 좋은 자리를 빼주는 등 자국 황족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얼마나 예우를 아끼지 않았는지 전하 칭호가 없는 불쌍한 미시에시 경은 자리에 앉지도 못 하고 서있는 신세가 되었다.
다들 한 자리씩 잡자 아롈이 툭 내뱉었다.
"일단은 예를 생각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세요."
일단이라니. 다분히 앙투안을 겨냥한 말이었다. 선장은 황송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을 기세로 사양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그러나 테이블에 흐른 것은 활발한 대화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신중하게 고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다들 묻고 싶은 말의 주제는 똑같으리라. 마법사. 필리프와 앙투안이 마법사라니. 샤를루아 공작과는 나이차도 있고 해서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앙투안과는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가장 절친한 친구인 세시안의 이복동생이었으므로.
청소년 특유의 건방짐이 가시지 않은 사나운 사내아이 정도가 미셸이 가지고 있는 앙투안에 대한 인상이었다. 검에는 조금 특출하지만 책 읽는 걸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귀족. 그가 마법사라니.
무엇보다 아까 용은 아롈에게 마법사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롈은 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면 천치이리라.
미셸은 잠시 좋아하던 전설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법사라고 하면 보통 수염을 배꼽에 닿도록 기른 노인이나 대단히 요염하고 신비로운 여인을 떠올리지 않던가? 아롈은 예쁘긴 해도 어디까지나 귀하게 자란 소녀티가 났다. 흔히 말하는 마법사의 풍모는 갖추지 못 했다.
게다가 자신에게도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고 했다. 아직도 얼떨떨하던 머리 한 쪽이 갑자기 깨어나면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흉포한 생명체는 미셸에게 거대한 이를 드러내며 윽박질렀다.
용의 말을 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롈도 그를 눈치 챈 기색이었지만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백작. 제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노잡이 노예를 바칠 생각입니다만.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내 생각도 그렇소. 기사를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안 그런가, 미시에시 경?"
"예? 예? 예."
미셸은 저런 자를 호위대장으로 데리고 온 자신의 안목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노예의 선발에는 내가 따로 관여하지 않아도 되겠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묻고픈 것이 있는데, 함대 네 척이 한꺼번에 대포를 쏘면, 얼마만큼의 화력이 나오오?"
선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가장 귀족 작위가 높은 동시에 기함의 선장인 장검 호 선장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여대공 전하. 지금 승선해 계시는 장검 호는 28문이고, 다른 호위함 세 척은 모두 36문이옵니다. 하오나, 아까의 그 용과 싸우실 생각이시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유는?"
다른 호위함의 선장이 나섰다.
"전하. 이 함대는 해전을 생각하고 짜여진 함대이옵니다. 해전은 백병전이 승부를 좌우합니다. 즉, 대포보다는 해병에 치중하여 함대를 구성하였사온데, 용을 상대로는 해병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단일 개체를 상대로는 한 쪽의 대포밖에 사용하지 못 합니다. 총 68문의 대포로는 전열함 한 대조차 상대하기 버겁습니다."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정리된 보고는 아니었지만 미셸은 결국 '싸우는 건 절대 무리'라는 사실을 납득했다. 아롈은 손을 내저어 말을 끊고는 물었다.
"병력 충원은 불가하오?"
"예. 연락 방법이 없습니다, 전하."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항구에 들어가 보호를 요청하는 건?"
"전하.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인 함부르크까지는 일주일이 걸리옵고, 가장 가까운 항구로 기항한다 해도 사흘은 전속력으로 내달려야 합니다."
"짐을 모두 버린다면?"
"그렇다 해도 이틀 이상 걸릴 터입니다."
절망적이라는 말이었다. 아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대는 나가 노예를 선발하여 보고하시오. 다른 선장들 또한, 또 용이 다시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선원을 무장시키고 대포에 장전을 하시오. 만일의 경우 저항도 못 해보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미시에시 경. 가서 선장을 돕고 기사들을 단속하라."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선장들은 순순히 따랐고,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기사대장은 미셸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끌려갔다. 아롈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앙투안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내가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그녀는 손을 겹쳐 무릎 위에 얹었다.
"사실 침묵의 맹세를 받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 맹세를 지키기 지난할 것 같군요. 특히 내 어머니의 수족 같은 사촌은."
아,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가. 필리프는 오래된 정치꾼답게 아픈 곳을 찔렸는데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대들이 모시는 군주에게 보고할 의무를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명예를 아는 이들이니만큼 시정잡배처럼 이리저리 소문을 퍼트리지는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그들은 차례로 긍정을 표했고, 소녀는 가만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낀 반지가 머리칼을 들락거리며 다채로운 빛을 발하길 수차례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나는 마법사입니다."
용이 다 알려주었으니 그러려니 할 줄 알았고, 예상대로의 말이 나왔는데도 그 충격은 컸다. 망치로 내려친 모루 같은 분위기에 아롈은 다시 한 번 정을 때렸다.
"하지만 지금 이 사태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마법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저 용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오, 멘 공작."
동화속의 대마법사처럼 폭풍이라도 불러서 쓸어버릴 줄 알았냐며,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진즉에 힘을 발휘해서 용을 갈가리 찢어다 오늘 저녁 식사로 먹었을 거라고 아롈이 이죽거렸다.
"아롈. 저희는 마법사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릅니다. 부디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맑은 눈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로렌에도 기록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성교회는 마법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롈은 대단히 난감한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설명이 조금 난잡할지도 모르겠군요.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이런 걸 설명해 본 적이 없어서. 간단하게 말하면 마법사란 자신의 기원을 현실로 바꾸는 힘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난잡하다는 말은 겸양이었는지 아롈은 차근차근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말에는 아롈의 개인적인 추측이 대단히 많이 섞여있었지만 그녀가 관찰한 표본이 자기 혼자뿐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사는 그 자질에 따라 기원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 마법사의 자질이 뛰어나면 더 말도 안 되는 기원이 현실이 된다. 다만 그 기원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사용자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물을 만들고 싶다'라고 기원하면 한 컵의 물이 필요한 사용자에게 엄청나게 거대한 폭풍우가 쏟아지는 식이다. 따라서 마법사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소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 듣던 앙투안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럼 용을 없애달라고 기원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질이 충분하다면 용은 없어집니다. 다만 잘못 빌었다간 '장검' 호가 침몰하거나, 내가 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거나,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요."
미셸은 놀랐다.
"그 정도입니까?"
아롈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실제로 성 하나가 통째로 불 탄 적이 있으니까요."
아롈은 앙투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아까 그대가 공주의 이름을 맞춘 것도 간절한 기원이 불러낸 조화일 테지. 다만 조심하시오. 그 인과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소."
인간이 계획하고 신이 바꾼다고 했던가. 왜 세상에 마법사가 없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미셸은 로켓을 꼭 쥐었다. 눈물 나게 리젤로트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