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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12)


 검은 머리의 공주가 이를 악물고 짐을 싸고 있었다. 꼭 필요한 패물만을 챙기는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있었다. 공주는 기다랗게 땋아 내린 머리칼을 단도로 싹둑 잘랐다. 그리고 머리채를 이별을 고하는 편지 옆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안녕히.

공주는 왼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단발로 변한 여인은 남복을 하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몇날 며칠을 걸어 해안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진 패물을 털어 아주 작은 보트를 샀다. 보트를 탄 그녀는 자신의 마법으로 물결을 움직여 바다 한가운데로 떠났다. 목이 마르면 비를 내리고 배가 고프면 해안가 마을에서 산 딱딱하고 큰 빵을 먹었다.

그녀는 해적선을 만났고 침을 흘리며 덤벼드는 해적들을 물리친 다음 배를 접수했다. 평화로운 항해가 이어졌다. 해골의 깃발을 내리고 상선인양 위장하여 웨데나의 깃발을 올렸다. 해적들은 다른 해적들을 때려잡는 자신들에게 당황했지만 이내 적응했다.

해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반짝이는 별과 짠 바다 냄새만이 고요를 수놓던 어느 날, 불쑥 용이 나타났다.

용이 발에 채이지는 않아도 그렇게 드물지는 않던 시대였다. 선원들이 식겁하여 부르자 공주는 선장실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용을 바라보았다.

-나를 잡아먹을 건가?

용은 바닷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달처럼 샛노란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럼 왜 왔는데?

-나와 함께 하겠나? 내 이름을 알려줄테니 네 이름을 알려다오.

-왜?

-너는 마법사고 나는 용이니까.

-세상에 마법사는 많아. 그런데 왜 하필 나지?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공주는 여전히 왼눈을 가리고 남복을 한 채 해적선에 서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공주의 곁에 호랑이 같이 노란 눈의 예쁜 여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해적들이 공주를 '선장님'이라고 부르며 경배했지만 사실 그 경외는 '부선장'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하나둘씩 해적선에 여자가 많아졌다. 상선에서 잡아온 여자들이었다. 부선장은 냉혹했다. 남자는 노예로 팔거나 죽여 버리고 고운 여자는 공주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그들은 바다를 떠돌며 상선을 잡았다.

공주는 활기찬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대신 선장실에 갇혀 시들어 갔다. '부선장'은 상선을 쳐부수고 사람을 한두 명 잡아먹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해도 그녀는 듣지 않았다. 하다못해 웨데나의 배는 건드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주의 패물함에 귀한 보석이 쌓여가고 해적들은 점차 부유해졌지만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가득 찼다.

공주의 시중을 드는 여자가 물병을 깼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그녀의 모습을 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선장'이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에서 무슨 수로 자리를 비울 수 있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돼서 웨데나와 피아스트의 국기를 건 군함이 다가왔다.

해적들은 무조건 항복을 외쳤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선장인 공주는 나아가 머릿수건을 풀고 그간 자란 긴 머리를 늘어뜨렸다. 희고 고운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함대를 이끄는 제독은 피아스트의 왕자였다. 그는 아름답지만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공주의 모습에 대단히 놀랐다. 그가 상상했던 알비다 해적단의 여선장은 공주보다 훨씬 강인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왕자여. 나의 몸에 흐르는 피도 그대의 고귀한 피에 못지않게 푸르답니다. 부디 존중해주세요.

-뭐라고?

공주는 안대를 풀었다. 오른눈과 달리 선명하게 푸른빛을 띠는 눈이 드러났다.

-나는 알비다 잉그리드 바사, 웨데나의 왕녀입니다.

[그만.]

아롈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건 꿈이야'라고 누군가 분명하게 알려준 것 같은 자각몽이었다. 아롈은 물속에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받쳐주는 것이 없는데 몸이 둥둥 떠 있었다. 저 위로 천 갈래 만 갈래로 부서져 그물 모양으로 일렁이는 수면이 보였다.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숨을 쉬고 있나. 사람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데. 인어도 아니고. 키예프에는 바다가 없으니 키예나에 인어의 피는 섞여있지 않을 텐데.

몸에 힘을 빼고 둥둥 물살에 흔들리고 있자니 신기하게 생긴 생명체가 다가왔다. 작은 크기, 자못 귀여워 보이는 얼굴, 파란 몸체와 노란 눈. 아롈의 가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빙글 돌았다.

[왔군.]

"무슨 장난이지?"

물속에서 말하는데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이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다만 평원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소리가 흩어져버렸다. 용은 넓적한 노처럼 생긴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웃었다.

[직감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더군. 빨리 도망가야 했어. 그 자가 내 이름까지 때려 맞춰 버렸다간 아무것도 안 되니까.]

"뭐가?"

[거래가 안 되잖니?]

무슨 거래를 말하는 건가. 아롈은 용의 움직임을 따라 흘끗 아래를 내려 보았다가 혀를 깨물고 시선을 돌렸다. 끝도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것은 질색이었다.

용은 몸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내 이름을 알려줄 테니 네 이름을 알려다오.]

"싫다면?"

[죽는 거지.]

"내가 덜 떨어진 용 한 마리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나?"

용은 키득거렸다.

[네 자질이 요즘치고 제법 괜찮은 건 사실이지만 마법을 쓰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지 않지 않았니? 네 몸에서 마법의 잔재가 느껴지질 않는데.]

"내게는 이미 계약한 용이 있어."

[상관없어. 일 대 일 계약만 된다고 명시된 게 아니니까.]

용은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그러니 내게 마법을 제공해다오.]

"왜 하필 나지?"

[좀 거무튀튀한 노란 놈은 자질은 쓸 만하지만 나이를 보니 각성 시기를 놓쳤고, 늙은 놈은 자질이 별로고, 빨간 놈은 직감밖에 모르는 것 같은데 그건 자기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거든. 네가 제일 나아.]

아롈은 꿈속에서도 쓰고 있는 베일을 무심코 추슬렀다.

"사람을 잡아먹는 데에 힘을 보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네가 죽는다고 해도?]

"내가, 죽는다고 해도."

가슴에 멍울이 느껴졌지만 그런대로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롈은 턱을 당기고 용을 노려보았다.

아롈은 자신을 설득하듯 말했다.

"나는 다시는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생명의 위협이 있다 해도 맹세를 지키는 것이 명예이고 긍지다."

[인간이란 건 참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건단 말이야. 명예나 긍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하찮은 축생 따위가 뭘 안다고.

용은 긴 꼬리를 휘휘 저었다. 용의 꼬리는 파프너의 꼬리와는 좀 다른 맛이 있었다. 몸길이의 두 배 정도 길고 또 늘씬하게 가늘었다.

[어쨌거나 나는 마법이 필요해. 이 공간에 너를 부른 걸로 아디브가 내게 남긴 마법을 전부 써버렸거든. 직접 몸으로 뛰어서 사람을 먹는 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이지만 그게 사실 참 귀찮아서.]

외모 하나 바뀌었다고 그 시건방진 말투가 순화되어 들린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용은 실제로 말투를 조금 바꿔서 격 없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봐야 맹세. 깨봐야 뭐 잘못 되는 것도 없지 않니. 네가 맹세를 깨면 잘못 하면 동귀어진, 못 하면 내가 죽고, 아주 잘 해서 내가 이겨봐야 나는 마법사를 잃어서 손해 아닌가? 아무튼 요즘은 마법사를 구하기 힘든 세상이라서. 어차피 네가 잘 되는 건데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어.]

정치는 못 할 놈이었다. 저렇게 자기 손익 계산을 솔직하게 줄줄 늘어놓다니.

용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좋아. 이렇게 하지. 내가 많이 손해 보는 거지만.]

아롈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약만 해다오. 네가 마법을 쓰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너를 따라다니며 새로운 마법사를 찾겠다. 어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도 안 되지?]

"넌 사람을 먹잖아!"

자제력을 잃고 빽 내지른 소리는 아무 방해도 없이 산산이 흩어졌다. 아롈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난 사람을 먹지. 용이니까. 그러는 너희는 사람을 부리잖아?]

"먹진 않아!"

[네가 제일 높은 사람 같던데. 아까 제물들을 결정한 건 네가 아니라 누구지? 내게 먹힐 걸 알면서도 준 것 아닌가? 그럼 네가 죽인 거 아닌가?]

아롈은 부들부들 떨었다. 용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자동적으로 변명이자 자기합리화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코시카의 신민도, 로렌의 신민도 아니다. 내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없는 자들이다."

[좋아. 그럼 네가 먹지 말라는 사람은 먹지 않겠다. 단 새로운 마법사를 찾을 때까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용의 제안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을 잡아먹는 것. 군주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류 한 장에 서명하고 명령 한 줄을 내림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피아스트에서 일어나는 전쟁,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사형집행자가 죽인 걸까, 국왕이 죽인 걸까. 국왕이 죽인 것이다. 가장 효율적으로 신민을 다스리며 가장 효율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배웠다.

사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키예프 공국민들과 유모를 죽인 것은 아롈의 마법이었으니. 살인자 주제에 손에 더 피를 묻히기를 주저하는 건가? 이미 유모와 얼굴도 모르는 공국민 몇 명과 노예 열 명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위선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용이 사람을 먹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느껴졌다. 냉정하지 못한 생각일까.

[아디브도 그랬지. 처음에는 쫄랑쫄랑 좋다고 따라와 놓고선 고작 사람 몇 명 집어먹었다고 토라져서는. 회의가 끝나고 발푸르기스의 밤을 구경갔다온 사이에 왕자인지 뭔지에게 가버렸어. 그러고는 죽는 한이 있어도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 고작 사람 몇 명 먹었다고 말이야.]

용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대신 광기가 들어찼다. 정말 미친 년. 연극을 보는 듯 소름끼쳤다.

[용이라는 건 사람을 먹어야 한단 말이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그건데 좀 먹었다고 치사하게 굴기는.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목소리가 지나치게 고와서 슬펐다. 해룡은 절절하게 공주에 대한 미움을 이야기했다.

[자, 네게는 선택지가 있다. 나와의 계약을 거부하고 얌전히 죽는 것, 나와의 계약을 거부하고 맹세인지 뭔지를 깨고 나와 싸우는 것, 그리고 내게 네 이름을 알려준 다음 내 이름을 듣고 쌍방이 행복해지는 것. 어느 것을 선택할 테냐?]

아롈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용은 입을 벌렸다. 귀여워 보이는 얼굴이 벌어지자 비죽비죽한 이빨이 드러났다.

[나가서 아무 인간이나 잡아놓고 한 명씩 죽이면 얘기가 빨라질까?]

말도 안 되게 흉포한 짐승 같으니라고.

"나는."

 

아롈은 눈을 떴다. 밥값을 못 하는 시녀가 아침을 가져왔답시고 식기를 달그락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예법도 모르고 무슨 시중을 들겠다고.

이마를 찌푸리고 시녀를 노려보자 무슨 백작의 딸이라는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죄송하다 고개를 조아렸다. 외국으로 시집갈 때의 관례로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시녀가 아무리 일을 못하면 얼마나 못 하겠나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아롈은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새로 했다. 화장을 한 채로 잠든 탓에 피부가 건조해서 화장수를 듬뿍 발라야 했다. 머리를 빗기던 시녀가 거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이런 목걸이가 원래 있었던가요?"

아롈의 쇄골쯤에서 작은 보석 펜던트가 금줄에 걸려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패물함에 들어있었다. 너는 주인의 취향도 모르고 시중을 드나?"

주인의 빈정거림에 시녀는 어머 뜨거워라 하며 부지런히 빗을 놀렸다. 실제로 그녀는 성실하고 훌륭한 시녀는 아니었으니까. 아롈은 손가락으로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치장을 마치자 대기하던 선장이 곧바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술 냄새가 풀풀 나고 눈 밑이 시커먼 것이 한눈에 봐도 과음한 모양새였다. 아롈은 태연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 묻자 그는 황망한 얼굴로 '육지'가 보이는데 그 육지가 예정대로 달렸을 때 도착하려면 일주일도 넘게 남은 작센의 항구 함부르크인 것 같다고 고했다.

아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용의 호의가 아닐까 추측된다며 호들갑을 떨고 간판으로 뛰쳐나갔다.

바닷바람에 부딪히는 목걸이는 물처럼 파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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