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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3. 금발과 흰 손 (2)


 또 무슨 흉흉한 꿈을 꾸셔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세시안은 정의관에서 나와 여성들이 기거하는 자비관으로 들어섰다.

황후의 침실은 자비관의 중앙에 있었지만 황후는 그 호화스럽지만 사생활이라곤 일절 없는 곳을 질색해 침실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구석진 방을 하나 잡아 주로 거기에서 생활했다.

사실 새신부의 일로 또 무슨 핑계를 찾은 건가 싶어 귀찮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안 갔다간 한 시간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이 한 달 짜리로 커지는 수가 있었다. 황후는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해 얘기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신비한 화법의 소유자였다.

일국의 황후가 기거하기엔 좀 초라하다 싶은 문을 두드리자 세시안이 죽어다 깨어나도 여기서는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이 나왔다.

"오랜만이시군요? 이모님."

그녀는 다름 아닌 전 오를레앙 대공의 차녀이자 현 오를레앙 대공비인 루이즈 안이었다. 오를레앙 대공비는 흠칫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세시안의 양쪽 뺨에 자신의 뺨을 차례로 갖다 대고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 사랑하는 조카. 오랜만이로구나."

"무슨 일로 오셨지요?"

"여동생이 언니를 만나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할까? 누구에게나 혈육의 정이 당기는 때가 있잖니."

다른 사람이라면 믿었을지 몰라도 세시안의 어머니와 이모 사이에 혈육의 정이라니. 한 배에서 난 쌍둥이였지만 그 둘은 리젤로트와 미네트보다도 차이가 심했다. 루이즈 안은 처녀 시절 궁정에서 오를레앙 대공가의 유일한 대공녀인 양 행세했고,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마르그리트 안이 마담 라 세르가 된 다음부터 절치부심 이를 갈았다. 황후는 황후대로 차녀인 루이즈 안에게 오를레앙이 상속되었을 때 뒤집어졌다.

사실 그 둘의 아들딸인 미셸과 리젤로트의 결혼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역혼이 불길하다는 통설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역혼이 황실 역사에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후는 아직 약혼자가 없는 미네트와 재혼하지 못한 세시안을 핑계 삼아 나이 찬 리젤로트의 혼사를 계속 미뤘다. 둘 사이에서 고성이 오간 것이 바로 두 달 전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나이 들어 갑자기 핏줄이 당길 리는 없고. 그는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설마 오를레앙에 무슨 우환이라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다. 언니를 뵈러 온 게 아니니? 들어가렴."

대공비는 세시안이 뭐라고 말을 붙일까 무서운 듯 총총히 복도로 사라져갔다. 저 멀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 두 명이 뒤를 따랐다. 겨우 시녀를 두 명 데려오고 그나마도 엿들을까봐 문 밖에 세우지 않았으면서 정말 아무 일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세시안은 기억의 한 편에 그 모습을 새겨놓고 황후의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기운과 알 수 없는 냄새가 훅 끼쳤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가장 신실하신 폐하(Her Most Christian Majesty)를 뵙습니다."

"왔구나. 내 아들."

살이 뒤룩뒤룩 찐 여인이 세시안을 맞았다.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이 태어나기를 오른발에 발가락이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기는 커녕 산책도 힘들어하는 몸이었다. 그런데 먹는 것은 즐겨서 살이 찔 수 밖에 없었다.

새모이만큼 먹고 승마와 산책을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여인들이 보기에 시골뜨기다운 식탐을 가진 황후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다시 식탐과 히스테리로 풀었고 몸집은 점점 불어났다. 살이 찌면서 발에 가해지는 무게가 점점 늘어나다보니 작았던 발이 푹 퍼져 점점 더 걷기 힘들어졌다. 살이 더 찌는 악순환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장 아끼는 아들이 왔는데도 의자에 앉은 채였다. 세시안은 황후의 두툼한 손등에 입술을 대고 앉았다. 차가 나오지 않았지만 청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없는 것이 고마웠다. 생각만 해도 피가 달아질 것 같았다.

"어마마마.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오, 용이 나타났단다. 내 귀여운 아가야."

스물여덟씩이나 먹었건만 황후는 아직도 세시안을 귀여운 아가라고 불렀다. 세시안은 굳이 딴죽을 걸지 않았다.

"또 꿈을 꾸신 겁니까? 혹여 곤하여 그러시다면."

황후는 손을 크게 내저었다. 하마터면 얼굴을 얻어맞을 뻔했다.

"아니야! 꿈이 아니야. 정말로 나타났단 말이다! 너는 이 어미가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니! 꿈이 아니라 전부 현실이란 말이다!"

모후는 자기가 꿈을 통해 미래와 현재를 본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곤 했다. 그럼 그 꿈으로 카드놀이나 좀 제대로 이겨주셨으면 좋겠는데 모후는 항상 돈을 잃었다. 잔돈푼이었지만 야금야금 모이다보니 최근엔 잃은 액수가 상당했다.

세시안은 변함없이 참을성 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마마마. 용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황도에는 마지막 용의 뼈가 있잖습니까."

갈리아의 초대 왕이자 카페 가문의 조상인 미남왕 앙리는 당시 서른 명의 친우들과 힘을 합쳐 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용이 죽은 자리에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갈리아가 멸망하여 나라가 열두 개로 쪼개지고 그 열두 개가 다섯 개가 된 다음 일곱 개가 되고 마지막에 로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지금까지도 황도에는 앙리가 잡은 용의 뼈를 갈아 만들었다는 검이 있었다. 세시안도 그 검을 본 일이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만 빼면 그저 오래된 검일 뿐이었다. 검신이 희한한 색을 띤다든가 쥐는 순간 목소리가 들린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아니야! 용들은 사라지지 않았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단 말이다!"

황후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세시안은 차마 귀를 막는 무례를 저지를 순 없어 애써 웃었다. 황후는 넓게 펄럭이는 소매를 뒤적여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봉투는 구깃구깃했지만 접합부에 찍힌 밀랍 봉인만은 금 간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을음 섞인 붉은 밀랍은 포도 잎사귀가 감긴 지팡이의 문양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다. 세시안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몇 안 되는 대공가의 일원 전부의 인장을 외우고 있었다.

보르디의 문장과 장자를 나타내는 두 겹의 테두리.

"샤를루아 공작입니까?"

"그래."

"그가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간 것인가요?"

샤를루아 공작, 보르디 대공자 필리프는 세시안의 대리를 자처해 신부를 데리러 북쪽으로 떠났다. 꽃 같은 몸을 모시고 오는 길이라는 걸 감안하면 적어도 두 달은 더 기다려야 이블린으로 돌아올 것이다. 황후는 안 그래도 단춧구멍처럼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뜨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럴 리가. 그건 오늘 온 거란다."

"어마마마. 일정을 생각해보면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대지급으로 보내도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지금 바다에 있을 텐데 공작이 인어를 부려 편지를 전달하는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군말 말고 읽으렴."

세시안이 말을 않고 있자 황후는 긁어내리듯 소리쳤다.

"읽으라니까!"

세시안은 순순히 황후가 건네주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뜯었다. 두 장의 종이를 바스락바스락 펴자 유난히 장식적 곡선이 많은 글자의 향연이 펼쳐졌다. 노쇠한 부친을 대신하여 보르디의 실질적 수장을 맡고 있는 공작은 달필가로도 유명했다. 다만 종이의 질 때문인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서 실금이 간 것이 흠이었다. 세시안은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렸다. 편지는 페란토 어에 능하지 못한 황후를 배려하여 흔히 공문서에 쓰이는 페란토 어가 아닌 갈리아 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소리 내어 읽거라."

황후는 나이가 들면서 원래 있던 근시가 심해져 안경 없이는 앞을 잘 보지 못했다.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앙리에트. 로렌의 황후. 오를레앙 대공녀. 블루아의 아가씨. 자비관의 여주인.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 자비와 사랑과 신의와 성령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급한 일인지라 간결하게 말씀드립니다. 미리 말씀하신대로 항해 중 릴레벨트 해의 해룡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용이 말하길 신과 리무쟁 공작에게 마법사의 소질이 있다고 확언했습니다. 용은 제물로 노예 열 명을 먹은 다음 호의로 일행을 함부르크까지 하룻밤 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 배상."

세시안은 하도 어이가 없어 편지를 촛불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숨겨진 비밀 문자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황후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어때. 이제 이 어미의 말을 믿겠니?"

 

릴레벨트는 턱을 잔 가장자리에 괴었다.

그녀는 바다 생물이었고 자고로 바다 생물은 물의 염분, 물에 녹아 있는 공기와 금속의 비율, 온도 등 모든 것에 민감한 법이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피부가 다 상하리라. 내일은 그냥 바닷물을 떠오라고 할까 싶었다.

그래도 암염 따위가 녹은 물보다는 한결 나은 것이 사실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벌러덩 눕자 물이 흔들거렸다. 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물의 정령이 손을 뻗는 것처럼 슬며시 뺨과 목을 적셨다가 썰물처럼 내려가는 물결이 기분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녀는 앞발로 볼록한 흰 배를 통통 두드렸다.

역시 통째로 삼키면 소화가 더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꼭꼭 씹어 먹는 건데. 릴레벨트 해 깊숙이 가라앉아있는 벨타의 몸은 맹렬하게 열 명의 인간을 소화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념을 이용해 마법을 생산해냈다.

용이 살아가는 데에는 마법이 필요하고,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받지 않는 한 용은 사람을 먹어 소화시켜야만 마법을 만들 수 있었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동물보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았다.

벨타의 머리 한 구석에서는 잡아먹힌 이들의 기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떠다녔다. 모두의 끝은 똑같았다. 날카로운 이빨과 새파란 혓바닥. 그녀는 노래를 멈추고 꼬리로 수면을 탁 쳤다.

침대에서 자고 있던 옐레나가 번쩍 눈을 뜨더니 깜빡깜빡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렴.]

"너……, 아니다."

비리비리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가 아디브를 떠올리게 했다. 벨타는 몸을 바짝 세웠다.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흰 목덜미에 보석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너희는 꿈을 꾸지 않겠지. 부럽구나."

[아니, 용은 항상 꿈을 꾼단다. 머리가 반씩 잠들거든.]

그래서 머리 한 쪽에서는 쉴 새 없이 다른 이의 기억과 후회와 추억이 맴돈다. 용이 쉽게 망각하지 못 하는 것은, 쉽게 미쳐버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기하네."

옐레나는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문득 벨타가 든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너 어젯밤도 꼬박 새지 않았니?]

피곤하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며 책을 뒤적이다가 새벽에나 잠깐 침대에 눕지 않았던가. 원래 사람이라는 건 잠을 못 자면 죽는 것 아닌가?

"이만하면 잘 만큼 잤어."

[낮에 자지 말고 밤에 자는 습관을 들이렴. 피부가 다 뒤집어진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참견하지 마라. 너 따위가 뭔데."

[핏기 없이 허옇게 뜬 꼴이 유령 같아 그런다.]

손가락이 기민하게 움직여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렸다. 머리가 하도 길다보니 단순하게 땋기만 하는 데도 한참이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던 머리칼이 금세 허리께로 껑충 올라왔다. 옐레나는 머리를 끈으로 묶는 대신 그냥 땋인 채로 놔두고 손을 뗐다. 끄트머리가 살짝 풀리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됐나?"

"아니. 머리 푼 유령에서 머리 땋은 유령이 됐는데."

평소에도 흰 얼굴에 피로가 내려앉자 정말로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머리와 눈 색이 옅은데 흰 옷까지 입으니 당장이라도 허공에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옐레나는 유령이라기보다는 악령에 가까운 비웃음을 머금었다.

"유령이라면 차라리 낫겠지. 유령은 꿈을 꾸지 않을 것 아닌가."

[악몽이라도 꾸었나?]

그녀는 가볍게 푸념했다.

"어깨에 얹힌 것이 많으니 어떻게 꿈자리가 편할까."

벨타의 경험상 지금 옐레나는 가만히 있어도 뭔가를 줄줄 내뱉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없이 기다리자 그녀는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쓰디쓴 사랑이여, 가시투성이 열정의

덤불 속 가시관을 갖고 있는 제비꽃, 슬픔의 창, 분노의

화관, 당신은 어떻게 내 영혼을 정복했는가. 어떤 슬픈 길이

당신을 데려왔는지."

기묘한 운의 시였다. 끝자리의 운은 맞는데 오보격의 율격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본디 있던 시를 대충 끊어먹은 것이다. 느릿한 목소리가 시의 중간을 잘라먹고 뒤를 이었다.

"그대의 지독한 사랑이 나를 휘감는 동안

그 가시와 칼로 나를 찌르고

그슬린 길이 내 가슴을 벨 때까지."

아디브는 벨타의 가슴을 불로 베었다. 차갑기만 하던 북해의 가슴이 따스해지나 싶더니 부르르 끓어올라 천 년이 지나도록 식을 줄을 몰랐다. 벨타는 용이었다. 힘을 키우려면 인간을 잡아먹어야 했다. 그리고 인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아디브는 벨타를 떠났다.

처음부터 잘못 태어나 그랬을까. 벨타는 뇌리 한 쪽으로 지나가는 안대를 무시하고 옐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그 새싹 같던 연녹색을 대충 뭉개서 지워버렸다.

[누구에게 바치는 시지?]

옐레나는 킥킥 웃었다.

"내 아버지."

[아버지?]

"그래. 얼굴 빼곤 봐줄 것이 없는 인사였다. 아무 것도 열심히 할 수 없는 작자였지. 그래서 아끼는 정부에게 정을 쏟는 일도, 성실한 남편이 되는 것도 하지 못 했지. 좋은 황제도 못 되었지만 대놓고 폭군이 되는 일도 꺼려서 어영부영 흔들거리다가 목이 떨어진 못난 작자였어.."

[네 아버지라면 공작이나 대공쯤 되나?]

"황제."

눈이 곱게 휘어졌다.

"파블 1세, 코시카의 일곱 번째 황제, 북부를 다스리는 절대자 임페라토르. 이런 대단한 칭호에 비해 변변찮은 사람이었지만. 누구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옐레나는 직접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

"잘못 들었나보군."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잘 자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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