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2)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앙리에트는 미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이름과는 달리 타고나길 주근깨 박힌 뺨. 빛바랜 갈색 머리, 예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 그녀를 키워준 할멈과 할아범은 항상 그녀를 도닥여주었다.
-안 예쁠 리가요. 이렇게 어여쁘신데요.
-정말?
사실은 믿지 않았다. 오른발의 발가락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려지다시피 시골의 성에 처박혔을 때부터 장성한 지금까지 그녀는 정말이지 아름다움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기죽은 적은 없었다. 마르그리트는 자기 자신이 좋았다. 그녀는 특별했으니까.
마르그리트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꿈속에서는 노예가 왕좌에 앉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골뜨기인 자신이라고 해도 꿈속에서는 '마담 마르그리트'가 될 수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꿈을 통해 세상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죄책감 없이 훔쳐보았다.
그녀는 보통 여동생의 꿈을 꾸었다. 루이즈 안 로를레앙은 마르그리트와 같은 태에서 태어난 여동생이었지만 발가락 열 개가 전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오를레앙의 상속녀가 되었다. 루이즈는 뭘 해도 아름다웠다.
피부가 그을린 마르그리트와 달리 뽀얀 피부를 가진 루이즈, 초라한 옷을 입은 마르그리트와 달리 보석과 레이스가 가득 달린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루이즈, 거친 손의 마르그리트와 달리 희고 고운 손을 가진 루이즈.
마르그리트는 그녀를 훔쳐보기 위해 주로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있었다. 루이즈를 따라 춤을 추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어깨 너머로 책을 보기도 하고, 말간 홍차와 화려한 과자의 향연을 넋 놓고 쳐다보기도 했다. 꿈에서 깨고 나서는 눈을 내리깔고 루이즈의 손동작을 어설프게 흉내내보다가 까르르 웃곤 했다.
그렇게 수 년이 지나고 마르그리트와 루이즈는 다 큰 처녀가 되었다. 루이즈는 이미 사촌과 약혼했지만 마르그리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할멈, 할아범과 영원히 같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송세월하던 어느 날, 그 남자를 보았다.
말끔한 외모의 귀공자였다. 마르그리트가 볼 때마다 우습다고 생각했던 목 주위의 레이스 장식이 비할 데 없이 잘 어울렸다.
단지 옆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마르그리트의 머릿속 돛대에 보랏빛 불꽃이 튀었다. 책에서만 읽었던 성 에라스무스의 불꽃. 그건 벼락의 전조라고 하던가. 손끝까지 타오르는 불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마르그리트는 당황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뚱뒤뚱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눈이 허공을 쓸다가 우연히 마르그리트의 눈을 정면으로 훑고 지나갔다.
때마침 내리친 벼락이 가슴을 뚫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요, 오를레앙 대공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지요. 곧 약혼하신다고 들었어요.
-사실이오.
-세상에. 정말로 툴루즈의 아가씨와? 그녀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인데요.
-모후께서 결정하신 일이오. 안 되는 이유라도 있소?
귀공자는 달처럼 차가운 얼굴로 뒤돌아섰다. 마르그리트 안은 한참을 그 곳에 못 박혀 서 있었다. 루이즈 안이 울먹이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쌍둥이 여동생을 질투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녀의 가슴을 태운 것은 이유 모를 가슴의 통증이었다.
그 뒤로 마르그리트는 루이즈가 아니라 남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세르, 즉 황제의 장자임을 알게 되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마르그리트의 눈 앞에서 약혼식을 치렀다.
그의 약혼녀는 순결하다는 표시로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흰 장미 화관을 쓰고 있었다. 일부러 빚어놓은 것처럼 어여뻤다. 남자는 그 소녀의 손등에 정중히 입 맞추었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처럼 아팠다.
마르그리트는 꿈에서 깨자마자 할멈에게 달려가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할멈. 할멈. 상드리용의 이야기를 들려줘.
-어머나.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으셨잖아요?
-상드리용 다음에는 당나귀 껍질이랑, 해와 달과 별의 드레스도 듣고 싶어.
-우리 공주님. 갑자기 왜 이러실까? 홍홍홍.
마음 좋은 할멈은 마르그리트의 등을 쓸어내렸다. 평소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점점 슬퍼졌다.
-할멈. 상드리용은 재투성이였지만 왕자님하고 결혼했지?
-그렇지요?
-하지만 상드리용은 귀족의 딸이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왕자랑 결혼했어?
-홍홍홍. 우리 공주님께서 왜 이러시지? 어디서 잘생긴 청년이라도 보고 오셨나?
응. 봤어. 세르래. 나중에 황제가 될 거래. 나 그 사람이 좋은 것 같아.
그런데 그 사람한테는 임자가 있어. 루이즈도 나보다 훨씬 예쁜데 그 애는 루이즈보다도 훨씬 훨씬 예뻐. 팔도 허리도 낭창낭창 날씬하고 얼굴도 하얘.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초라해졌어.
사랑에 빠진 처녀는 할멈을 꼭 끌어안았다.
그 남자를 가지고 싶어. 뭐든 내주어도 좋으니까. 가지고 싶어.
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여름이 가까워지자 해는 점점 일찍 떴다. 몸을 일으켜보니 창밖으로 안개가 가득했다. 안개를 헤치면 요정이 춤을 추고 있을 것 같았다. 아롈은 잠시 안개를 헤치고 햇볕이 내리쬐는 것을 보다가 다시 베개에 몸을 묻었다.
시녀들이 깨우기 전에 먼저 일어나 있는 것은 오랜 버릇이었다.
황제의 손녀이던 시절부터 극성맞았던 몇몇 시녀들은 아롈이 밤새 서류와 책을 들춰 봤다는 걸 알면 그러다 몸이 다 망가진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하루의 길이는 똑같았다. 잠을 다 자면 절대 해낼 수 없을 만큼의 일이 있었다. 못 하겠다고 했다간 조부가 실망스러운 눈으로 '역시 계집아이는 어쩔 수 없구나'라고 말할 것 같았다.
어차피 잠에 들어봐야 좋은 것도 없었다. 잠깐의 휴식, 망각, 그리고 깨어날 때가 되면 찾아오는 악령들과 흉흉한 노란 눈의 용.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얼굴이 흠뻑 젖어있을 때가 많았다. 잘 때 무슨 헛소리를 했을지 몰라 무서웠다. 그런 추한 모습은 어떤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아무에게도.
그래서 아롈은 치마 속에 서류를 들고 방에 들어가 밤새 서류와 씨름하다가 새벽이 오면 마치 잠들었던 것처럼 누워 있곤 했다. 이젠 체사레브나가 아니고, 아무도 아롈에게 서류를 맡기지 않는데도 눈은 야속하게도 일찍 뜨였다. 아롈은 밤새 과제를 다 마쳤다는 사실에 잠시 뿌듯함을 느꼈다.
조금 기다리자,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앤이 들어왔다. 아롈은 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들보들한 털로 안을 덧댄 실내화에 맨발을 집어넣자 차던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치렁하게 늘어지는 침의를 입은 채 아롈은 거울 앞에 앉았다.
앤은 장미수로 아롈의 얼굴을 닦고 상아빗으로 머리칼을 빗겼다.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칼은 아침저녁으로 여러 번 빗어줘야 잔머리가 삐져나오지 않고 윤이 났다.
"밤새 안녕하셨사옵니까, 전하?"
"별 일 없었다. 벨타는?"
너무 곤해서 확인해보는 것도 잊고 그냥 잠들었다. 그 성격에 또 무슨 사고를 치지나 않았을까.
"소녀의 방에서 헤엄을 치고 계시옵니다. 모시고 올까요?"
"아니. 만나면 또 시끄럽게 굴 테지. 당분간 네가 데리고 있거라."
"알겠사옵니다. 간단하게나마 조참을 차려왔사온데 조금이나마 드시옵소서."
아롈은 앤이 가지고 온 물만 한 모금 마셨다.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먹지 않으면 저녁까지 못 버티겠다 싶어서 억지로 과일만 몇 알 꾸역꾸역 집어넣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롈쯤 되는 신분의 여인은 무도회가 있으면 새벽부터 꾸미는 걸 시작했다. 왕족의 시녀들도 나름대로 고귀한 집안의 여성이고, 그들에게도 무도회에 갈 치장 시간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렇다고 화려하게 차린 채로 시중을 들 수도 없으니 먼저 달려들어 상전을 준비시키고 남는 시간에 교대를 해가며 자기들의 일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꽃잎을 띄운 따뜻한 물에 아롈을 퐁당 담그고 몸을 씻겼다. 이 나이를 먹고 손톱을 다 물어뜯은 것이 창피해서 손을 오므렸지만 시녀들은 조심스레 아롈의 손바닥을 조물거리고 손톱에 향유를 발랐다. 정말 별 것 아니지만 아롈은 그들이 놀라는 티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복했다. 정말이지 함부르크가 사람을 다 망쳐놓았다.
나른하게 풀린 몸으로 욕실에서 나오자 여러 명이 달라붙어 몸을 말렸다.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해진 살갗에는 촉촉한 크림을 발랐고 오 데 코롱을 뿌렸다.
얼굴이 촉촉해지라고 꿀과 우유를 바르고 닦아낸 다음 씻어내고 그 위에 화장수를 다시 발랐다. 눈썹을 다듬고, 얼굴과 이마의 잔털을 제거하고, 분칠을 하고, 눈가에 화장품을 바르고 뺨과 입술에 연지를 칠했다. 허리를 ㅇ허리에 치마를 띄워줄 도넛 모양의 파니에를 두르고 그 위에 러플이 치렁치렁한 페티코트(속치마)를 뒤집어썼다.
한참 꾸미고 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올립니다."
'여대공 전하'가 아닌 '황태자비 전하'는 언제 들어도 어색했다.
"무슨 일이냐."
"소녀는 조피 공주님의 시녀입니다. 공주 전하께서 명령하시기를 비전하께서 무슨 색의 옷을 입으실는지 알아오라 하십니다."
정말로 옷을 맞춰입을 작정인가보다. 옆에서 리본을 고르고 있던 앤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롈은 혼수품 중 하나인 파란 토파즈 목걸이를 오늘 차고 나갈 요량이어서 그에 맞춰 옷을 고를 예정이었다. 전체적으로 파란색을 띠는 보석을 돋보이게 하려면 무슨 색이 좋을까. 파란 옷이 무난하긴 할 텐데. 그렇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랗게만 치장하는 것도 촌스러웠다. 이미 코시카에서는 삼 년 전에 지나간 유행이 아닌가.
그 때 앤이 무릎을 꿇고 몇 가지 리본을 내밀었다.
"전하. 자주색 옷을 입으시고 이 리본을 매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리본보다는 관을 쓰는 게 낫겠다."
아롈은 특히 진하고 선명한 색을 자주 입었다. 자주색은 염색하기도 어려우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자주색이라고 전해라."
"예, 전하."
마르그리트는 처음 보는 곳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꿈들은 주인의 미모만큼이나 차가웠다. 왜 이렇게 추운 꿈을 꾸고 있을까. 그 사람의 하룻밤 꿈을 같이 꾸고 있을 뿐인데도 설렜다. 처녀는 사뿐사뿐 걸었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서리가 붙은 가시나무 덤불을 헤치면서도 아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길의 끝에는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왔다. 그 곳에는 폐허가 된 궁전이 보였다. 불타서 허물어졌는지 땅에는 숯이 된 기둥들이 발에 채였고 한 때는 귀부인의 미모를 빛내주었을 샹들리에는 그을음과 거미줄을 뒤집어 쓴 채 팽개쳐져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용케 그 곳이 궁전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은 차가운 꿈이 이 것은 궁전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폐허를 망토처럼 두르고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뒤뚱뒤뚱 그 남자에게 달려갔다.
-멈춰라.
하필 불편한 오른발을 땅에 딛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야야야.
-너는 누구지? 몽마인가?
남자의 뒤로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달이 보였다. 남자의 정수리와 목덜미, 어깨 선이 희게 빛났다. 마르그리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몽마 같은 게 아니라고요. 전 사람이에요.
남자는 고개조차 갸웃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그의 눈이 그녀를 뚫어질 듯 쏘아보았다. 마르그리트는 지지않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전 사람이라니까요?
그는 갑자기 정중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치마부터 내려라.
마르그리트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는 당장에 벌떡 일어나 치마를 끌어내렸다. 오동통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확실히 가리고 나서 그녀는 퉁명스레 말했다.
-내렸어요.
그러나 그는 다시 그녀를 보아줄 줄 몰랐다. 다시 한 번 보랏빛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무작정 두어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뺨을 양 손으로 잡아 고개를 억지로 잡아내렸다.
-봐요. 나는 몽마가 아니에요.
-알았으니 놔라. 어떻게 여자가 사내 몸에 함부로 손을.
-몽마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눈이 마주쳤다. 마르그리트는 새삼 감탄했다. 이 사람의 눈은 이렇게 생겼구나. 달을 등지고 역광인데도, 꿈이었기 때문에 홍채의 색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안쪽은 짙은 고동색이 해바라기의 씨앗처럼 펼쳐졌고, 연한 녹색이 뿌리를 꼭 잡고 뒤엉켜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바깥 부분에는 청회색이 리본처럼 홍채를 감싸 안고 있었다. 아주 복잡하고 예쁜 눈이었다.
그가 눈을 내리 깔았다.
-알았다. 몽마가 아니야. 그러니 놔라.
세르, 세르. 일어나십시오. 세르.
주변의 꿈들이 술렁이며 마르그리트를 뿌리쳤다. 그녀는 바깥으로 튕겨나가면서 소리쳤다.
-기억해줘요! 저는 마르그리트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