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4)
서로 마주보게 된 작센의 왕과 왕자는 두 마리의 사이 나쁜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동생을 때려눕히고 싶은 눈치였다. 조피도 결코 호의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루드비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통치 가문으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했건만. 여기도 버터를 충분히 바르지 않은 파이지처럼 바삭바삭 부스러져 내리는 유대감 밖에 가지지 못 한 집안이었나.
하긴, 어느 가문에나 문제아는 있는 법이니.
회장을 가득 메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센의 국왕에게 충성하는 자로서 뒤늦게나마 무릎을 꿇었지만 아롈, 미셸을 비롯한 타국인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약식으로 예의를 표했다.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루드비히였다.
"이런, 이런. 형님 폐하. 귀청이 떨어지겠습니다."
"네놈이 무슨 염치로 여기에 나타난 거냐."
"염치? 작센의 왕자가 무도회장에 나오는 것이 무려 염치씩이나 필요한 일이었습니까?"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리광쟁이인 조피는 그렇다고 쳐도, 그는 작센의 왕자이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지금 엄연히 타국인인 자신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할 작정인가. 나라 망신이라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걸까.
미셸도 같은 생각인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롈. 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어떻게 들었는지 루드비히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뇨, 아뇨. 오를레앙 대공자, 그리고 고귀하신 비전하. 부디 자리를 지켜주시지요. 특히 비전하께서는, 사촌 되시는 작센의 국왕 폐하께서 얼마나 파렴치한지 그 귀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아롈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하고 있었다. 칼로 찍어버릴 듯한 시선의 끝에는 빌헬미네 왕비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성장한 그녀는 안절부절 못 하며 손가락을 가만 두질 못 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잠시 입술을 깨문 다음 자신의 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예. 자기 동생의 약혼녀를 가로채간."
빌헬미나 왕비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절로 움찔했다. 국왕이 루드비히를 향해 날린 주먹이 중간에 턱 소리를 내며 가로막혔다. 왕자는 씩 웃었다.
"죄인의 고백을 말이죠."
두 번째 주먹도 막혔다. 두 형제는 서로의 손을 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아롈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동생의 약혼녀를 채갔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치정 싸움은 알 바 아니었다. 하노버의 빌헬미네가 루드비히의 약혼녀였다고 해도, 그녀는 이제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의 왕비였다. 그럼 남편에게 신의를 다 하면 그만이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요정의 꽃즙을 바른 것처럼 사랑에 빠졌다고. 그럼 그만 아닌가?
하지만 사람을 때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정말 질색이었다. 검술을 배우던 시절에도 차마 사람만은 때리지 못 해서 대련은 꿈도 꾸지 못 했다. 조피가 소리를 꽥 질렀다. 등이 욱신욱신 아프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재빨리 속으로 되뇌었다.
여기는 키예프가 아니야. 키예프 공국으로 가려면 다시 역풍을 뚫고 배를 타고 올라간 다음 황도에서 다시 마차로 한 달은 가야 돼. 여기는 중부다.
그리고 유모는 죽었어. 내가 숯덩이로 만들었어. 이제 날 때릴 수 없어.
시체를 떠올리자 신물이 올라왔지만 아롈은 간신히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조피가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아바마마!"
그러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국왕이 루드비히 왕자의 뺨에 거센 주먹을 날려주고 나서야 몸싸움은 끝났다. 손이 뺨에 정확히 꽂힐 때 아롈은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이 재빨리 쓰러진 왕자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국왕은 숨을 몰아쉬었다.
"왕자를 방에 가둬라. 근신을 명한다."
"보셨습니까? 자기 약혼녀를 내치고 동생의 약혼녀를 빼앗고도 모자라 그게 부끄러워서 그녀를 가두고 적반하장으로 대드는 죄인입니다!"
"재갈을 잊지 마라!"
간신히 조용해지고, 멀리 있던 왕비가 다가와 남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국왕은 아내의 관자놀이에 입 맞춘 다음 도닥였다. 가까이 서있었던 만큼 아롈은 그 속삭임을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신뿐이야. 당신도 나뿐이지?
조피가 왕비의 치마폭에 달라붙었다. 분명 전날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아롈은 그 둘을 도저히 예전처럼 볼 자신이 없었다. 루드비히가 끌려 나가면서 내지른 발악 한 마디 때문에. '자기 약혼녀를 내치고'.
그리고 그는 아롈을 보며 씩 웃어보였다.
"이런. 추한 꼴을 보여 죄송하오. 사촌."
자신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약혼은 약혼일 뿐이다. 결국 결혼한 것은 그 이름도 모를 약혼녀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과 하노버의 빌헬미네다. 약혼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롈은 잠시 약지를 매만졌다. 장갑을 사이에 두고도 매끈한 진주가 만져졌다.
분명 화를 내야 할 일이 맞는데 화를 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뛰었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사과의 뜻으로 한 곡 청하지요."
미셸은 크게 화가 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아롈이 허락을 한다면 지금이라도 따지고 들 태세였다. 하지만 아롈은 여기서 일이 더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앤의 아버지에게 작위를 내려준 사람이었다. 앤이 백작녀의 지위를 잃고 무작이 되어버리면 그 땐 정말 머리가 아플 테지. 아롈은 웃으며 겸양을 표했다.
"어찌 왕비 폐하를 두고 제가 폐하와 첫 춤을 추겠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현기증이 나서 쉬고 싶었는데 잘 됐군요."
왕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왕비는 정말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줄이 생겼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악사들은 연주를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르그리트는 얼어붙은 호수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실 얼어붙었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호수는 마치 할멈이 한천을 너무 많이 넣어 실패한 젤리처럼 탱글탱글했다. 마르그리트가 꿈에 떨어지자 호수는 출렁출렁 움직였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혀 깨졌나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예절 교육을 받았더라면 일곱 살짜리도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 즉 치마와 속치마를 과감하게 들추고 상처를 매만졌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났다. 아파라. 아파라.
피가 빨갛게 맺혀있었다.
마르그리트는 그 피를 손가락에 묻혀 입으로 빨았다.
-너는 만날 때마다 그 모양이군. 몸가짐을 바르게 해라. 보기 흉하다.
마르그리트는 재빨리 치마를 끌어내려 볼품없이 멍이 든 다리를 가렸다. 바보 같이! 한심하다고 생각할 거야. 꿈 얘기를 하자 유모는 마르그리트를 혼냈다. 숙녀는 언제 어디서든 남자 앞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지 않는 법이라고 했는데!
그의 꿈은 항상 밤이었다. 옆얼굴을 따라 달빛이 비쳤다.
-내렸어요.
남자는 마르그리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눈을 끔뻑였다.
-잡아라.
아하. 마르그리트는 최대한 그 때 그 예쁜 여자애처럼 굴려고 노력하며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남자는 그녀를 확 끌어올렸다. 그녀는 수면 위에 똑바로 섰다. 부드럽게 수면이 파도쳤다. 그녀는 감탄했다. 남의 꿈에 쳐들어올 만큼 보고 싶었던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주변에 펼쳐져 있는 꿈만큼이나 냉랭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꿈만 같았다. 아니, 정말로 꿈이었지?
-모르는 것 같아서 경고하는데 조심해라. 외간사내에게 함부로 치마 속을 보이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르그리트의 마음속에서 창녀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족속들이었다. 그녀는 발끈했다.
-창녀 같은 거 아니에요!
-창녀라고 생각했다면 조언을 해 줄 이유가 없지. 오해받기 싫다면 여지를 주지 말고 행동해라.
그는 단호했다. 남자는 잡고 있던 마르그리트 안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로군. 일주일 상관으로 똑같은 여자가 나오는 꿈을 꾸다니.
-그야 내가 당신의 꿈에 들어왔으니까요.
-당신?
그가 기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이 뭐 어때서요.
-평생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려본 적이 없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그렇게 부르면 되겠네요.
-네가 내 아내라도 되나. 세르, 아니면 전하라고 불러라.
아내? 마르그리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내가 되면 저 남자와 평생 함께 할 수 있다. 저 남자의 옆에서 살아갈 수 있다. 손을 꼭 잡고 어쩌면 품에 안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는 상상을 하자 머리가 빵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물었다.
-제가 아내가 되면 안 돼요?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지 모를 일이지만, 대답하지. 나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다.
그들의 옆에 한 여자가 솟아올랐다. 아주 예쁘던 그 여자애. 호수의 물이 솟아올라 만든 환영이라 투명하긴 했지만 정교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예뻤다. 속눈썹도 부러울 만큼 길었다.
-그래서요?
마르그리트는 소녀의 어깨를 쳤다. 소녀의 형상은 다시 호수의 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게 되겠지.
-약혼만 했지 아직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우리 할멈이 그러는데 식장에 들어가서 혼인서약까지 마치지 않으면 남녀 사이는 모르는 거랬어요.
그가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마르그리트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럼 저랑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아무하고나 결혼 할 수 없는 몸이다.
-저는 아무나가 아니라 마르그리트 안이에요. 전에 말씀드렸지만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 다시 말할게요. 저는 마르그리트 안이에요.
-꽤나 거창한 이름이군.
-그야, 대공녀인걸요.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마르그리트는 허리를 쭉 폈다. 가끔 할멈이 서명하라고 하는 서류에나 갈겨대던 이름을 또박또박 읊었다.
-저는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앙리에트 대공녀, 블루아의 아가씨예요.
-헛소리. 오를레앙 대공에게는 루이즈 안 한 명밖에 자녀가 없다.
-루이즈는 제 동생이에요.
그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내가 요즘 오를레앙 대공녀에게 시달리긴 했지. 꿈에서까지 그 이름을 듣는 걸 보니 정말 피곤했나보군.
-정말인데. 어떻게 하면 믿을래요?
마르그리트는 허리에 손을 대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내기를 할래요?
-무슨 내기?
-블루아로 와요. 와서 제가 있으면 제가 이기는 거고, 없으면 당신이 이기는 거예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읍.
남의 꿈에서도 심장은 뛰었다. 보랏빛의 불꽃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관통했다. 남자의 입술은 레몬맛이 났다. 마르그리트는 혀를 날름 내밀고는 꿈에서 뛰쳐나갔다.
-돌려받고 싶으면 블루아로 와요.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