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7)
턱수염이 덥수룩한 근위병들의 장은 앙투안에게서 손수 마르타를 빼앗듯이 부축했다.
"대체 이 분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숙녀분(Fräulein)?"
아롈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앙투안이 나지막히 경고했다.
"지금 경의 앞에 계신 분은 로렌의 태자비십니다. 그에 맞는 경의를 표하십시오."
그는 크게 놀라더니 허리를 펴고 경례를 붙였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근위대 5소대장, 쇤켈 남작 에른스트 폰 멜첸하우어입니다."
앙투안이 대신 소개의 말을 붙였다.
"로렌의 마담 라 세르,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전하십니다."
아롈은 머리를 짚었다. 오한이 났다.
"무슨 일이냐."
"소신들은 마르타 왕자비 전하의 경호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보고를 받고 수색 중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전하께 폐를 끼친 걸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마르타 왕자비라니. 무슨 소리인지 대강 아귀가 맞아들어갔다.
저는 빌헬름 전하의 약혼녀인 걸요.
하인리히는 하노버 공녀와 잘 지내고 있나요?
루드비히도 빨리 좋은 사람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여기에 루드비히가 난동을 부리면서 지른 울분의 외침까지 더하면 바보라도 사건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아마 하인리히가 병사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아롈은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꾸짖었다.
"어떻게 내 사촌 올케가 불편한 몸으로 나돌아다니게 놔두었단 말이냐!"
"시정하겠습니다! 모두 소신들이 미욱한 탓입니다."
"어서 모셔라. 병사한 하인리히가 하늘에서 보고 있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쇤켈 남작은 근위대 말직에 있는 것치곤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표정에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롈은 신입으로 보이는 청년이 마르타를 부축하면서 중얼거렸다.
"루드비히 전하의 부인이신데.'
아롈은 가설을 확인하고 그넷줄을 쥐었다. 마르타는 거의 짐짝처럼 실려 사라졌다.
아롈은 잠시 그네를 타며 기다렸다. 이만큼 큰 비명이 울렸는데 틀림없이 누군가는 오겠지.
"비전하.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놀랍게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진즉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쉬러 갔던 빌헬미네 왕비였다. 아롈은 그네에 그대로 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왕비 폐하. 이해해주시겠어요? 다리가 풀려 일어나기가 어렵군요."
"물론이지요! 앉아계세요.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비명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놀라서 달려왔답니다. 정말 다치신 곳은 없는 게 맞지요? 아, 저는 정말이지 놀라서."
왕비의 횡설수설이 끝나기도 전에 무도회장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왔다. 국왕은 가장 뒤에 있었고, 맨 앞은 근위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국왕의 곁에는 미셸을 비롯한 몇몇 사내들이 더 서 있었다. 아롈은 그들 중 몇 명이 오를레앙의 기사단임을 알아차렸지만 반 이상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빌헬미네! 무슨 일이오!"
"오, 빌헬름."
왕비는 국왕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린 조피는 자러 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롈은 여전히 앉은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제 무례를 탓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너무 놀란 탓에 일어나기가 어렵군요."
"물론이오."
부부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대답을 하다니. 낮에만 해도 아롈은 웃었겠지만 도저히 지금은 억지 웃음도 지을 수 없어 입매가 굳었다.
"유감이오. 귀한 몸이 많이 놀랐을 테지. 어서 들어가 쉬는 게 어떻겠소?"
그 때 미셸이 국왕의 말을 끊고 나섰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폐하. 타국인인 제가 말씀 올리는 걸 윤허해주십시오."
아롈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셸이 하고 있는 말은 매끄러운 남쪽 말이었다. 그리고 미셸의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그 말을 페란토 어로 옮겼다. 미셸은 굳이 통역사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페란토를 구사할 수 있었음에도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외교 문서에도 기록될 수 있는 정식 항의 절차의 기본이었다.
국왕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웃더니 스스로 페란토 어를 내뱉었다.
"말씀하시오, 대공자."
미셸은 아롈이 처음 보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롈의 갈리아 어 실력으로는 연음 사이에서 중간중간 단어를 골라 듣는 것도 버거웠기 때문에, 통역을 통해서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폐하께 상기시켜드리건대 물론 저는 오를레앙 대공자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리무쟁 공작이라고 불립니다. 부디 격에 맞게 호칭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정정하지. 말씀하시오, 공작."
"먼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주인의 예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저희 로렌의 마담 라 세르께서는 국왕 폐하와 사촌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작센이 특별히 전하께 호의를 품고 있다는 가정 하에 폐하의 보호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했사온데,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그리 애매한 태도를 취하시는 것은 저희 전하의 믿음 뿐만이 아니라 작센이 안전한 곳이라 의심치 않을 다른 모든 선량한 신민에 대한 배신이 아닌지요."
아롈은 그 거친 표현에 경악했다.
"아직 사태조차 파악이 되지 않아 뭐라 할 말이 없소. 귀국의 태자비가 내 궁정에서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요."
"폐하. 본국의 태자비께서는 귀국의 왕자가 놀라울 정도로 교만하게 굴며 소란을 피웠을 때에도 너그러이 넘어가셨사오나 미욱한 저와, 미욱한 제 뒤에 있는 오를레앙은 그러기 어렵습니다. 물론 일개 대공가가 국왕 폐하의 의중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오나, 7인의 맹세 이후 미남왕 앙리 폐하께서 오를레앙에 내려주신 권리로서 로렌의 황제이시자 7인의 맹세의 맹주이시자,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수호하시는 루이 오귀스트 폐하께 이 사실에 대해 고해 올리는 것은 막지 못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시길 바랍니다."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는 뜻이었다.
"공작의 의중은 충분히 알겠소. 허나 아직 본인조차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지 못 한 상태요. 내 왕홀과 왕관에 걸고, 이 사건이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을 거요."
국왕의 맹세에 더 이상 토를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 부족함에 이토록 관용을 보여주심에 대해 감읍할 따름입니다."
미셸은 인사를 하고 한 발 물러났다. 아롈은 그넷줄을 붙잡고 일어났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폐하. 저는 피곤하여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를 호위하고 있었던 클라리 경의 증언을 들으신다면 이 사건에 대해 알아내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녀의 시중인들이 대체 어찌 모셨기에 제 사촌 올케가 이런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꼭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도회는 준비한 보람도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아롈은 미셸과 앙투안의 도움을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진실로 안도감이 섞인 고맙다는 말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증언을 하러 총총히 떠났다. 어쨌거나 그가 옆에 없는 채로 마르타를 마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아찔했다.
-비밀은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머리는 어찌나 쓸데없는 것을 잘 기억하는지. 아롈은 마르타의 앞에서 한순간 키예바 여공이 되었다. 마법사였으면서도 목 졸려 죽기 직전까지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맞기만 하던 어린 아이.
아롈은 방에 돌아온 다음에야 목걸이를 풀어서 던져버리고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푸른 녹주석과 금강석은 그렇다고 쳐도 파란색의 토파즈는 대단히 희귀했다. 코시카의 보석 산지에서도 아주 조금 나는데. 가격이야 그렇다 쳐도 남쪽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시녀를 하나 불러다가 목걸이를 찾아오라고 명령을 전달한 다음 아롈은 앤을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앤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차림이 엉망이구나."
"전하. 하.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무도회장에서 바로 달려오느라."
"됐다. 머리나 좀 풀어다오."
앤은 성장한 그대로였다. 수반에 손을 담그고 수건으로 닦은 앤은 먼저 아렐의 머리에 꽂힌 꽃을 조심스레 빼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시들어버린 꽃가지. 그리고 미쳐버린 숙녀.
"너는 작센 출신이라 했지."
"그러하옵니다."
앤은 미리 머리를 잡고 있다가 핀을 풀고, 자유로워진 머리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왕궁에서 자랐느냐?"
"그것은 아니옵고 전대의 왕비 폐하께서 소녀를 어여삐 여기시어 간혹 부르셨사옵니다."
전대의 왕비라면. 옐리자베타 여대공에게 앤은 조카손녀가 되니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려고 했던 아롈은 잠시 나이를 역산해보았다. 나이가 맞질 않았다. 작센에 시집가 엘리자베트로 불리던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작센이 왕국이 되기 전에 죽어 한낱 공작부인으로 남았다.
"전 왕비?"
"카를 1세 아우구스트 폐하의 계비 되시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의 아말리에 폐하십니다."
"브라운슈바이크라. 전 왕비는 살아 있느냐."
"요양을 하고 계시옵니다."
앤은 노련한 손길로 땋여있는 머리채를 아프지 않게 하나하나 풀었다. 요양이라.
"정신이 온전치 않나보구나."
바삐 움직이던 손이 잠깐 멈추었다. 거울 앞이 아니라서 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예."
"오늘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를 보았다. 근위병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루드비히 테오도르 왕자의 부인이라고 했다."
"그러셨사옵니까."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다오."
"어찌 물으시옵니까?"
아롈은 목을 젖혔다.
"궁금해서."
대체 무슨 일이기에 미쳐버리기까지 했을까 싶어서. 당연히 죽은 하인리히 왕자의 미망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루드비히라니. 게다가 아롈을 빌헬미네라고 부르며 칼로 찌르려 들었다.
"말하기 싫으냐."
머리카락을 금세 다 풀어버린 앤은 약간 구불거리게 된 머리칼을 빗으로 빗어 내렸다.
"하명이시라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명이 아니라면 말하기 싫다는 말이로구나."
"불행한 일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새신부이시니 아무래도 액운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소녀가 건방졌다 생각되시오면 치죄해주시옵소서."
누군가 이반 3세가 이반 파블로비치 대공을 독살한 게 아니냐고 떠들고 다니거나, 혹은 알렉산드르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유리예프스키 남매를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다면 어떨까.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과 하노버의 빌헬미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혼인했든 그것은 아롈이 참견할 바가 아니었다. 설령 그로 인해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미쳐버렸다고 해도. 사촌이라곤 해도 아롈은 키예나고 빌헬름은 위튼이었다. 서로 다른 가문이며 참견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쓸데없는 호기심이다."
아롈은 깨끗이 인정했다. 그래. 아롈은 새신부였다. 딱히 네가 어디서 상전을 가르치냐며 길길이 날뛸 생각은 없었다. 맞는 말이니. 다른 사람의 가정사에 관심을 굳이 갖는 것은 천박한 취미였다.
"하지만 듣고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롈 자신을 위해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앤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빗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혹사당한 아롈의 두피천히 매만져주는 손길이 시원했다.
"소녀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옵니다. 말씀드릴 내용은 그저 아랫것들이 떠드는 소문에 불과하오니 전하께서 걸러들으시옵소서."
앤의 이야기는 아롈이 치장을 전부 풀었을 때야 끝났다. 옷을 갈아입는 시중을 혼자 들어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도 그랬다. 침의로 갈아입은 아롈은 실내화를 신은 발을 까닥였다. 앤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그랬던 건가.
"알았다. 얘기해주어 고맙구나."
"소녀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주시옵소서."
"가서 편히 쉬어라."
앤은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린 다음 뒷걸음질 쳐서 문에 다가갔다.
"앤."
그러고 보니 직접 이름을 부르는 것은 처음이구나. 묘하게 낯설었다. 막 문을 열려하던 앤은 몸을 돌렸다.
"부르셨사옵니까?"
"다음부터는 먼저 네 치장을 풀고 와서 시중을 들어라. 흐트러진 꼴을 보기 민망하다."
허술한 차림으로 복도를 돌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 바로 옆에 딸린 곁방으로 옮기라는 말이었다. 아롈은 앤을 시녀로 데려가면서도 그녀를 곁방이 아닌 건넛방에 두었다. 술이라는 게 참. 그렇게나 어려웠던 게 순식간이었다. 앤은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나갔다.
아롈은 침대에 가지 않았다. 오늘도 잠을 자기는 글렀다. 조금 추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도 좋았다. 아롈은 정적 속에서 자신이 벨타의 노랫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라도 들렸으면 좋겠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아롈은 일어나 과제를 뒤적였다. 어제 전부 해두었다. 부지런한 자신을 원망하며 방 안의 아무 책이나 펼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읽었다.
그래서 아롈은 베개를 든 조피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는 화를 내지 않았다.
말을 달리고, 또 달렸다.
오를레앙은 멀었다. 오를레앙의 주도와 블루아로 갈라지는 길에서 그는 잠시나마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주도로 간다면 오를레앙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적 제스처 정도로 끝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돌려받고 싶으면 블루아로 오라고 했다. 그 무식하고 상식 없는 여자에게 당장이라도 따져 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