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시 장신구 (7)
당장 혀를 자른다고 해도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롈은 한겨울인 것처럼 떨리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고 대답했다.
"예."
작게 웃음소리가 났다.
"다행이군요."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어두운 밤에, 침의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게 겁나는 것? 아니면 취향이 겁먹어서 바들바들 떠는 불쌍한 여자라든가.
엉뚱한 생각이 가지를 치기 전에, 때맞춰 세시안은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겁이 나거든요."
"예?"
아롈은 물음을 내뱉자마자 입을 찧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비웃는 대신 품 안의 소녀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이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맞닿았다. 한참 전에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깨에 다시 한 번 힘이 들어갔다. 용케 밀쳐내지 않은 건 가만히만 있으라는 충고를 기억해낸 덕분이었다.
어깨 너머로 수입산 아마포를 풍성하게 주름잡아 만든 희뿌연 장막과, 장막을 고정하고 있는 기둥과, 침대 머리 부분에 양각으로 새겨진 장미가 보였다. 그리고 그 전체에 보드라운 어둠이 덮여 있었다.
잔잔한 대답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은 붙들어놓을 수 없으니."
천천히 어깨에 힘이 빠졌다. 아직은 익숙잖은 외국어인데도 곱씹을수록 아프게 스몄다. 그 말이야말로 자신이 해왔던 고민의 압축이었으므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놓을 수 있었더라면. 애정이 변하지 않고 한 곳에 못 박혀 영원하다면.
그제야 통감했다. 그는 사람이었다. 로렌의 후계자이기 이전에. 다섯 번의 실패를 겪어 그리 좋은 혼처는 아니라고 여겨지는 홀아비이기 이전에.
알렉산드르의 도주는 아롈의 마음속에 평생 걸린 가시였다. 아롈이 그런데, 하물며 그는 사별을 몇 번이나 한 사람이었다. 아롈이 미셸이나, 필리프나, 앙투안에게 말로만 들었던 그의 실패는 흠(欠)이 아니라 흉이었다.
아롈은 둘 곳을 찾지 못 해 방황하고 있던 손을 남편의 등 뒤로 보냈다. 그리고 아주 어색하게 그를 안았다. 체온은 따스했다.
"전하."
죽음 대신 결혼을 선택했을 때, 아롈은 내내 공포에 질려있었다.
삶은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데. 밀려나고, 버림받을지도 모르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롈이 아는 한 가장 완벽한 여성이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혼자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걸 알자 아주 조금은 편해졌다. 그 안도감을 담아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전하께서 기실 겁쟁이시라는 건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세시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온몸이 들썩였다. 아롈은 가만히 안긴 채로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한참을 끅끅대며 웃어댄 그는 눈물까지 훔쳤다.
"그리 아량을 베풀어주시니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럼 전하께서도 제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약속하지요."
따뜻한 눈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보냈다. 다리가 저려왔다. 박하를 삼킨 입안처럼 화한 감촉이 순식간에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허리까지 시큰거렸다. 아롈은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아롈이 놀라지 않을 만큼 충분히 예의바른 입맞춤이었다. 미지근한 살결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혀가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핏줄 속으로 바늘이 흐르는 듯했다.
혀끝이 바싹 말라붙은 입 안을 느긋하게 훑고 다닐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쪽이 도망칠 때마다 저쪽이 다가왔기 때문에 거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누워 있었을까. 촛불은 또 언제 꺼졌을까. 앞섶을 여미는 끈은 언제 풀렸을까.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새카만 어둠 속에서 숨소리가 할딱할딱 울렸다.
뺨, 눈가, 이마, 귓불, 그리고 목덜미. 빗방울 같은 입맞춤이 쏟아졌다. 아롈은 금방 나른해졌다. 상체를 파묻은 거위 깃털 베개가 녹아들 것처럼 푹신했다.
"읏."
하지만 그도 잠시, 아롈은 젖가슴을 움켜쥐는 손을 황급히 잡아챘다. 심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날뛰었다. 남편은 도닥이듯 아롈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무서워요?"
남편의 목소리에는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던 아까와는 달리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할까요?"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평생 가슴을 누가 만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가쁜 숨소리가 부끄러웠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다리가 저렸다. 무엇보다 사내의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채로 누워있는 게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면, 이 사람은 기꺼이 그렇게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롈은 고개를 저었다.
냉정해라, 그리고 행동하라. 도저히 냉정해질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이성을 닥닥 긁어모아 생각해보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뇨."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근위대의 절반을 장악하고도 나머지를 지배하려 기다렸다. 살고 싶었기 때문에 목을 매지 않았다.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미하일의 가슴에 성호를 긋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마법사임을 밝히지 않고 계승권을 포기했다. 결국 중요한 순간에 뒷걸음질만 치다가, 조각배처럼 이 남쪽에 떠밀려왔다.
그래서 아롈은 이 결혼의 시작부터 고작 무서움을 핑계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관계야말로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하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둠에 순응을 마친 눈은 그의 얼굴을 또렷이 담았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올려 더듬더듬 남편의 턱선을 만졌다.
"괜찮습니다."
아롈은 용기를 쥐어짜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어색하게 입술을 겹쳤다. 세시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체중 때문에 아롈은 그대로 베개 위로 떨어졌다. 조각배는 그대로 파도의 품에 안겼다.
"하읏."
혀가 유두를 빨아올릴 때마다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나신을 남자에게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피부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롈은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은 채 신음을 삼켰다. 간혹 강한 자극이 올 때마다 다리가 배배 꼬였다.
이 정도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제멋대로 생각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꼭 오므리고 있던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오자 아롈은 정말 기겁해서 버둥거렸다.
"쉿."
서늘한 손가락이 은밀한 곳을 문질렀다. 간신히 비명만은 삼킬 수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감촉이었다. 아롈은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물레방아로 물을 퍼올리듯 쾌감이 솟았다.
세상 모든 부부들이 다 이런 일을 하고 산다는 걸까.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상한 척 했다고? 아버지는, 어머니는, 이런 시간을 함께 나눴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서로 냉랭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이것 때문에 나탈리야를 버리지 못 한 걸까.
손길이 조금 빨라졌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긴장해서 시리던 손끝에 따스하게 데워진 피가 돌았다. 숨이 막혔다. 아니, 숨을 어떻게 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с, стоп(그만)."
이미 목소리는 반쯤 흐느끼고 있었다. 겨우 조금 살점을 문지르는 정도로 이렇게 헝클어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가장 치욕스러운 건, 쾌락에 무너지려고 하는 자신의 알량한 이성이었다. 스스로 음탕하다는 비난을 해보아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стоп(그만). ша(그만 둬). стоп(그만)!"
"두 번은 못 물어요."
남편은 음색이 풍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아롈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몸이 오스스 떨렸다.
누가 머릿속을 휘저은 것처럼 질척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생각을 진흙탕에 쓸어 넣고 짓밟은 듯했다. 모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놓은 이성이 겨우 몇 분 만에 허물어지려는 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윽."
아롈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눈앞에 별똥별이 튀었다. 몸 전체에 농밀하게 고였던 쾌감이 다리 사이로 질척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끝인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숨 돌릴 새도 없이,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자존심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참는 게 나았다. 실 한 오라기조차 견딜 힘이 남지 않은 팔을 간신히 들어 목을 끌어안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눈가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남편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체온은 훨씬 생생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맺혀있는 목이 화끈거렸다. 그는 잠시 후 체중을 완전히 아롈의 몸에 실었다. 너무 지쳐서 무겁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을 잡고 반지 위에 살짝 입 맞췄다. 유부녀의 표지가 어둠 속에서도 언뜻 빛을 발한 듯했다. 그들은 이제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어엿한 부부였다. 새신부의 뺨은 물을 뿌린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