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과 별과 수수께끼 (6)
아롈은 미간을 좁혔다.
"전하, 저는 들어오시라고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사과는, 얼마든, 할 테니, 하아. 일단 그 창문 좀 닫고,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할까요?"
과연 사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라온 사람답게 거친 숨소리였다. 아롈은 순순히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선심을 거하게 써서 빗장까지 걸었다. 얌전히 기대있던 창틀에서 몸을 내리자, 실내화 바닥이 방바닥과 닿으면서 모피의 털들이 발을 포근하게 감쌌다.
"소원하시는 대로 닫았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가 났다.
"뭘 하고 있었지요?"
"별을 보고 있었습니다."
별 다음에는 당신이었지만.
"창문 밖으로 몸을 그렇게 내밀면 위험해요.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세시안이 갑자기 정원에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아롈이 이런 싫은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남편이라도 해도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내의 방에 허락도 없이 난입하다니.
아롈은 뚱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 때문에 난데없이 정원에서부터 자비관 사층까지 뛰어 올라오신 겁니까?"
세시안은 조금 웃었다. 힘없는 웃음소리였다.
"예, 미안합니다."
그리곤 아롈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겨우 이주의 시간 동안 평생 받아본 입맞춤을 다 합친 것의 백배쯤 되는 입맞춤을 남편 한 사람에게 받았다. 이젠 입맞춤을 받아도 달달 떨리지 않았다. 그냥 안온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조금, 뭐랄까, 놀랐을 뿐이에요."
대체 왜 놀랐다는 걸까. 그는 딱히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서 미안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괜찮습니다."
희한하게도 정말 괜찮았다. 그렇게나 짜증이 났는데 겨우 사과 한 마디에 앙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롈은 실소를 흘렸다.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목을 매달았다가 그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충분히 겪어보지 않았나.
멍청한 옐레나 파블로브나. 아니,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이름이 무어든 천치 같았다. 알렉산드르가 사라졌을 때의 배신감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쉽게 휩쓸릴 수가 있나.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까의 다급하던 모습은 간곳없고, 여유롭고 온화한 웃음이 가슴을 간질였다. 아롈은 눈을 감았다.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이 키스해주었다. 어느덧 존재조차 몰랐던 씨앗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는 걸 몰랐다. 두 장의 떡잎은 다정함을 뿌려주자마자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강박을 뚫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빛깔이 어찌나 찬연한지 도저히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시누이가 방 안에 꽂아둔 꽃의 이름이나 지붕 위에서 빛나고 있는 별의 이름은 몰라도, 그 싹의 이름만은 누가 가르쳐 준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연정이었다.
***
주변에는 온통 초상화 뿐이었다.
금발. 녹안. 섬세한 콧날과 살짝 치켜올라간 눈.
이반 파블로비치. 아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반 대공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여대공 전하를 황도로 돌려보내라는 전갈이 왔답니다.
-정말 많이 닮았네.
처음엔 단순히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를 본 순간 의심했고, 알렉산드르가 통곡할 때 확신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이반은 죽은 사람이고, 아롈은 살아 숨쉬는 사람이니까. 소녀는 아장아장 알렉산드르의 초상화를 찾아 내달렸다. 그러나 초상화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가지 마! 사샤!
알렉산드르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보았다.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아롈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화사한 회랑의 환상은 구름처럼 흩어졌다.
"자는 사람을 깨웠군요. 미안해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주 오랫동안 푹 잠든 것처럼 몸이 저렸다. 하지만 창밖은 아직 어둡기만 했다. 겨우 해가 뜬 듯했다. 촛대에서 나오는 따뜻한 주황색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뭐라고 말을 해보려 했지만 목이 바싹 말라 있었다. 세시안은 아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쓸려나갔다.
"더 자요."
그는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다만 머리끈은 찾지 못 했는지 검은 머리는 그대로 어꺠 위에 흐트러진 그대로였다. 남자들은 편하겠다 싶었다. 아롈은 평생 옷을 혼자 입어본 적이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역광 때문에 어둠이 드리운 얼굴이 보였다.
아롈은 저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외면했다. 침을 모아 삼키자 한결 목 상태가 나아졌다.
"제가 얼마나 잔 겁니까?"
"지금이 다섯 시니까, 세 시간 정도일까요."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자 다리 사이가 둔통을 호소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에만 아프다는 알렉산드라의 경험담은 순 거짓부렁이었다. 남편과 몸을 몇 번이고 섞었지만 그 때마다 생살을 찢는 듯했다.
"이르게 준비하셨습니다."
"정의관에 가서 밤새 서류를 본 척 하려 해요. 이건 비밀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쿡쿡 웃었다. 이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도 좋아하고, 비밀이라는 말도 좋아하고, 혼자 웃는 것도 좋아했다.
"비밀을 발설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빙그레 휘어지는 눈웃음에 어쩔 줄 모르고 시트를 그러쥐었다. 다행히 남편은 눈치를 못 채고 시트를 조금 더 올려주었다.
"온 이블린이 세르가 아내에게 잡혀산다고 난리겠지요. 만찬이 끝나고 서류를 보다가 도망가서 아내의 방에 기어들어갔다고요."
"제 탓입니까?"
손가락이 둥그런 뺨을 살짝 찔렀다. 지난 밤 품에 알몸으로 안겨 야릇한 정사를 나눴으면서도 그 단순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어여쁘시니까요."
예쁘다, 아름답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런 입에 발린 칭찬을 살면서 수만 번은 들었을 텐데 별 것도 아닌 예쁘다는 말이 왜 이렇게 특별하게 들리는지. 정말 반반한 낯짝만으로 마음의 방향이 정해지면 얼마나 편리할까.
"부디 비밀로 해주겠어요?"
사람의 마음은 잡아둘 수 없는 것. 그 말이 어마어마하게 무서워졌다. 아롈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곁방의 문이 열렸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