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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9)


 앤은 아롈의 침대 곁에 앉아 손발을 주무르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등 충성스러운 시녀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아롈은 머리가 아프다는 변명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다가 결국 독한 브랜디를 한두 모금 마시고 나서야 진정하고 잠들었다. 그녀의 눈은 발갛게 부어있었다.

아롈이 황제를 알현하는 내내 시립(侍立)해 있었지만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성서 몇 줄을 읽게 했을 뿐이었다. 앤은 페란토 어로 된 성서를 줄줄 외우지는 못해도 아롈의 낭독을 듣고 그것이 자손의 부흥을 뜻하는 구절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대체 무어가 문제란 말인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셨다. 남성은 강인하고 튼튼하며 씨를 뿌릴 수 있게, 여성은 자상하고 섬세하며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자손을 낳아 번성시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였다. 더욱이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면 말할 것도 없다. 시부(媤父)가 자부(子婦)에게 당연하게 내릴 수 있는 충고일 뿐인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가 저물 때이니, 샹들리에의 양초에 불을 붙이러 온 하녀일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잠들어 있는 이상 촛대 하나만 켜놓아도 충분하리라. 앤은 아직도 화장대에 놓여있는 벨타를 제 방으로 치우고 방문을 열었다.

“필요없으니 돌아가세요.”

그러나 방문객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돌아가야 하나요?”

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소녀는 그저.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그는 앤을 일으켜 세우고는 물었다.

“그 사람은 안에 있나요?”

“오수에 드셨사온데 아직 깨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렇군요.”

뒤에 선 시종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향기가 아주 생생하고 짙었다.

“잠시 보고 가겠습니다.”

앤은 부디 예민한 주인이 깨지 않기만을 바라며 비켜섰다. 남편이 아내를 보겠다는데 그녀가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 하시옵소서.”

세시안은 꽃을 받아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지나치자마자 앤은 바로 시종의 앞을 막아섰다.

“경. 무례인 줄은 아오나, 경께서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응접실이라면 몰라도 침실, 것도 침수 들어 있는 여성의 방이었다. 시종은 이내 납득한 듯 돌아섰다. 앤은 문을 닫았다.

신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남쪽의 높은 사람들은 작센의 여러 왕족이나 북쪽 출신인 아롈에 비해 사람들의 기척에 대단히 민감했다. 아롈의 손님들은 앤이 아주 조금만 부주의하게 걸어도 흘끗 눈초리를 주곤 했다.

앤은 그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항상 뭉게구름처럼 부드럽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군요. 레르헨펠트 양.”

​“​하​문​하​시​옵​소​서​.​”​

“오늘 당신의 주인이 황후 폐하를 알현했습니까?”

“아니옵니다.”

“그럼 부황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로렌의 황제이시자 7인의 맹세의 맹주이시자 정의관의 주인이신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서 그의 며느리와 오늘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물었습니다. 대답하세요.”

앤은 입만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물었다.

“어떻게, 아셨사옵니까?”

“중요합니까?”

“소녀는 모르겠사옵니다. 그저, 그저.”

“그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새끼 새가 담긴 둥지를 등지고 있는 어미 새처럼 날카롭게 굴었다.

“레르헨펠트 양.”

“특별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그저 성서를 주시고는 읽으라고 하셨을 뿐이옵니다. 전하께서 한 구절을 다 낭독하시자마자 황제 폐하께서는 다음 알현이 있다고 하셨사옵니다. 자비관에 돌아오자마자 전하께서는 머리가 아프다 하시었고, 브랜디 한 잔을 음용하신 뒤 수면을 취하셨사옵니다.”

“무슨 구절인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앤은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의 부정이었다. 그는 다소 다급하게 재촉했다.

“대강 어느 부분인지도 모릅니까?”

“분명하지는 않으나 ​제​레​미​아​-​예​레​미​야​-​ 서였사옵니다.”

“몇 장입니까?”

“한낱 시녀의 몸이옵니다. 어찌 알겠사옵니까?”

로렌의 태자-prince ​h​é​r​i​t​i​e​r​-​는​ 어투와는 달리 대단히 정중한 몸짓으로 아롈의 손목을 잡아 올려 진주 반지 위에 입술을 댔다.

“알겠습니다. 레르헨펠트 양. 지금 나가서 앞으로의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오십시오.”

“전하, 다른 약속은 모르겠사옵니다만 황후 폐하와의 선약을 소녀가 명령도 받지 않고 함부로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내가 방금 명령했잖습니까.”

아롈을 모시면서 단편적으로 접한 그는 신혼의 단맛에 퐁당 빠져 속이 없는 것처럼 부들부들하게 웃는 다정한 남자였다. 그러나 방금 그의 말에서는 오랜 시간 숙성된 위압감이 배어나왔다.

“부족합니까?”

그 명령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앤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고 말았다.

“알겠사옵니다.”

 

문이 닫히자마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안 일어날 건가요?”

아롈은 눈을 감은 채 자는 척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남편은 손을 주물럭거리는 것도 모자라 눈꺼풀을 쓰다듬었다. 눈물과 소금기에 한참 시달린 살결이 따끔거렸다.

“방금 얼굴 찌푸렸어요.”

하릴없이 눈을 떴다. 어찌나 울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명료해졌다.

“이번에도 깨웠군요. 미안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요. 자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숨을 멈추는데요. 게다가.”

남편은 다시 아롈의 손목을 잡아 올려 손끝에 입술을 대고는,

“맥박이 갑자기 빨라지기도 했고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며 표정은 여전히 상냥했다. 앤을 추궁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멋대로 들어온 건 봐주겠어요?”

아롈은 손을 억지로 잡아 뺐다. 돌려받은 손을 가슴에 대고 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확실했다. 괘씸한 심장은 손목 한 번 잡혔답시고 물색없이 좋아 날뛰고 있었다.

씨받이 취급을 받아 오열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아이나 낳아야 할 주제에 정의관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밀려난 게 서럽고 또 서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으면서. 토사물이 가득 든 요강의 뚜껑을 닫고, 다시 열어 반질반질해진 면을 확인하면서 이제 막 돋아난 싹을 파내어 흔적도 없이 짓이겼다고 믿었다. 위액으로 더러워진 손을 대야에 담가 씻어내면서 마음도 함께 쓸어 보냈건만. 얼굴을 보기 싫어서 그대로 자는 척할 만큼 상처가 깊은데 어째서.

“전하. 무례하십니다.”

너무 야멸찬 손짓은 아니었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이 싫어 냉랭함을 두 겹 쯤 더 감싼 목소리로 말했다.

“앤이 제 수석 시녀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약속은 제 평판뿐만 아니라 명예와도 관련된 것입니다. 그걸 함부로 취소하라 명하시다니요. 월권이 과하십니다.”

갈리아 어로 ‘월권’이 무언지는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페란토 어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훨씬 말투가 딱딱해졌다. 어린아이나 쓸 만한 어휘를 이용해 냉정함을 가장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음.”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 얼굴 표정은 이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진중했으므로, 아롈 역시 다리를 바닥으로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당장 적절한 의복을 갖출 수 없다는 게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은 한참이나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아롈은 점점 풀어지려는 마음을 애써 바로잡았다. 아침과 낮의 마음이 다르고, 낮과 저녁의 마음이 다르다니. 너무 말을 강하게 했다고 사과하고 싶어진다니. 말도 안 된다.

마침내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술 한 잔 할까요?”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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