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과 별과 수수께끼 (12)
독주와 사랑에 취해서 늘어진 주인만큼이나 앤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앤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멀어지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앙투안은 길을 비켜주기는커녕 건장한 몸으로 길을 막아섰다.
“황후 폐하께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어 그만. 돌아가려고 하였사옵니다. 그럼 이만.”
“레르헨펠트 양. 전하께는 말씀 올리셨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때 그 목걸이 말씀입니다.”
아롈의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고 몰래 걸고 나갔던 것을 들켰던 이후, 앤은 클라리 경에게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조금의 말미만 주면 모든 일을 주인에게 전부 실토하겠노라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에 당황한 그는 그리 하라고 했고, 그 이후 앤이 아롈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면 자비관 바깥으로 나가질 않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해야지, 해야지 하는 마음은 커졌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나질 않았다. 낮에는 항상 다른 손님들이나 시녀들이 붙어있었고 밤에는 세르가 찾아왔다. 주인이 관계를 갖는 도중에 문을 따고 들어가 잘못을 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제 저녁에도 아롈은 홀로 있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말하기가 무서웠다.
“클라리 경. 듣는 귀가 있는 곳에서 그런 말씀을 하오시면.”
사실 방을 뒤져보면 목걸이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분명 화장대 위에 놓고 갔던 목걸이가 어디로 사라졌겠느냐마는 그걸 인정하기는 힘들었다. 화장대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방을 치우는 하녀가 몰래 훔쳐간 것은 아닐까, 다른 곳에 숨겨놓고 급한 마음에 머릿속에서 지운 것은 아닐까. 사실은 옷을 넣어둔 궤짝 어딘가에 고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찾아보면 그만이건만 앤은 차마 그러지 못 했다. 아침에는 아롈의 치장을 돕느라 바빠서, 낮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어서, 밤에는 피곤해서. 아니, 핑계다. 앤은 정말로 방을 뒤졌을 때 목걸이가 없으면 어쩌지 두려웠다. 의논할 벨타도 없어서 혼자 고민을 감싸 안고 덜덜 떨어야했다.
앙투안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그럼 잠시 어디에라도 들어가서.”
“안 됩니다!”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이었다. 앤은 결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기세에 당황한 앙투안이 몸을 물릴 정도였다.
자기가 얼마나 큰 소리를 질렀는지 깨닫자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도 듣지 못 한 듯,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천운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소녀의 실수이옵니다.”
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저 방에 다시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이다.
“정원에라도 가서 이야기하시겠어요, 경.”
“그러지요.”
앙투안은 손을 내미는 대신 몸을 물려 앤의 두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자비관을 나선 앤은 본관을 빙 돌아 후원으로 향했다. 이블린의 후원은 길을 잃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드넓었다. 꽃과 벽과 수풀과 나무 등을 적절히 섞어놓아 답답하지는 않지만 곳곳에 으슥한 구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적당한 곳에 도착한 앤은 뒤돌아섰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늘 아침 고하려 했사옵니다.”
밤새 잠을 설치다가 실토를 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설마 그 때 세르가 같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약속을 취소했던 그가 왜 새벽에 자비관 침실에 있었는지.
“다만 전하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심기를 더 불편하시게 할 수 없어서.”
아롈이 아픈 건 오늘 오후부터였지만 앤은 거짓말을 했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말이 잘렸다. 앤은 앙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어렸다. 앤과 동갑일까. 기껏해야 세 살 이상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선 굵은 얼굴 구석에는 여드름이 두어 개. 파란 눈은 아주 진지했다.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경께서 아실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만.”
친분도 없는 일개 기사가 대체 왜 마담 라 세르의 일에 관심을 갖는가. 이유는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그랬구나.
앤은 이유 모를 실망감을 감추고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전하께서 쾌유하시면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렐르.”
소녀는 갑자기 쓰러지듯 잠들었다. 세시안은 떨어지는 머리를 받치고 어깨를 안았다. 금발 위에 얹혀 있던 흰 베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자요?”
대답은 없었다. 어쩐지 급히 마신다 했다. 북쪽 사람들이 독주를 잘 마신다는 속설은 남쪽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소녀는 딱 한 잔 마시자마자 목부터 귀까지 달아올랐다. 소녀는 얼굴이 붉어져도 정신은 멀쩡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지, 가끔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답을 늦게 내놓았다.
세시안은 평온한 숨결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추슬러 소녀를 안아들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축 늘어진 몸은 물을 빨아들인 솜인형처럼 무거웠다. 미셸이나 앙투안처럼 오랜 시간 검을 배우고, 지금도 체력단련을 하는 남자들과 달리, 세시안은 제대로 된 운동을 언제 해봤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더군다나 혼자 열심히 수다를 떠느라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곱게 침대 위에 아내를 내려놓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팔을 두드렸다. 다행히도 여자를 안은 채 자빠지는 추한 꼴만은 면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옷은 조이는 곳이 없어 편해 보이니 갈아입힐 것은 없고-옷에 굉장히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해서, 보자마자 옷에 대해 말할 생각은 접었다-, 머리도 느슨하게 땋아서 괜찮을 듯하다.
확인을 끝낸 세시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도 발간 눈가를 만져보았다. 보자마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여자가 우는 건 질색이다. 그래도 여동생들이 우는 건 괜찮았다. 가서 울린 놈을 한 대 쥐어박아주고, 서로 울렸다면 손을 잡고 화해시키면 되니까. 그러나 이 조용한 아가씨가 자신 때문에 우는 건 무섭기까지 하다.
사실 아내의 시녀로부터 신부를 울린 게 부황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의관의 일에 여자가 감히 참견하지 말라는 것. 보르디 대공가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얌전히 애를 갖고 낳는 데에나 열중하라는 것, 시어머니인 황후에게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굴라는 것.
아마 이 정도겠지. 모후였다면 다소 알아내기 까다로웠겠지만 부황이라면 뻔하다.
그리고 세시안으로서는 부황의 의지에 반해 신부의 편을 들어줄 의향이 충분했다.
보르디와 나바르의 세력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고, 필요 이상으로 강해진 오를레앙, 오베르뉴, 부르고뉴를 견제해야 한다. 보르디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바르는 현 대공이 오를 때까지 골육상쟁의 바람이 불어 한창 성장하는 기세에 올라타질 못했다.
물론 그런 정치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 어린 아가씨가 잘못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쓰렸다. 어제는 창틀에 앉아있더니 오늘은 눈물, 내일은 독일지 누가 아는가. 싫다. 우는 것도 싫고, 슬퍼하는 것도 싫고, 풀죽어 있는 것도 싫다.
잘 살던 새를 잡아와 새장 속에 넣어놓고 울어보라고 하는 인간의 이기심일는지는 몰라도, 웃어줬으면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면 앞에서든 뒤에서든 해달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어딘가를 잘못 건드렸다. 입술은 핏기가 가셔 창백해졌고, 화를 내는 얼굴에는 모욕감마저 어려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설명하고 사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간 또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어린 소녀답잖게 항상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눈을 깜빡거리고는 입술을 깨문다. 할 말을 다 못 하면 병이 나는 성격인 여동생들에게 익숙해진 그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술이 좀 들어가면 분위기가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패했다. 생각 이상으로 방어벽이 단단했다. 찌르면 들어가는 곳이 많아 허술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꼭꼭 숨기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결혼한 지 보름이 넘었는데 세시안은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들고 온 꽃다발이 무색하게도, 리젤로트가 꽂아둔 듯한 튤립에 대해 얘기했을 때 소녀는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꽃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 때야 세시안은 신부가 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 방만 봐도 무지(無知)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값비싼 아마포로 천개를 두른 침대며 화사한 상아색의 비단 벽지 등은 모두 리젤로트의 취향이다. 주인의 흔적이라곤 전혀 묻어 있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역대의 마담 라 세르가 살아온 방은 아직 새 주인을 받아들이지 못 했다.
사실 취향은커녕 외적인 것도 잘 알지는 못한다.
북쪽의 황녀이고-세시안은 흔히 로렌의 귀족들이 그렇듯 북쪽의 작위에 무지했다-, 보르디 대공의 생질이다. 코시카 제1계승권자였으나, 어머니에게 밀려나 세시안에게 시집왔다.
나이는 열여섯 살, 머리카락은 옅은 레몬색이고 홍채는 녹색 눈이 강가의 조약돌처럼 널려있는 남쪽에서도 보기 어려운 연둣빛. 아주 어리고 아주 예쁘다.
새 사람이 들어오면 어지간히 입담을 찧어대는 이블린에서도 그녀의 외모에 입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침묵이야말로 최고의 찬사였다.
가끔 악몽을 꾸고, 잠을 깊게 자는 법이 없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주 예민하고, 먼저 나서서 원하는 바를 얘기하는 바가 별로 없는 소녀.
세시안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그는 흰 손을 잡아 올려 입술을 눌렀다.
사실 다그치고 싶었다. 어떻게든 해줄 테니 말해달라고, 당신이 나서서 부탁을 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나면 이야기해달라고 여유 있는 척 웃어넘기면서도 조급한 기색을 비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주량을 넘겼나보다. 취했다.
세시안은 옷을 그대로 걸친 채 누웠다. 침대가 크게 흔들렸지만, 신부는 어지간히 취했는지 눈을 뜨지 않았다.
눈꺼풀 속에 감춰진 눈, 그 눈이 한순간 무너졌을 때야말로 고비였다.
한 번만 더 부추기면 이야기해줄 것 같은데. 이미 머리끝까지 술기운이 올라 물어보는 것마다 술술 불어버릴 것 같은데.
기다리자. 참자. 아직 시간은 많다. 애칭을 불러도 그냥 넘어갔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결국 서두르게 된다. 어제 창가에 서 있던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쳤다.
그는 신부를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몸은 따스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