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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14)


 “전하. 저 역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용건을 지금 말씀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예. 그래요.”

손바닥에 내려앉은 딱지가 터졌다. 아롈은 누가 가슴을 훑어 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또박또박 말했다.

“사흘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글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세시안은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실례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무얼 말하는 거지요?”

“제가 그만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 동안 무슨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롈은 취중에 마법을 쓰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지만-마법을 쓴 다음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병신. 바보. 멍청이. 천치.

더 완벽하게 보이지는 못 할망정 계속 실수만 한다. 시아버지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달달 떨지만 말고 조금 더 똑똑하게 대처했더라면. 당당하게 내가 잘못한 게 무언데 그리 핍박하느냐 허리를 폈더라면.

아니, 대드는 건 멍청한 짓이긴 해도 왜 고개를 숙이고 그런 대우를 참기만 했단 말인가.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그 자리에서 배운 것조차 모두 잊어버렸는지. 조부와 그리 다를 것도 없었는데.

계집애가 무슨. 시집이나 가라.

당파 싸움에는 끼어들지 말고 애나 낳아라.

요는 똑같지 않은가.

필리프가 알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 그는 아롈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다못해 못 알아들은 척 생글생글 웃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토록 멍청하게 무너져 질질 짜서는 안 됐다.

그리고 술을 그렇게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런 자책을 되뇌며 기억을 뒤지는데도 단 한 조각의 기억, 단 한 마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실례되는 말씀을.”

문득 남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덜컥 아랫배가 떨렸다.

“기억이 안 나는군요?”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곡을 찔렸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술 마셔본 적 별로 없지요?”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술병 때문에 고생했겠네요. 사실 꾀병인 줄 알았습니다만 오늘 보니 저야말로 실례되는 생각을 했군요.”

수치심에 턱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같은 일이 없을 겁니다.”

고개를 들어보자 웃음은 그 색이 바뀌어 있었다. 유쾌함에서 난감함으로.

“다시 말하지만 부적절한 일은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랬다고 해도 부부 간에 사석에서 일어난 일. 고개 숙일 이유가 있을까요.”

그는 대화를 한 박자 쉬려는 듯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굳이 마음이 편해지고 싶다면, 앞으로 술을 무리하게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를 하면 호되게 질책을 받는 게 당연하다. 아니면 뒤에서 무슨 말이 돌든 각오하든가. 그러니 항상 빳빳하게 긴장하고 조심하며 살아왔다. 실수를 할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책하며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채찍질했다.

목에 아픈 응어리가 올라왔다. 괜찮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웃거나 화내는 게 편하다.

​“​맹​세​하​겠​습​니​다​.​”​

“예, 그걸로 됐습니다.”

응어리를 넘기려 아픈 목으로 찻물을 삼키고 파이를 잘라 먹었다. 버터와 설탕이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양해가 더 달았다. 입맛이 썼다.

 

세시안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자기 몫의 파이를 한 입 먹었다. 평소 먹는 것보다 훨씬 달았다. 자신의 평소 취향은 무시하고 손님의 취향에 맞춰 다과를 내오라고 미리 일렀기 때문이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점만은 열여섯답다고 해야 할까.

파이를 오물거리는 옆얼굴에 얼핏 우울함이 스쳤다. ​튀​일​(​t​u​i​l​e​)​처​럼​ 얇은 그 감정은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금빛 속눈썹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여섯 명의 여동생과 함께 자라 소녀들의 심리에는 도통했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열두 살 연하의 어린 신부는 대하기가 어려웠다.

하나를 알았다 싶으면 모르는 점이 열 개도 넘게 드러난다.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일까. 흔히들 북쪽 사람들이 더 무뚝뚝하다고 하니까.

음식을 삼킨 그는 몸에 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용건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다다음 달에 대회의가 있다는 건 알고 있나요?”
“예.”

이런 점이 특히 까다롭다. 여성에게 바치는 온갖 미사여구를 앉은 자리에서 뽑아낼 수 있는 친우만큼은 아니라도 한두 마디만 덧붙여준다면 얼마든지 대화를 끌어낼 수 있을 텐데. 예, 아니오는 덧붙일 말을 찾기 힘들었다.

“그럼 대회의가 열리는 열흘 동안 밤마다 연회가 열리는 것도 아나요?”

“아뇨. 처음 듣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지만 알다시피 모후께서는 오랜 병환으로 거동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모후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발 때문에 절뚝거리는 걸음은 언제나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살이 찐 다음에는 그 몸매도 항상 구설수에 올랐다.

“리젤로트나 오를레앙 대공비가 지금껏 도와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둘 다 여의치 않을 것 같군요.”

이모는 약혼식을 준비한다며 오를레앙으로 돌아가 버렸고, 여동생은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의 소중한 친우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뭔가 일을 꾸미는 듯했다. 사흘 전 새벽 취해서 잠들어버린 아내를 침대에 남겨두고 자비관을 나서면서 역시 같은 건물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오는 미셸과 마주쳤다. 근 삼십 년 가까이 쌓아온 우정만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장갑이라도 던졌겠지만-사실 장갑을 던진 뒤 ​대​리​인​(​C​h​a​m​p​i​o​n​)​을​ 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세시안은 이를 악물고 친구를 못 본 체 했다.

“저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어렵더군요. 그래서 겨우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을 불렀습니다.”

이틀 내내 밤을 지새웠다. 결국 쓰러져 여덟 시간 내내 자고 일어난 그는 깔끔히 포기했다. 낯선 연회 준비와 회의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 낯설고 힘들 테지만 도와주겠어요?”

손을 감싸 쥐자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연둣빛 눈이 가늘어졌다.

“폐하께서는 알고 계시는 일입니까.”

꼭 이 정도로만 솔직한 얼굴을 보여준다면 한결 대하기 편할 텐데. 소녀는 당장 승낙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볼이 발개진 것도 모르고 짐짓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께서 편찮으십니다. 그리고 아렐르는 제 아내로서 그 다음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요. 굳이 허락받아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던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세시안은 소녀가 처음으로 보이는 생기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꽃병에 꽂아놓은 절화처럼 시들어갈 미래밖에 보이지 않더니, 지금은 좀 사람 같았다. 뺨이 홀쭉해졌어도 눈에 결의가 차니 한결 나았다. 더없이 보기 좋다. 아, 물론 살이 좀 오르면 더 좋을 테고.

그는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P.S. 주 3회 연재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주말 내에 한 편 더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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