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 (7)
한참을 미적거리다가 비밀장소를 나섰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들어올 때에는 어둑하던 세상이 나오니 눈부시기만 했다. 공기가 달라진 것처럼. 아롈은 사탕을 입에 넣은 어린 아이처럼 들뜬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이만큼이나 같이 있었고, 또 자기 전까지 한참이나 같이 있을 수 있다.
잠들기가 아까워서 어쩌지. 왜 사람은 잠을 자야만 하는 걸까. 늦게 자자고 하면 이상할까.
그러나 도서관을 나서자마자 그 고민은 다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세시안의 시종 셋이 무슨 죄인이라도 연행하듯 문 앞에 기다리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황제께서 행차하셔서 집무실에 버티고 앉아계신다 했다.
남편은 아롈의 이마에 입 맞추고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는, 시종 한 명에게 아롈의 에스코트를 맡기고, 다른 한 명에게는 짐을 들라고 시키고 나머지 한 명만을 데리고 정의관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아롈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시종에게 손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자비관에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이 수없이 뒤엉켰다.
방금 보낸 시간은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던가. 회의까지 앞으로 한 달 가량 남았다.
아롈은 코시카에서 조부의 대리를 맡으면서 종종 밤을 샜다. 물론 남편은 어렸던 아롈의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일을 봐왔지만 능숙함이 있는 일정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오늘 일을 제외하더라도 남편이 아롈에게 할애하는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무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점점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는 비율이 늘어났다. 하지만 아롈은 ‘바쁘신데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사양의 말 따위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같이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것뿐인가?
“물러가겠습니다.”
시종들은 짐과 아롈을 침실에 모셔다놓고 돌아갔다. 아롈은 치장도 풀지 않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풍성하게 보이겠다고 인두로 정성스레 지져 구불거리게 만들고 다시 땋는 터무니없는 짓을 해가며 올린 머리카락이 뒤통수를 무겁게 잡아당겼다.
아롈은 집요하게 자신을 파헤친 결과를 한숨으로 뿜어냈다.
왜 바쁜 것을 모른 척 했을까. 시간을 내주는 게 좋았으니까.
왜 좋았을까. 남편이 자신을 위해 그만큼을 희생해주는 것에는 그에게 있어 아롈은 무게가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은 가볍고 선택은 무겁다. 아롈 스스로는 말을 꽤나 무겁게 여겼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과 같은 무게로 말을 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르가 그토록 많은 말로 아롈을 예뻐했지만 결국 그는 나탈리야와 도망쳤다. 나탈리야가 더 중요했으니.
예쁘다는 말은 들으면 기쁘고 두근거렸지만 결국 그 뿐. 마음이 없어도 내뱉을 수 있는 것.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바쁜 사람이 아롈에게 할애하는 그 시간이, 늦으면 정의관에서 자도 괜찮을 것을 꼬박꼬박 자비관에 와 아롈의 옆에서 눈을 붙이는 행동이, 아롈에게 희망을 심었다. 자신은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단순히 아이 때문이라면 관계를 가질 때에만 오면 된다. 하지만 남편은 아롈이 월경 중일 때도 같이 잠들었고, 관계를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같은 마음이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아롈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평생을 통해 보아왔다. 자신을 향하는 상냥한 눈을 볼 때마다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알 수 있었다. 남편에게는 자신 같은 열기도,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는 몰라도 그가 아롈을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좋아서. 아직 그 이유 모를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만족감이 차올라서.
그래서.
아롈은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이로 뜯어냈다. 제법 커다란 살점이 뜯겨 나왔다. 피비린내가 났다.
철없이 굴었구나. 그의 친절에 기대서 어리광을 피웠다. 겉으로는 마냥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속으로는 간교하게 웃고 있었던가.
-늦게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아직 열이 덜 떨어졌으니까 오늘은 일찍 자고 있어요. 알았지요?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똑. 똑. 똑.
앤이었다. 어차피 머리는 풀어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아롈은 고개를 젖힌 그대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들어와라.”
“전하.”
앤의 목소리에서 바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아롈은 순식간에 연애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우고, 자신의 멍청한 선택에 후회를 금치 못했다.
그 때는 그만큼 살고 싶었다. 그래서 타협했다.
“깨어났느냐.”
“예. 하온데 다시 잠드셨습니다.”
“뭐라고 지껄이더냐.”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물의 비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씀만 하셨을 뿐이옵니다. 그리고 다시 잠드셨사옵니다.”
그야 맹물을 타놓았으니까. 손가락을 끊어서라도 피를 탔어야 했는데. 어디서 숨어사는 마법사라도 수소문한 다음 계약시켜서 식민지로 보내버리든가 해야 할까. 마법의 피는 고귀한 것이지만 알렉산드르 같은 별종이 태고 때부터 하나 둘일 리는 없다. 필리프에게라도 부탁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갑자기 왜 잠들었냐고 물어보았느냐?”
“송구하옵니다. 소녀의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하여…….”
멍청한 것. 욱하고 치밀었지만 입 밖으로 뱉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은 있었다. 진심도 아니었다. 앤이 아니면 벨타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필리프도 미셸도 아롈이 벨타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모른다. 앤이 없었고 용이 변덕스레 잠들지만 않았더라면 아롈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다니고 남편과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앤은 벨타가 아니더라도 쓸모 있는 시녀였다. 그래도 피가 이어져 있는 탓일까. 무언가를 시키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시녀는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앤 정도였다.
다른 시녀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입을 무겁게 간수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아롈의 취향을 파악해서 섬세한 시중을 들었다. 위세를 입고 까부는 법도 없었다.
아롈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앤에게는 이런 고지식하고 정중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앤이 루이 앙투안, 멘 공작과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이 돌아도 믿지 않았다.
어제 심부름을 다녀온 앤이 나가자마자 시녀 하나가, 정원에서 앤이 밀회 중이더라고 동무와 대화를 하는 척 말을 흘렸다. 아롈은 듣고도 모른 척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앤. 너를 믿는다.”
눈이 커졌다.
“너 아니면 내가 믿고 벨타를 맡길 사람이 없다.”
“전하.”
“주변에 무슨 일이 있든 신경 쓰지 말고, 삼 년만 책임지고 맡아라. 그 후에는 내가 직접 좋은 혼처를 알아봐주겠다.”
조혼 풍습이 남아있는 북쪽에서는 열여덟이면 혼인 적령기고 스물 둘이면 노처녀 소리를 듣지만 이 남쪽에서 스물둘이면 그리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세시안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크리스틴은 제쳐두고라도 미네트조차 지금까지 약혼자가 없었다.
“알겠느냐.”
연애를 하면 사람이 변한다. 그리고 어느 곳으로 튈지 모른다. 지금껏 봐온 것은 그런 감정뿐이었다. 아롈은 클라리 경 운운할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확실한 것도 아닌데.
앤은 착실하게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이리 와서 머리를 좀 풀어다오. 슬슬 아프구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