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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8. 열 (9)


     

세시안은 서류에 서명을 휘갈기곤 펜을 내던지듯 놓았다. 눈에 모래알이 들어간 듯 뻑뻑했다. 손목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팠다. 약 세 시간 전에 하인들이 와서 샹들리에를 내려 양초를 가는 동안 잠시 취한 휴식이 마지막이었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걸러 배에서는 소리마저 났다.

“끝나셨습니까?”

“아뇨, 아직 한참 남았……, 헉.”

무심결에 대답하던 그는 소스라쳐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미모의 금빛 머리 소녀가 응접실의 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곧던 머리가 물결쳐 한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그가 놀라자 그녀도 따라 놀란 듯 연둣빛 눈이 동그랬다.

“어떻게 여기에?”

아롈은 막 입에 머금은 홍차를 꼴깍 삼키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폐가 되었다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롈은 찻잔을 소리 없이 단정하게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세시안은 리젤로트가 단련시킨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서류를 덮어놓고는 신부에게 다가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대체 언제 들어온 건가요?”

앞으로 장난은 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다 아팠다. 아롈은 팔을 뻗어 탁자에 올려놓은 회중시계를 확인해보고는 대답했다.

“한 시간 반 정도 되었습니다.”

“한 시간 반이요?”

“예.”

시간은 새벽 세 시를 넘어 네 시로 향하고 있었다.

“시녀는 데리고 왔나요?”

“혼자 왔습니다만.”

“호위라든가?”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아, 언제 왔다고 했지요?”

“전하.”

소녀는 미간을 문질렀다.

“피곤하신 듯합니다.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장시간의 집중에서 풀려난 머리는 희뿌옇게 멍한 상태였다. 그런 그의 눈에 아롈이 먹고 있던 다과가 들어왔다.

“이거, 제가 먹어도 될까요?”

“예.”

그는 손수 빈 잔에 차를 따라 들이키고는 접시에 놓여있는 큼지막한 슈 아 라 크렘(Chou à la crème)을 순식간에 두 개나 먹어치웠다. 바삭한 껍질 안에는 식힌 크렘 ​앙​글​레​즈​(​C​r​è​m​e​ ​a​n​g​l​a​i​s​e​)​가​ 가득 차 있어 혀가 굳을 정도로 달았지만 아랑곳 않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한 시간 반. 혼자 왔다고 했지.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렸겠군요.”

“아닙니다.”

찻주전자는 거의 비어있었다. 처음에 가득 타 왔을 테니 적어도 네 잔은 마셨을 텐데, 소녀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늦은 시간에 여자가 혼자 다니면 안 되지요. 위험하잖아요.”

“근위병이 있잖습니까.”

“특별히 위험하지 않더라도 조심해야지요.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습니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과연 열은 없었다. 뺨에 키스한 그는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그래도 기다리지 말고 불렀어야지요.”

“집중하시는 듯하여.”

어쩔 수 없었다. 새로 떨어진 일이 어마어마했으니.

황제는 갑자기 상비군 육군 충원에 대한 안건을 상정하라고 명령했다. 말이 충원이지 확장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상비군인 중앙 기사단 제 1기사단은 코시카의 옐레나 여제가 빌려간 상태였으나 곧 돌려줄 예정이었다.

갑자기 코시카 쪽 상황이 변했다고는 말했지만 세시안은 이미 웬만한 기밀 사항에 모두 접근이 가능한 위치였다. 특별히 그 쪽에서 빌려간 군대를 돌려보내지 않고 쥐고 있어야 하는 정황은 감지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 설명을 요구하는 세시안에게 부황은 굉장한 말을 내뱉었다.

왜. 계집애와 놀아주느라 시간이 없느냐?

굉장한 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하겠다고 말했다. 저녁도 굶고 서류를 전부 새로 작성하면서 짬짬이 쌓인 일도 처리했다. 그런데도 할 일은 아직 산더미였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뭔가요?”

그 때 그는 어린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비관에 안전하게 데려다준 다음 빨리 다시 일을 할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손등에 입술을 대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롈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보고 싶었다는 말 따위가 나오리라고 예상하며 몇 가지 적당한 답변을 준비했다.

이 소녀가 그에게 반해있다는 것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손끝이며 눈빛은 감출 수 없었다. 일견 차갑게 보이는 열여섯 소녀가 그의 말이며 행동 하나에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는 것은 귀엽고 재미있었다.

“무리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려 왔습니다.”

마냥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분주하신 것을 압니다. 굳이 제게 신경을 쓰시는 것보다 일에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소녀는 눈을 내리깔거나 딴청을 피우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토라져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세시안은 웃으며 한 번 찔러보았다.

“어지간히 제가 귀찮았던 모양이군요? 이 새벽에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오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녀는 얼굴을 붉히리라는 예상과 달리 여전히 서늘한 얼굴이었다. 차분하게 또박또박 단어를 골라 말했다.

“지금까지 전하의 호의에 기대 어리광을 피웠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가슴 어딘가를 푹 찔린 기분이었다. 엊그제 자신의 일을 빼앗지 말라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때와도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방심한 탓인지 한층 인상이 강렬했다.

“언제까지나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부디 전하의 상황을 우선하여 주십시오.”

세시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가냘픈 몸이 잠시 움찔했지만 얌전히 안겨왔다. 이런 면 때문에 그는 신부를 꽤나 수동적인 소녀라고 여겼다. 대부분 파악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잘 달래 돌려보낼 궁리를 한 것은 까맣게 잊고 생글생글 웃었다. 머릿속이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글쎄요, 아렐르라면 얼마든지 어리광을 피워도 괜찮은데요.”

“오늘 시간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글쎄요, 확실히 요즘 바쁘긴 합니다만.”

어깨가 살짝 굳었다.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고, 제법 잘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빛을 비춘 것처럼 훤하게 보였다. 역시 약간은 아쉬운 거겠지. 세시안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세를 방패삼아 소리 없이 웃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정의관에서 자고 가겠어요?”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데려다줄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말했듯이 조금 바빠서. 지금 맡길 사람도 없고요.”

당연히도 거짓말이었다. 데려다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고 그가 직접 데려다줘도 된다. 하지만 지금 다른 사람의 손에 보내는 것은 싫었다. 그저 침실 앞까지 데려다줄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꺼림칙했다. 세시안은 풍성하게 물결치는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단단하고 작은 두개골이 잡혔다.

“혼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건 핑계랍니다. 제가 아침에도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 몸이 들썩거린다. 귀가 밝은 분홍빛을 띠었다.

세시안은 서류 생각을 한구석으로 치워놓았다. 어찌나 재밌는지 피로가 가신 듯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오 초만 종이를 들여다보아도 착각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푹 자고난 아침처럼 생기가 돌았다.

상비군 충원 따위. 정 하고 싶으시면 직접 하시라지. 이만큼 했으면 그는 충분히 노력했다. 해 뜨는 즉시 대회의가 열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양위해주실 것도 아니잖은가.

“이런 옷을 입고 잠들 수는 없습니다.”

“잠옷이라면 제 침실에도 아마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이 시간에 시녀들을 깨워서 여기로 불러올 수는 없잖습니까.”

“상관없지 않나요? 정 뭐하면 제가 벗겨줄까요?”

핑계를 하나하나 깨부수자 막다른 길로 몰린 소녀는 한참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반항하다가 끝내 항복했다.

“그럼 데려다줄게요.”

그는 짓궂게 웃으며 신부와 정의관 침실에 들어섰다.

커튼을 걷어놓아 새파란 달빛이 쏟아졌다. 그의 취향대로 침실 역시 장식 없이 차분한 분위기였다. 침대에 천개 따위는 없었고 술병을 모아놓은 장식장과 간이 책장, 간단한 필기구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롈을 이 방에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고, 이 침실의 주인인 세시안에게도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술병 걸린 걸 숨기고 낑낑거릴 때가 이 침실에서 잠든 마지막이었던가.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는 소녀를 침대에 앉히고 촛대를 내려놓았다.

가운(gown)의 프릴을 들추고, 잘 감춰놓은 끈을 잡아당기자 스토마커의 삼각형 꼭짓점 중 하나가 분리되며 축 처졌다. 차례차례 끈을 풀자 옷과 스토마커의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나왔다.

소매를 당겨 가운을 벗기자 날씬한 허리와 가슴을 감싼 스테이가 드러났다. 꽉꽉 조인 끈을 풀어 스테이도 떼어냈고, 스커트, 페티코트며 파니에도 벗기자 남은 것은 ​슈​미​즈​(​c​h​e​m​i​s​e​)​ 뿐이었다.

동그란 어깨를 가리는 것은 가느다란 끈 뿐, 매끈한 팔도, 가슴도, 가는 허리도 훤히 드러났다. 그는 쇄골이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몸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시안은 타고나길 여인의 미모에 불감(不感)했다. 이목구비의 단정함이나 풍만한 곡선에 감탄할지언정 욕정하지 않았다. 명인의 그림이나 빛나는 세공품을 보고 남근을 세우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을 무렵, 한창 발정이 난 수사슴처럼 끙끙거리는 친우를 보며 느긋하게 '예쁜 여자가 그렇게 좋아?'라고 물었을 때 미셸은 아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를 보면 당연히 안고 싶지.

-그런가?

-붉은 입술에 키스도 하고 싶고, 말랑밀랑한 가슴도 만지고 싶고, 그러면 바르르 떠는 것도 보고 싶고, 끌어안고 넣고 싶고, 그 안에…….

-잘 모르겠는데. 입술이나 가슴은 굳이 미인이 아니라도 다 있잖아.

-그러니까 네 눈이 쓸모없는 거지. 주님께서 눈을 잘못 다셨다니까.

지금 잘 다듬어진 상태와 비교하면 그 시절 미셸의 입담에는 거침이 없었다. 세시안은 음담패설에 가까운 친구의 말을 적당히 끊었다. 아직 리젤로트와 약혼을 하지 않았던 미셸은 한창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두 번째 약혼녀와 막 파혼했던 세시안은 당시 루이 오귀스트 황제가 건강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일할 것도 없이 한가롭게 연회를 돌며 친구와 노닥였다.

-와, 굉장한데.

미셸은 마침 한창 인기를 끌던 고급 창부의 가슴골을 보고 거의 침을 흘렸지만 세시안은 딱히 그녀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를 타박하는 것으로 웃어 넘겼다.

-넌 ​코​드​피​스​(​c​o​d​p​i​e​c​e​)​ 있던 시대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바지 터질 것 같아.

그로부터 십 년 가까이 지났다. 미셸은 변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탁자에 내려놓은 촛불 아래 드러난 미모는 분명 대단했다. 둔감한 그조차 문득 문득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하지만 온 이블린이 인정하는 정교한 미모와 날씬한 몸은 그에게 예술품을 보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성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낮에 없던 목걸이가 반짝 빛을 냈다. 세시안은 지난 낮의 충동을 그대로 끌어와 쇄골 위에 입술을 댔다. 기대하던 그대로 긴장하던 몸이 작은 새처럼 파드득 떨렸다.

“저, 전하……?”

단정하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하실 일이 아직 많다고…….”

“하지만 피곤해보이니까 쉬라고 한 건 아렐르였잖아요.”

“쉬는 게 아니잖습니까.”

“쉬는 건데요?”

설마 그가 침실에서 옷만 갈아입힌 다음 곱게 눕혀놓고 다시 가서 일이나 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했으면서?

그는 한 팔로 어깨를 안고 침대에 같이 쓰러졌다. 그는 남은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예뻐요.”

세시안은 만일 그녀가 대놓고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며 억지를 써도 아무 지적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람에게 상냥한 천성이나 아내에게 잘 해주리라는 결심을 제하더라도, 여성이 부탁하면 남성으로서 웃으며 받아주는 것이 응당 당연하다고 교육받아왔다.

그런데 까마득히 어린 소녀가 엄격함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어리광을 피웠노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시간을 양보하겠노라 말하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을 그대로 표본으로 만들어 핀을 박아 박제해놓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 대신.

“안고 싶어요.”

욕심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싶었다. 지금 어쩔 줄 몰라 뻐끔거리는 연분홍빛 입술에 키스하고, 아담한 가슴을 주무르고, 비밀스러운 모습들을 잔뜩 보고, 안에 들어가 욕망을 풀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세시안은 스스로를 성적(性的)으로 담백한 남자라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욕망에 휩싸여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은 드물었다.

“안 돼요?”

마지막 자제력을 닥닥 긁어모은 질문이었다. 제발. 입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졌다.

온 몸이 붉어진 소녀는 머뭇머뭇 목에 팔을 둘렀다.

그는 그것을 신호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해방된 욕망이 거칠게 날뛰었다.


두 편 나눌까 하다가 끊을 부분이 애매해서 한 편에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코멘트 덕분에 제가 여름 눈송이를 쓴 지 만 2년하고도 3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아라 기준) 오랜 기간 사랑해주셨음에도 아직 완결을 못 내서 부끄럽습니다. 올해 안으로 꼭 완결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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