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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


 둥그런 모양의 대리석에 새겨진 것은 젊은 여자의 옆얼굴이었다.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처녀였다. 미네트는 ​카​메​오​(​C​a​m​e​o​)​가​ 달린 리본을 손목에 고쳐 묶었다.

시녀를 몇 명 두지 않는 까다로운 모후의 시중을 쭉 들어온 덕분에, 미네트는 시녀의 시중을 받지 않고도 불편함 없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러니까, 시녀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건지도 모르지.

곁방의 문을 열고 나오자 황후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미네트는 어머니가 걷어찬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황후는 한 번 잠들면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미네트 역시 어린 시절에는 다른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렇듯 어머니가 허풍쟁이라고 생각했다. 꿈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이야? 보여 달라고 말해도 그녀는 ‘한 번 그런 꿈을 꾸면 내가 너무 힘드니까’라며 거절했다. 리젤로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언니인 크리스틴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언니. 큰언니. 있잖아요. 어마마마가 마녀예요?

-얘는 바쁜데 찾아와서 웬 헛소리를 하고 있어? 쟈네트! 얘 좀 데리고 나가! 대체 어린애들이 왜 멋대로 돌아다니는 거야? 선생은 뭘 하고!

미네트는 분명 말렸다. 가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거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갔다가 큰언니에게 내쫓긴 리젤로트는 다른 언니들을 찾아갔지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는 마리안느 언니와 마고 언니도 살아있을 무렵이었다. 마담 안 마리와 마담 마르그리트 루이즈도 쌍둥이였는데, 연년생인 그녀들은 웃으며 몰려다녔다. 터울이 있는 여동생들에게는 과자를 쥐어주고 달래서 내보내는 것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의 딸은 마담 르와이얄을 비롯해서 여섯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미네트와 리젤로트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네트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리젤로트는 전혀 모르는 듯 과자를 들고 예쁨 받았다며 활짝 웃곤 했다.

리젤로트는 미네트의 말은 조금도 듣지 않고 정의관으로 내달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여쭤볼 게 있어요!

-사랑스러운 리즈. 미안하지만 내가 좀 피곤하구나. 다른 사람에게 묻겠니?

그 때 오라비인 세시안이 왜 피곤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카가 태어나기 전이었던가, 아니면 후였던가. 아무튼 그는 꽤 귀찮았을 텐데도 상냥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리젤로트를 달래 돌려보냈다.

마지막 보루에게까지 거절당한 리젤로트는 훌쩍훌쩍 울었다.

-너무해. 언니들 다 미워. 오라버니도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말했잖아. 다 바쁘다니까. 그리고 어마마마 말씀은 순 거짓말이야. 마녀가 어떻게 황후가 돼?

-왜 안 돼?

-마녀면 화형 당해. 멍청아. 어마마마께서 황후가 되신 건 오를레앙 대공녀셔서 그런 거야.

-나보고 멍청이라고 하지 마, 이 바보야!

몇 번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리젤로트와 미네트는 수녀원에 가서 일 년 조금 넘게 머물렀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미네트는 어머니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미네트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심지어 리젤로트조차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너는 내 딸이니까. 꿈에서 보고 있었단다.

그 때였다. 감동이 다 썩어문드러진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삶이 묶여버린 건.

“안녕히 주무세요. 다녀올 테니.”

미네트는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방문을 살며시 닫으며 방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지만 만날 사람이 있었다.

자비관 복도는 치장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시녀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미네트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대계단으로 향했다. 간만에 걸친 화려한 가운에 달린 옷소매가 물고기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대부분의 시녀들이 미네트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지만 머리를 늘어뜨린 어린 시녀 하나가 미네트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미네트는 그 아이를 불러 세웠다.

“거기 빨간 머리.”

“예?”

바빠 죽겠는데 누구냐는 듯이 그 소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미네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네?”

잠시 후 그 소녀의 수수한 흙빛 눈이 젖어들었다. 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겨우 아버지가 누구냐, 어머니가 누구냐, 사실 대답 안 해도 괜찮다, 딸자식 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어느 가문인지 그 격도 알 만하다, 딱 네 마디였다.

“이봐요. 울지 말아요. 누가 보면 내가 죄 없는 당신을 핍박한 줄 알겠어요.”

“죄송……해요.”

눈물이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그렁그렁 차올라 분칠한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참 애처롭게도 운다. 사내들이라면 끌어안고 울지 말라고 달래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미네트는 여인이었다.

“말 뿐인가요? 대체 어느 집안인지 물었다고 그렇게 우는 게 말이 되는 거예요? 당장 그치지 못 하겠어요?”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처음부터 잘못을 안 하면 될 텐데. 멍청하긴. 주변 사람들은 미네트의 허락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아, 이래놓고 소문은 또 미네트 혼자 잘못한 것으로 퍼질 것이다. 그래놓고 성격이 나쁘네, 앞에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입방아를 찧겠지.

“참 편하겠어요.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싫은 소리 들었다고 눈물이나 글썽이면 다른 사람은 다 불쌍하다고 생각해주겠지요. 핍박당했다고 편들어주고 토닥여주고, 그러다보면 누가 처음에 실수했는지는 잊고 저 사람이 너무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을 거잖아요? 그렇죠?”

미네트는 아예 무릎까지 꿇고 우는 시녀를 남겨두고 돌아섰다. 억누르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 울라고 달래는 목소리도 섞였다. 미네트는 한숨을 삼키며 자비관을 나섰다.

대회의의 첫 날을 알리는 해가 뜨고 있었다.

 

걱정의 빛깔은 초록, 금색, 갈색, 혹은 검정. 손이 습관처럼 뺨으로 올라오다가, 공들여 분칠을 한 것을 알고 팔뚝으로 내려갔다.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요.”

아롈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오늘 괜찮겠어요?

폭신한 침대에 누운 채 그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걱정해주는구나 싶어 행복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을 씻고, 장미유를 바르고, 긴 머리를 뚝딱뚝딱 땋아 올리는 도중 파티션 너머에서 다시 물어봤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물론 꽃이 시들지는 않았는지, 손님 명단에 맞게 좌석이 준비되어 있는지, 손님들의 자리에 (필리프가) 손수 쓴 카드가 제대로 배치되어 있는지, 혹여 이름의 철자가 틀리지는 않았는지 백 번도 넘게 확인하는 와중에 들려온 물음 때문에 잠시 넋이 나가기는 했지만.

아프다고 안 나갈 거라면, 뭐하러 이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고작 심적 충격 때문에 며칠 동안 지속되던 고열은 거동할 수 있을 정도까지 떨어졌다. 남편은 기어코 시의를 불러왔지만 별 문제가 없다는 소리만을 들었다. 당연했다. 문제는 죽음이었으니. 체력이 떨어지고 살이 빠져 꽉 조이게 맞춘 옷소매에 자리가 남았다.

“걱정 마십시오.”

팔짱을 끼자, 손목에 묶은 리본이 팔랑였다. 자색 리본에는 엘레나 여제의 옆얼굴이 새겨진 마노 카메오가 달려 있었다. 유행하는 가운과 손목의 리본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부모의 얼굴이 새겨진 장신구를 패용하는 것이 대회의의 관례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남편은 영 마음에 걸리는 표정으로 아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역시 목에 루이 오귀스트 황제가 새겨진 카메오를 매달고, 대단히 공들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롈은 그 조각의 뻥 뚫린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의 홀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준비해놓은 연주가 터지고, 미리 사열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세르, 그리고 마담 라 세르께서 드십니다!”

이렇게 줄을 서 있는 순서조차 정해져 있는 것이 로렌이었다. 그리고 그 순서를 짜서 초대장에 명시하는 것은 당연히 아롈이었다. 아롈은 초대장에 친필로 순서를 적다가 한 번 밀려쓰는 바람에 통째로 초대장을 재작성해야 하는 시련을 겪었고, 그 놈의 전통을 박살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어떻게든 잘 해냈다는 사실에 잠시 뿌듯함을 느꼈다.

자비관과 정의관을 잇는 거울의 홀은 호화로운 공간이었다. 뒷면에 수은을 바른 판유리를 양 벽과 천장에 붙여놓아 한없이 공간이 뻗어있는 듯 보였다.

바닥은 두 가지 색깔의 대리석으로 무늬를 만들었고, 천장에는 금테와 크리스탈로 만든 샹들리에를 달았다. 크리스탈이 촛불 빛을 한껏 반사하고, 다시 거울이 그 빛을 반사했다. 온 사방에 빛이 있는 듯했다. 촛불을 너무 많이 켜놓아 회장의 공기는 뜨겁고 건조했다. 숙녀들이 춤을 추다가 열사병에 걸린다는 말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아롈은 샹들리에를 흘끗 보고 양초를 제대로 사두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양초는 오래 보관이 가능한 물건이라 충분히 주문했고, 세 시간에 한 번씩 초를 갈도록 순번표를 작성해서 넘겼으니 괜찮을 것이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남편이 말했다. 아롈은 그가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마음껏 즐기라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세시안은 시종이 써준 그 원고를 아롈의 옆에서 열심히 외워 듣지 않아도 다음 말을 알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한 일을 복기했다.

한 송이 장미를 지키기 위하여. 미남왕 앙리와 그 친우들은-.

만찬은 완벽했다. 물론 소소한 시비는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당연힌 절차와 같은 것이다. 아렐은 필리프가 평가라도 하듯 지켜보는 앞에서 단 한 마디의 실수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오는 공격을 전부 받아쳤다. 어휘를 찾느라 머뭇거리지 않았다. 예상되는 이야기를 종이에 쓰고 달달 외운 덕이었다.

언제나 전통은 소중한 것이며-.

마음을 많이 추스른 듯 리젤로트도 나왔다. 미셸이 파혼 후 결혼할 상대가 필리프의 딸인 보르디의 소피라는 사실을 알고 편을 들어줄 수 없어 미안했던 아롈은 가슴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저는-.

아롈은 움찔했다. 정 ‘나는’을 쓰시지 못 하겠다면 ‘이 몸은’을 쓰시라고 했건만 기어코 실수했다.

미네트는 아롈의 걱정과 달리 묵묵히 음식만을 넘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크리스틴은 생색을 내기에 바빴다. 아롈이 갑작스러운 고열에 누워있는 동안 마무리를 도와준 것은 그녀였다. 공격성만 보이지 않는다면 충분히 감사해줄 의향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롈은 남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김없이 말을 마쳤다.

“감사를 표합니다.”

박수 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초고가 다 떨어져서 초고 쌓느라 당분간 쉴 예정입니다. 원래 쌓아놓은 초고가 있었는데 전개가 달라져서 못 쓸 것 같네요. 열 챕터의 대부분을 초고 없이 달렸는데 너무 힘들더군요.

개강까지 초고 5~6만자는 쌓아놔야 안정적으로 완결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결정했습니다. 2학기도 학업으로 바쁠 예정이라 올해 안에 연재를 끝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챕터까지 초고 쌓고 돌아오겠습니다. 삼천세계에는 초고 연재를 따로 하고 있습니다.

P.S.2. 기분전환 겸 '겨울 싹'이라는 새로운 소설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보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여름 눈송이 TS 외전에서 발전한 이야기로, 코시카 황제 옐렌 파블로비치와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 루이즈 세바스티엔이 정략결혼하는 로판입니다. 여름 눈송이와 달리 최대한 가벼운 분위기로 짧게 쓰려고 하고, 겨울 싹은 여름 눈송이와 완전히 분리돼서 단독으로 움직이는 이야기입니다만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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