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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3)


 “하으응.”

로제트, 작은 장미라는 이름은 창녀들이 흔하게 쓰는 가명이었다. 정의관 황제의 침실에서 허덕이며 절정을 연기하는 창녀 역시 그런 흔해빠진 이름이었다.

거울의 홀에도 그녀의 동료인 창녀들이 돌아다니며 단골손님을 물고, 새로운 손님을 찾아 헤엄치고 있었다. 정의관 구석구석에서 창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실의 격식 있는 연회에서도 창녀들은 짝 없는 사내들의 팔짱을 끼고 곧잘 들어왔다. 당장 현재 황제의 공식 정부조차도 귀족의 딸이 아닌 사창가 출신이어서 ‘공식 정부’가 되기에는 너무 신분이 천하지 않느냐는 빈축을 샀다.

“아아아앙.”

애교 넘치는 교성을 내지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창녀는 침실에 안겨 황제와 사랑을 속삭이기는커녕 채 다리 사이의 흰 거품이 마르기도 전에 침실에서 쫓겨났다.

정사를 마친 로렌의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잠시 누워 있다가, 알몸을 일으켜 잠옷을 걸쳤다. 그의 나이도 쉰보다는 예순에 가까웠다. 얼굴에는 고랑이 파이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조금씩 발을 뻗었다. 가죽 밑으로 곰처럼 두둑한 지방이 들어찼는데도 늘어진 뱃가죽을 숨길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신이 늙지 않았다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왕성한 성욕을 보였다.

파정의 쾌락으로 붉게 물든 얼굴과 달리 그의 눈은 선명한 총기를 띠었다. 그는 손수 황후의 문장으로 봉한 봉투를 집어 페이퍼 나이프로 봉인을 뜯었다. 칼 손잡이에는 자잘한 사파이어가 모여 장미 문양을 이루었다. 봉투처럼 삐뚤빼뚤한 글자가 가득 종이를 메우고 있었다.

황제는 우선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문자열을 눈이 빠지게 읽으며 le premier régiment, ordre de centrale d'une la ​c​h​e​v​a​l​e​r​i​e​(​중​앙​ 기사단 제1 연대)를 의미하는 PROCC라는 문자열을 찾아 헤맸다. 기실 띄어쓰기나 구두점이 없는 문자열에서 그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결국 촛불을 가까이 대고 비춰본 끝에야 원하는 문자열을 찾아냈다. PROCC 다음에는 NE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이는 neuf의 준말으로서 9를 의미했다.

그리고 9는 역대기에 나오는 ‘아홉째 달 아홉째 지휘관은 베냐민 자손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이니 그의 반에 이만 사천 명이요’라는 구절을 의미했다. 따라서 암호의 키는 ​아​비​에​셀​(​A​b​i​e​z​e​r​)​이​었​다​.​

암호를 알아낸 황제는 종이를 한 장 꺼내 해독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a부터 z까지를 가로축에 쓰고, 세로축에는 ABIEZER를 썼다. 그리고 A와 a가 교차하는 칸에 A 다음의 알파벳인 b, c, d, e부터 z, a까지를 차례대로 써넣고, 2열에는 B 다음의 알파벳인 c, d, e, f, 마지막 7행에는 s, t, u, v, w, x, y, z, a b, c를 써서 채워 넣었다.

사실 1부터 9까지 정해진 암호의 키는 아홉 가지밖에 되지 않으므로, 미리 해독표를 만들어놓을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는 군주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루이 오귀스트는 군용 암호의 해독표를 만들어놓을 만큼 혼몽한 군주는 아니었다.

이러한 글자의 순환 치환 방식은 키만 알고 있으면 적용되며, 무엇보다 글자의 빈도수만을 가지고 암호를 해독할 수 없다는 지극한 장점이 있어 모든 나라에서 애용되었다. 단 키가 어떤 방법으로든 누설되면 치명적이므로, 나라마다 고유의 방법으로 단어를 통으로 치환하거나 외국어를 섞어 쓰거나, 시작 부분을 바꾸는 등의 방법을 섞어서 쓰곤 했다. 그렇다면 해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암호는 작성에도 해독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쉽게 사용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많은 소국의 국가들이 글자를 희한한 기호로 치환하는 단순한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암호해석표를 다 만든 루이 오귀스트는 끈기 있게 새 종이를 꺼내 암호를 해독하여 한 글자 한 글자 적기 시작했다. 초의 길이가 반 이상 짧아졌을 때에야 작업이 끝났다.

중앙기사단 제1 보병 연대장의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에는 바로 오늘 아침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코시카와 렌 사이에는 최소 두 달 간의 거리가 존재했으므로 루이 오귀스트 황제가 이 보고서를 받아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꿈에서 다른 사람을 훔쳐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보고서를 그대로 베껴서 가져오는 기적’이 있지 않는다면야.

마르그리트 안 황후는 군용 암호를 몰랐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이 문자열이 아무런 규칙도 없이 무작위로 섞어놓은 글자로 보일 터였으므로,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가끔 섞인 오자는 그녀에 대한 신뢰감을 돋웠다.

군용 암호는 기본적으로 모든 미사여구를 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해석본은 간단했다.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제와 대공의 신병은 폐하의 손에 있습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
“전하.”

발걸음이 빨랐다. 아롈은 굽 높은 구두를 신은 데다 허리를 졸라맨지라 숨이 차서 따라가기 벅찼다. 남편은 거의 아롈을 잡아끌다시피 걷고 있었다. 거울의 홀 주변은 일부러 샹들리에를 끄고 촛불을 배치했기 때문에 으슥한 분위기가 났다. 밝은 곳에 있을 때만 해도 호선을 그리던 입술은 어둑한 곳으로 들어오자마자 깨진 돌의 모서리처럼 딱딱했다.

아롈은 얼마 안 되는 숨을 쥐어짜 소리쳤다.

“전하!”

그제야 걸음이 멎었다. 아롈은 헐떡였다. 어깨가 들썩였다.

“미안합니다. 너무 빨랐나요?”
“예.”

세시안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자비관 휴게실이 어디였지요?”

거울의 홀은 휴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벽이 전부 거울이라 열었다 닫았다 했다간 금세 깨질까 우려되어서였을까. 아니면 유리가 무거워서일까. 그러므로 아롈은 소피와 쥬스티느의 경험담에 따라 정의관과 자비관의 1층 홀들을 치우고 휴게실로 꾸며놓았다.

“평화의 홀입니다.

물론 이 배치에도 골머리를 썩였는데, 체스말을 이리 저리 옮겨보며 동선을 생각했다. 평화의 홀은 자비관에 있는 가장 작은 홀로, 전쟁의 홀과 대응되는 공간이었는데 겨우 열에서 열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 평소에는 외국 사절과의 티타임 정도에나 쓰였다. 아롈은 평화의 홀을 황실 가족 전용으로 공지해놓았으므로, 홀은 텅 비어있었다.

리젤로트나, 미네트나, 크리스틴도 없었다.

아롈은 미리 준비해 둔 자신을 찬양하며 탁자에 올려둔 물을 손수 따라 마셨다. 아직 서늘한 냉기가 남아있는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드디어 살 것 같았다.

“전하.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

같이 목을 축이던 세시안이 의이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휴게를 핑계대신 것 아닙니까.”

아직 춤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부부가, 것도 주최자 부부가 함께 발을 빼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은 이 남쪽에서 나고 자란 남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이라면 몰라도.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을 잡아 입술을 댔다. 서늘하고 축축했다.

“아뇨, 정말 쉬고 싶어서요. 물론 오래는 못 쉬겠지만.”

“전하. 혹시 저 때문이라면, 열은 많이 내려 괜찮습니다만.”

“다행이네요. 하지만 제가 지쳤는걸요.”

세시안은 아롈의 팔을 자연스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아직 미열이 남아있었고,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눈을 감고 긴장을 풀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듯했다.

하지만 아롈은 아직 정의관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으므로, 독수리 앞의 뱀처럼 바싹 몸을 긴장시켰다. 정의관은 그렇다 치자. 여긴 절대 안 된다. 연둣빛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이런 저런 요상한 생각에 젖어있는데, 아주 깊은 한숨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올해는 유독 피곤하군요.”

“전하, 심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양초가 탁탁거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아롈은 턱을 어깨에 편안히 괴고,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자제한 채로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세시안이 물었다.

“왜 피로한지 안 궁금한가요?”

“궁금합니다.”

“그런데 안 물어보네요?”

“제가 여쭤보아도 되는 일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있는 법이고, 그 사람이 부하나 아랫사람이 아니라 남편인 바에야 입을 강제로 벌려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 나라의 후계자,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세시안은 짧게 웃었다.

“부디 물어봐주겠어요?”

“왜 지치셨습니까?”

“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질려서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저 군용 암호는 현대에서 비즈네르 사이퍼라고 불리는데,아롈이 도서관에서 세시안의 쪽지에 적용해보았던 그 암호 치환법입니다. 19세기 중후반에 해독법이 나올 때까지 이 비즈네르 사이퍼는 인기 있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여겨졌다는군요.

글자 사이에 키코드를 섞는 것은 제 창작입니다만, 현실에서도 있을 법 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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