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0)
평화의 홀은 의외로 버글거렸다. 아롈을 발견한 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향냄새가 풍겼다. 아롈은 예의에 한 치 어긋남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피곤한 몸은 익숙잖은 외국의 향내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금방이라도 구역질 할 것 같았다.
“일어나렴.”
“가장 신실하신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롈은 치맛자락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앉은 이들의 면면은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 부르고뉴 대공비인 마담 오거스틴, 마담 리젤로트 마담 미네트, 전 부르고뉴 대공비, 오를레앙 대공비 루이즈 안 등이었으므로 전하 꼬리표가 달려있지 않은 아롈의 시녀들은 뒤에 시립했다.
아까는 머리카락을 그저 풀어헤치고 있던 리젤로트는 어느 새 갈색 머리를 정교하게 지져서 반은 땋아 리본으로 묶고, 반은 늘어뜨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저렇게 손질할 시간이 있었을까. 옷도 갈아입은 모양인지 아까는 하늘색이었건만 지금은 분홍색이었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찾았으니까 네가 여기 있는 거 아니겠니.”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온다. 아롈은 그 말투가 미네트와 판박이임을 느끼고 한숨을 삼켰다.
이번이 황후와의 제대로 된 대면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후는 아롈이 나올 만한 곳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바깥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옷은 생각보다 수수했는데, 색이 피부색과 어울리지 않아 얼굴이 거무튀튀해 보였다. 그녀의 조카인 미셸이 노란색 옷을 입었을 때에도 심각하다고 생각했지만-그 미모가 시커멓게 가려보였다- 황후도 노란색이 어울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문병도 거절하시고 와병 중이시라 하여 심려가 컸습니다만, 이토록 쾌차하신 것을 보니 기쁩니다.”
예전에 소피는 황후의 병은 발가락에 있다고 빈정거렸다. 아롈은 조금 더 날카로운 함의를 섞을까 하다가 참고, 면피하는 말을 섞는 것에 만족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자리에서 아롈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모여 성서를 읽다보니 갑자기 옛 생각이 나지 무어니. 그래서 불렀단다.”
옛 생각은 무슨. 그리고 남편이고 아내고 왜 이렇게 성서를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연회 중에 웬 성서를 읽는지. 나중에 이본느나 소피에게 로렌의 전통적인 방법인지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 이쯤 되면 아롈이 함부르크에서 찾아갔을 때 필리프가 성서를 들먹거리지 않은 것은 당장 가진 성서가 없어서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무슨 구절을 읽으셨습니까.”
“말하면 알겠니?”
“비록 소녀가 정교회에 귀의하던 몸이온지라 성교회의 신앙의 깊이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많사오나.”
기실 아롈은 툭하면 주님의 은혜니 성령을 들먹이는 남쪽 사람들에 비하면 신앙심이 부족한 편이었다. 황족으로서의 의무로 성무에 빠진 적은 없었으나 그게 전부, 고해 성사나 개인적인 기도 따위에 기대지 않았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 애쓰고는 있사옵니다.”
“어머나. 코시카에서도 우리랑 똑같은 성서를 쓴단 말인가요?”
오거스틴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아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오거스틴.”
“코시카 정교회에서도 성서를 같이 쓴다니 신기하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반목하였던 걸까요. 같은 주님의 자식인걸요.”
교황이 정교회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코시카 및 코시카를 섬기는 북부 국가들이 교황의 세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주님의 자식 운운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 아닌가. 같은 성교회 신자끼리도 마녀 사냥이랍시고 마법사를 잡아다 죽이고, 것도 모자라 멀쩡한 여인들을 화형 시킨 일이 고작 삼백 년 남짓 된 일이니.
아롈은 웃으며 성교회와 정교회의 차이점을 한두 가지 설명했다. 황후가 손짓을 해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일에 눈치 없는 딸이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그럼 어디 읽어보지 않겠니? 표시를 해두었단다.”
미네트가 직접 일어나려 했지만 아롈은 손짓해서 시녀들을 시켰다. 아롈의 시녀가 성서를 받아다가 아롈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롈은 성서의 표시 부분을 펼쳤다. 에제키엘, 아니 에스겔 서였다. 아롈은 예언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딱 한 번 읽고 치웠다.
이 부분은. 아롈은 눈으로 먼저 훑고 고개를 들어 황후를 보았다. 황후의 갈색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알고’ 있는 눈이었다. 황제가 아롈에게 한 일을.
아롈은 앤을 단속했다. 아롈이 울고 분 것은 알아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앤과 황제밖에는 없을 터였다. 사이가 소원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조차 미주알고주알 말할 정도는 되는 건가.
“옛 말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잠깐. 왜 페란토로 먼저 읽지 않는 거니?”
황후가 페란토를 읽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며, 그리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 남쪽 여인들의 대부분은 페란토를 하지 못했다. 필수 교양도 아니었으며,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그녀들이 외교용 언어를 익힐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틀리게 읽어도 알아차리지도 못 할 텐데도. 아롈은 칼 같은 웃음을 삼키며 매끄럽게 읽어 내려갔다.
“ecce omnis qui dicit vulgo proverbium in te adsumet illud dicens sicut mater ita et filia eius filia matris tuae es tu quae proiecit virum suum et filios suos et soror sororum tuarum tu quae proiecerunt viros suos et filios.”
발음은 틀린 곳이 없을 터였다. 페란토야말로 이 대륙에서 공식적으로 외교에 가장 널리 사용하는 언어였고, 외교 문서는 페란토 한 부, 양 나라의 언어 한 부씩 해서 세 부를 작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연하게도 군주는 페란토를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것을 모국어나 다름없이 할 수 있어야 했다.
마침표가 없는데도 흐름에 말리지 않고 문장을 정확한 부분에서 끊을 수 있었다. 아롈은 표시해둔 부분 조금 전까지 읽고는 웃지도 않고 물었다. 뽐낼 것도 없이 여상한 일이었다.
“다음도 읽을까요?”
표시는 절 단위로 되어 있었는데, 이 절에서 문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고 다음 절로 이어지기에 묻는 것이었다. 황후의 기대를 충족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울거나 토하거나 덜덜 떨 수는 없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오거스틴이 박수를 쳤다.
“올케는 참 페란토가 능숙하군요. 저는 오라버니께서 배우시는 걸 따라배우다가 너무 어려워서 그만 어렸을 때 포기했답니다. 호호호호.”
마지못해 박수들이 터져 나왔다. 어색한 웃음들, 달갑잖은 칭찬들. 리젤로트만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굉장해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쳤다. 아까는 그렇게 허둥댔으면서. 무슨 일일까.
“과찬이십니다.”
그럴 리가. 발음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아 혀를 칼로 찍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이었는데. 발음 연습을 하다가 혀를 대차게 깨물어서 울상 지었던 적은 또 얼마고.
조부의 어깨 너머로 익혔다 운운하는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랬다가는 곁에서 일을 돕다 익힌 페란토보다 못 하다고 오거스틴을 무시하는 말이 된다.
황후는 입술을 깨물고는 부채를 흔들었다.
“뜻도 말해보렴.”
“옛 말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쉬운 단어로만 이루어진 절이었기 때문에 단어를 찾으려 고심할 것도 없었다. ‘속담’이 갈리아 어로 무엇인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옛 말로 바꾸어 말했다.
황후의 눈이 무시무시한 빛을 발했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이 그러하다. 좋은 이야기로구나.”
심각할 정도로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공격이었다. 최소한 황제가 고른 구절은 아롈이 감히 무슨 뜻이냐고 따질 수도 없고, 만일 체면이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따진다 해도 발을 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간 긴장한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기껏 기세등등하게 여러 사람들을 부르고 준비해서 벌인 일이 이 정도인가.
“예. 여기 폐하의 네 분 따님이 함께 모여 앉아계신데, 하나 같이 폐하의 덕을 본받아 뛰어나시니 새 자매(sœur, 올케-시누 사이에도 쓰는 말)로서 흔감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렐르는 어머님과 많이 닮았나요? 저희 자매는 전부 이런 갈색 머리카락을 물려받았는데요. 아바마마의 흑발을 물려받으신 건 오라버니뿐이시랍니다.”
크리스틴이 빙긋 웃었다. 공격이 들어온다면 미네트일 줄 알았건만 저 쪽도 한 패인가. 오히려 미네트는 황후의 옆에 앉아 하늘빛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기대감 어린 눈으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을 좀 도와달라’던 남편의 부탁을 떠올렸다. 그간 자기 일만으로도 바빠 크리스틴을 반쯤 방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이제 도와줄 필요도 없을 듯했다. 훌륭하다. 말도 거의 더듬지 않았다.
어머니인 옐레나 여제가 여인들의 입에 올라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딸을 내치고, 아들을 젖히고 옥좌에 올랐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는 아마 그런 의미겠지. 남편의 침대에 칼을 꽂는 것 아니냐 뭐 그런 이야기.
“금빛 머리와 녹안은 선대 보르디 대공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선대 보르디 대공은 곧 아롈의 외조부였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소리를 완곡하게 돌린 것이다.
“어머, 샤를루아 공작이나 로르쉘의 아가씨는 그런 옅은 금발이 아닌 걸요. 신기하네요.”
미네트가 웃었다. 아롈은 적당히 자신의 가계-옛날 아직 코시카가 세워지지 않았을 시절 반도 삼국과 통혼한 적이 있어 색소 부족증이 같이 내려왔더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며 시간을 벌었다.
황후가 칠면조처럼 소매를 떨치고 부채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우리 로렌에는 좋은 관례가 있잖니. 너도 알다시피 나와 네 어미 사이에는 여러 일이 있었지. 그리운 얼굴을 한 번 보자꾸나.”
손목의 카메오를 달라는 뜻이었다.
저급한 수지만 충분히 기분은 나쁠 것이다. 아롈은 미리 할 말을 짜내려 손목을 바라보았다. 어? 한순간 눈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