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2)
아롈은 녹초가 되어 자비관 4층에 올랐다. 대회의 내내 피곤했지만 황후 탓에 한결 피곤했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지 않았더라면 난간을 붙잡고 기어서 올라갈 뻔했다. 화장을 한 채 잠들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간신히 화장도 지우고 옷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히던 시녀들이 놀랐다. 팔뚝이며 골반에 크게 멍이 들었다. 누가 보면 맞고 다니는 줄 알 것이다. 발을 보니 구두를 오래 신은 탓에 엄지발톱도 시퍼렇게 물들어 발톱이 빠질 지경이었다.
아롈은 오늘 리젤로트-아니, 미네트와 부딪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시녀들의 입단속을 시키고(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들을 내보냈다.
치맛자락 아래로 엉망이 된 발을 손수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사실은, 배에 아이가 있어요. 미셸의 아이예요. 비밀이에요.
아롈은 그 소식을 들은 즉시 소피를 불렀어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필리프나 그 아들들 중 누구든 보르디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그 사실을 알려야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껏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는 대로 말해야겠다. 소피가 미셸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이 사실을 빌미로 미리 오를레앙과 협상해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있다면 얻어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공가 직계의 결혼은 다른 귀족 가문과는 다르게 맨 마지막 날에 처리 된다. 협상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미네트도 찾아가 봐야지. 왜 그랬을까. 황후와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면 합의되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끈질기게 찾아와서 종달새나 카나리아처럼 재잘대던 리젤로트와 달리 미네트와는 가끔 얼굴을 마주친 것이 전부, 친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해가면서 아롈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통증이 좀 가신 발을 내리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먼저 잘까 생각하고 있는데,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남편이었다.
“아렐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걸음이 불안했다.
“전하?”
아롈은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 달려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남편을 간신히 받쳤다. 술 냄새가 났다. 양조장 참나무통에서 목욕을 하고 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굉장했다.
“오늘은 아렐르가 먼저 안아주네요.”
세시안은 쿡쿡 웃었다. 그는 양팔을 벌려 아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턱을 아롈의 어깨에 괴고 체중을 실었다.
“이러면 무거워요?”
“버틸 만합니다.”
“정말요? 그럼 이건요?”
조금 더 무거워졌다. 아롈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게가 실리자 멍든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무겁습니다.”
“많이?”
“네. 많이 무겁습니다.”
“그렇군요. 미안해요.”
제 발로 땅을 딛고 선 세시안은 아롈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아롈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흐느적흐느적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뭐가 날 괴롭히나, 엄마, 들어줄래요. 아빠가 날 혼냈죠. 어른처럼 굴래요. 어른 되기 보다는 사탕 먹고 싶어요.
(Ah! Vous dirai-je Maman, Ce qui cause mon tourment, Papa veut que je raisonne Comme une grance personne. Moi je dis que les bonbons valent mieux que la raison.)
어린애 같은 단순한 가락의 동요였다.
“전하, 취하셨습니까?”
“으음. 제 때 발을 못 빼는 바람에 꽤 마시긴 했지만요. 티가 나나요?”
발음은 의외로 또렷했고 대화도 가능했지만 희한하게 행동이며 말투가 헐렁했다. 세시안은 아롈의 양 뺨에 입 맞추고는 다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헤픈 사람이긴 했지만 저런 느낌은 아니었다.
“예. 얼마나 드셨습니까?”
“글쎄요? 모르겠군요. 술을 세면서 마셔본 적이 없어서요.”
요즈음 낮에도 많이 보기는 했으나, 아롈에게 가장 익숙한 얼굴은 역시 밤의 남편이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데도 무섭지 않고 부드러운.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이어지는 얼굴의 한쪽 옆선이 희게 빛났다. 눈 안에 아롈이 두 개 들어있었다. 아롈은 찌푸린 자신과 마주보는 것이 싫어 희미하게 웃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한 번 볼래요?”
드디어 닿았다. 하지만 저 쪽에서는 가만히 있었다. 아롈은 서툴게 움직여보았다. 반응이 돌아왔다. 멈췄다. 저 쪽도 멈췄다. 해보라는 뜻인가.
받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주는 건 여전히 서툴렀다. 아롈은 남편을 흉내 내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노크하듯 혀로 축이자 살며시 열렸다.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다음에는 갈팡질팡했다. 미숙하게 움직이는 혀가 스스로도 답답했다.
어설프게 치열이며 점막을 훑고 다니다가, 혀를 물리고 입맞춤을 끝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지금까지 아롈이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남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술 맛이 났다. 적포도주의 떫은 맛, 백포도주의 쓴 맛, 참나무통에서 숙성했을 호박색 술. 하나하나 감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백만 가지 복잡한 향기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혀와 함께 영혼이 뽑힐 것 같은 키스가 겨우 끝났다. 아롈은 헐떡였다. 세시안은 얄밉게도 아롈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술 냄새 심한가요?”
“예…….”
세시안은 아롈을 놓아주고는 뒤로 물러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단순한 색인 코트와 대조적으로 화려한 조끼를 벗고, 크라바트를 풀었다. 처음 벗은 코트는 잘 추슬러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으면서, 다른 옷들은 점차 바닥에 허물처럼 던지기 시작했다. 점점 복장이 헐렁해지자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롈은 낯부끄러워 뒤로 돌아섰다.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포도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적, 백, 로제 할 것 없이 섞어 마시고, 브랜디에, 위스키에……. 아아, 아를랭 공작에게 잘못 걸렸어요. 신혼인데 술 한 잔 안 받느냐고 안주도 없이 먹이는데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요.”
“필리프의 큰아들 말씀이십니까?”
“네. 샤를루아 공자요.”
“얌전한 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를랭 공작은 아롈에게 당질이 되고, 소피의 오라비이니만큼 몇 번 얼굴을 보았는데, 이본느를 닮아 처진 눈에 견실한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절대 아니에요. 공작은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사람이 아니면 뭡니까.”
“술 부대(sac,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일컫는 속어)예요.”
아롈은 속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 마십시오.”
“정말이라니까요. 아, 제가 못 버틸 것 같아서 살금살금 도망 나올 때까지 그 사람은 멀쩡하게 술 더 가져오라고 술잔을 탁자에 탁탁 치고 있었다고요. 아렐르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주량까지 똑같은 게 아니에요.”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롈의 항의를 무시하고 웃었다.
“아렐르가 그 사람 눈에 안 띄어서 다행이에요. 대공가 공작이란 공작은 다 쓸어 와서 한 바퀴 돌았는데 나중에는 배가 불러서 못 마실 지경이었어요. 그 판에 끼었으면 아렐르는 한 달쯤은 기절해있었을걸요.”
“전하. 저는 그 정도로 술에 약하진 않습니다.”
“많이 약해요. 그러니까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술 마시지 말아요.”
“포도주나 브랜디 몇 잔 정도는…….”
“포도주면 몰라도 브랜디는 꿈도 꾸지 말아요. 전에 약속했잖아요?”
“예…….”
아롈은 할 말이 궁색해서 먼저 침대 쪽으로 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 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남편이 아롈의 손목을 잡았다.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남편이 아롈에게 닿을 때는 언제나 동작이 느렸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접촉에는 기겁하는 아롈도 놀라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팔이 어깨를 숄처럼 둘렀다.
“가지 마요.”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들추고, 입맞춤이 닿자 짜르르 소름이 올라왔다.
“응? 아무데도 가지 말고 저랑 있어요.”
아, 이건 다 화를 못 내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롈은 그 수작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롈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아, 알겠습니다.”
애초에 이 좁은 침실에서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롈은 순순히 안겼다. 세시안이 아롈을 뒤에서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둘은 어기적거리는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중간에 헐겁게 걸려있던 실내화가 벗겨져 한 쪽 발은 맨발이 되었지만 아롈은 가만히 남편에게 맞춰주었다.
침대에 기어 올라가는 일도 난관이었다. 그저 팔을 풀어주고 침대에 각자 오른 다음 다시 안으면 안 되는 걸까. 남편은 먼저 낑낑대며 올라간 다음 아롈을 끌어올렸다. 아롈은 남편이 멍 자국을 잘못 건드린 순간 비명을 참았다.
세시안은 등받이에 있는 베개에 등을 묻고는 아롈을 앞으로 안고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아, 좋네요.”
“전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만.”
적어도 이 사람은 아직 자기 누이동생이 혼외정사로 임신까지 한 것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네에. 피곤한 일이 하나 갑자기 떨어졌는데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아서요. 물론 좋은 일도 있었고요.”
피곤한 일이라는 건 아마 정치 쪽의 일일 것이다. 아롈은 그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실내화를 벗으려 허리를 숙였다. 오른발의 실내화는 걸려있어, 왼발만 맨발이었다. 하지만 팔이 가로막고 있어서 정도 이상으로 숙여지질 않았다.
아롈은 잠시 고민하다가 발끝에 속도를 걸어 허공을 걷어찼다. 천박한 짓이지만. 모피로 속을 덧대고 위에 용담을 수놓은 비단 실내화가 붕 뜨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홀가분하게 얇은 침의(chemise de nuit)만을 걸치게 된 아롈은 남편의 가슴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깔고 앉은 긴 머리를 가슴 앞으로 넘겨 정돈했다.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란.”
“글쎄요. 아렐르가 먼저 안아준 거?”
아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손가락이 기민하게 움직여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내렸다. 세시안은 뜨뜻한 입술로 아롈의 어깨선을 훑어 내려 잔머리를 치웠다.
“아렐르.”
“전 아롈입니다.”
“네. 아렐르.”
불퉁한 딴죽을 걸어봤지만 웃음과 이상한 발음만이 돌아왔다.
“오늘 제가 장난쳐서 화난 거, 아직 안 풀렸어요?”
아롈은 짧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예.”
“풀어주면 안 될까요?”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다면…….”
“그럴게요.”
“알겠습니다, 핫.”
약속이 떨어지자마자 귀를 물렸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전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럴 테니까요. 둘이 있을 때만 허락해줘요. 응?”
“읏.”
세시안이 팔을 뻗어 천개를 묶어놓은 끈을 내렸다. 아마포가 스르륵 내려오며 침대의 나머지 부분을 둘러쌌다. 다른 삼면은 아침에 천개를 걷지 않아 그대로였다. 희뿌연 천은 달빛을 머금어 새파랗게 빛났다. 흐르는 것은 물이나, 아마포뿐만이 아니었다. 침의의 앞섶을 여미고 있던, 아롈이 직접 매서 어설픈 모양새를 하고 있던 리본이 풀려나가며, 천이 어깨를 드러내며 고였다.
“응? 안 돼요?”
천개를 내리면 그 곳은 둘만의 공간. 은밀한 행위나 부끄러운 말이 아무리 터져 나와도 오직 둘만의 것. 그런 단단한 신뢰감이 있었다.
흰 살결에 대비되어 새카맣게까지 보이는 손이 동그랗고 아담한 가슴을 받쳐 올렸다. 아롈은 자신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남편의 애원과 부탁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갈 것임을 깨달았다.
그 다음은 이불이 사락거리는 소리, 옷을 발가락으로 차버리며 만들어진 주름, 기껏 좀 식었다 싶은 몸에 타오르는 듯한 열, 가냘픈 바람.
애원, 눈물, 땀, 신음, 쾌감, 떨림, 움직임, 물, 원망, 포옹…….
못 이기는 체 허락으로 끝이 맺어졌을 때에는 폭풍이 지나간 다음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핏속에 별의 부스러기가 흐르는 감촉이 버거워 숨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아렐르.”
“внат……?”
거의 잠꼬대에 가까운 신음이 튀어나갔다. 아롈이 여유가 없어질 때는 갈리아 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간파한 남편은 아롈이 모국어로 신음하며 매달릴 때마다 귀엽다며 반드시 뺨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며 소리 내어 웃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뺨이 눌렸다.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게 말해줘야 해요.”
“да…….”
“약속했어요.”
“да.”
“아무데도 안 가고 저랑 있는 것도.”
“да.”
“아렐르.”
겨우 잠들려고 하던 아롈은 희미하게 눈을 떠서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려 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그는 아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뺨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