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4)
대회의 여드레 째 아침, 아롈은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새벽 치장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대회의도 절반을 넘었다. 그 자질구레한 결혼이니 계승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끝나는 것이다.
의상과, 스토마커, 어울리는 장신구를 전부 골라 마지막으로 머리 모양만이 남았다. 그냥 땋아서 올리면 그만일 것을. 클레르 드 뤼시용이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세르께서는 어떤 머리 모양이 좋으신가요?”
남편은 항상 아롈보다 먼저 준비를 끝냈다. 보통 정의관에 먼저 돌아가거나, 여유가 있는 날에는 응접실에서 기다렸는데 오늘만은 침실에서 기다렸다.
오늘 당번을 맡은 아롈의 시녀들은 금세 들떠서는 ‘남성 분’께 여쭈어야 아는 법이라며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고 떠들어댔다. 옷을 고르는 것도, 장신구를 고르는 것도 쪼르르 달려가 ‘세르께서는 어떤 게 좋으세요?’라고 종알거렸다.
아롈은 차마 남편의 앞에서 시녀들에게 건방지다 버럭 화를 내지는 못 했다. 시녀들도 그걸 알고 있어 저러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얕보였던가, 속으로 한탄하며 아롈은 속으로 사람마다 실수한 일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대회의만 끝나면 나중에 경을 치리라 결심을 다졌다.
파티션 너머에서 책을 읽으며 아롈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어김없이 대답해주었다.
“틀어 올리는 게 좋겠지.”
“어머나, 어머나, 풀어 내리는 건 별로신가요?”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시녀들은 저들끼리 신나서 떠들며 머리를 땋았다.
이렇게나 긴 머리신데 어떻게 풀어헤치고 다니시나요. 반을 나눠 위는 땋아 올리고 나머지는 늘어뜨리면 되지 않아요? 인두로 지져도 화려하실 테고. 드물게도 곧은 머리칼이신데 지져서 늘어뜨리는 건 아깝지요. 마담 라 세르께선 결혼하신 분인데, 어떻게 대회의에 머리를 풀고 나가시나요. 반만이라도 땋으면 문제없답니다. 옛날 초상화들을 보면 지금처럼 꽉꽉 재미없게 틀어 올리고 다니지도 않았고요.
입씨름을 듣고 있으니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결국 간소하게 머리를 올리고, 장신구를 화려하게 달았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일일이 인두로 지져서 올리는 것은 삼갔다.
치장을 전부 마치고 아침을 차려놓은 시녀들은 날듯이 인사하고 사라졌다. 그녀들이 무리지은 철새처럼 떠나자 방 안은 금세 적요해졌다. 세시안이 읽던 책을 덮었다.
책의 제목이 아니라 저자의 이름이 크게 박힌 가죽 장정이었고, 양피지가 아니라 요즘 나온 펄프종이인 것으로 보아 요즘 책이었다.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모르는 이름을 가볍게 훑고는 아롈은 자리에 앉았다.
“아렐르의 시녀들은 항상 활기차군요.”
아롈은 먹던 빵을 삼키고 미간을 문지르려다가 참았다. 손에 기름이 묻어 있었다.
“거슬리셨다면, 앞으로 주의시키겠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오늘은 왠지 아렐르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 기다렸는데, 혹시 불편했나요?”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예전 같으면 ‘아니에요’가 아닌 ‘아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텐데. 거리를 재는 느낌 또한 사라졌다.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아롈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을 미리 알고 웃고 있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세시안은 아침에는 차 대신 우유를 마셨다. 데운 우유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막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레르헨펠트 양이 안 보이는군요?”
“신병(身病)으로 휴가를 청하기에 그리하라 했습니다.”
“요즘 여름 감기가 유행인 모양이로군요. 모후께서도 병환 중이시지요.”
그래서 아롈은 여태 미네트를 추궁하지 못했다. 그녀는 황후가 아니면 대회의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혹여 남편과 짜고 한 일이 아닐까 하여 은근슬쩍 카메오에 대해서 떠보았지만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일단 시녀를 시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놓았다.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내일까지는 일어나야 할 텐데요.”
“앤에게 하문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내일은 레르헨펠트 양이 대회의에 나가야 하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세시안의 얼굴이 오히려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아렐르. 모르고 있었나요? 작센 국왕으로부터-세시안은 작센 국왕을 자연스레 낮추어 불렀다- 외교 문서가 왔는데요. 레르헨펠트 양의 남편에게 레르헨펠트 백작위 승계를 인정하겠다는…….”
보통 세습 귀족들은 다스리는 지방의 이름과, 작위명과, 성이 제각각이었다. 지방의 명을 딴 옛 작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가문에게 물려지기도 하고, 작위가 합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등 변화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르헨펠트 백작위는 신생(新生) 작위라, 앤은 성과 작위명이 같았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작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여대공의 아들이었다. 앤은 그녀의 언니인 마리야 여대공의 손녀였고, 아롈은 그녀의 동생인 파블 1세의 딸이었다.
앤의 아버지가 앤보다 먼저 죽었고, 그는 외동아들이며 앤도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작센의 계승법에 의해 직계 남성 자손이 남아있지 않은 레르헨펠트 백작위가 작센 국왕에게 회수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필리프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아롈은 혼행길에 작센 궁정에 들러 앤의 백작녀 지위가 공고한 것을 확인하고, 단 한 대에 한해서 그녀의 남편에게 백작위를 승계해주겠다는 외교문서를 약속받았다. 지방의 작은 성 하나를 앤에게 주겠다고도 했다.
그는 작센의 상속법을 위반하는 일이어서 꽤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지만, 직전에 벌어진 루드비히, 왕제(王弟)인 작센 왕자의 난동으로 인하여 꽤 간단하게 허락받았다.
그 외교문서가 로렌에 도착했다는 것은 들은 바가 없었지만, 일처리 절차와 전령이 움직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몇 달 걸린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대회의에서 처리합니까?”
“레르헨펠트 양이 아렐르의 미뇽이라고 했으니까요. 아마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직접 나가서 승인은 받아야지요. 정 일어나기 어렵다면 샤를루아 공작에게 날짜를 미뤄 달라 말하겠습니다.”
황제가 도장을 찍고 끝나리라 생각했다. 앤이 국적이 로렌인 것도 아니니, 수리(受理)로 끝나는 것이 온당하다고.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급 적용됩니까?”
앤은 승인을 받지 않은 지금도 아롈의 수석시녀 지위를 맡고 있었다.
“소급이 되지 않으면 대회의를 일 년에 열두 번은 열어야 할 텐데 곤란하지 않을까요?”
간혹, 이렇게 사고방식의 차이가 드러나는 때가 있었다. 흙에 뿌리박은 나무와 물풀처럼 달랐다.
세상의 모든 일을 황제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행동하라, 다만 냉정해라)으로 알고 자란 아롈은 ‘가신’에 불과한 대공 따위가 황제와 동등한 표를 행사하는 대회의의 근간부터 이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롈은 무슨 말인지 더 생각하는 대신 대화를 끝냈다.
“알겠습니다. 공작에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