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5)
렌의 거리는 언제나 활기찼다. 흔히 북부 사람들은 냉랭하고 중부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서부 사람들은 교활하고 동부 사람들은 성급하며 남부 사람들은 방탕하다고들 한다.
방탕은 다소 악의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남부인들이 식도락을 즐기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렌 안에는 귀족뿐만이 아니라 평민(Tiers, 제3 계급)들도 들어갈 수 있는-물론 상당한 표 값을 감당해야 했지만- 좌석이 있는 극장과,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의 노천극장이 있었고, 광장에서도 항시 악사들의 공연이 열렸다. 적은 돈을 받고 술과 음식을 제공해주는 무도회장도 몇 개나 있었다. 물론 포도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보리나 귀리 등의 밀이 아닌 잡곡식으로 만든 밀주가 나왔고 음식도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밤마다 열리는 이런 무도회장에서는 은화 몇 닢만 내고 밤새 정열을 불태우며 춤을 추는 남녀들이 항상 그득했다.
물론 렌은 대도시였고, 성 안에 작은 집이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할 만한 여유가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었으며, 시골로 내려가면 다른 나라와 별로 다를 바 없이 빈곤하고 비참한 인생이 이어졌다.
로렌의 유흥 문화 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것이 바로 응접실(salon, 살롱)에서의 접대 문화였다. 자비관이며 정의관에 적을 두고 있는 ‘전하’ 신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침실 말고도 개인 용도의 응접실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 그곳에서 값비싼 차를 마시며 사교활동을 벌였다.
차(茶)도, 설탕도, 요즘 유행하고 있는 쇼콜라(chocolat, 초콜릿)도 대륙에서는 나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기후의 식민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수입품이었다. 요지마다 서식하여 상행위의 발달을 방해하고 있던 용이 모두 사라지고, 범선 항해의 발달로 식민지를 여럿 건설하게 되자 이제는 평민들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설탕을 먹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차와 설탕은 마셔본 사람보다 마셔보지 못 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정도로 비싼 음식이었다. 유통비가 많이 붙었고, 사치품이었으므로 세금도 만만찮았다.
이블린에 방을 받지는 못 했으나 귀족 연감 한 구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하여 렌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고, 응접실을 아주 크게 건설해놓고 손님을 초대했다.
그리고 좁은 집에 보란 듯한 응접실을 세우기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카페(café)가 존재했다. 운반하는 동안 부스러져 자루 아래에 고인 하등품 차와, 역시 보관 실수로 잘못 나온 하등품 커피를 파는 곳부터 법복 귀족들도 마실 법한 고급품을 파는 곳까지 종류가 다양했는데, 공통점은 음료를 한 번 시키고 앉으면 언제 일어나든 아무런 제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이런 카페는 신분은 낮으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명석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침을 튀기며 토론을 하는 장으로서의 기능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막 신분을 구입한 법복 귀족의 자제, 혹은 귀족은 아닌 지방 지주의 자식, 의사나 변호사, 학문의 길에 매진하는 학자 등이었다. 빈민굴의 거지와 자신이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돼지처럼 살이 찐 세습 귀족과 황족’을 비판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잔인한 말도 주저 없이 사용했다. 그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고발되었다가는 렌의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기 충분한 수위였다.
그들은 카드놀이를 하다가, 체스를 하다가, 구석에 앉아 새로 나온 책을 보다가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주저 없이 얼굴을 붉히며 토론을 했고, 배가 고프면 카페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입에 쑤셔 넣었다.
미적분학, 물리학, 생물학, 철학 기타 등등의 학문과 ‘창녀 출신의 공식 정부에 대한 조롱’이 한 자리에 위화감 없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카페는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오를레앙의 장 미셸 루이 프랑수아는 렌 제4 성당-어디까지나 정식 명칭으로서 평민들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모양을 따서 파란 날개 천사 성당이라고 부르는-옆 골목길에 있는 노천카페에 들어섰다. 마차도 말도 동반하지 않고 부츠에 오물을 묻히는 것을 감수한 움직임이었다.
남작 정도의 지방 영주라고 해도 이런 카페에, 그것도 도보로 들어서는 것은 체면을 깎아먹는 짓이었다. 하물며 오를레앙 대공가의 유일한 아들로서 리무쟁 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져 ‘전하(HGDH, Son Altesse grand-duc)'라고 호지칭 될 수 있는 그가 드나들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의 화려한 치장 대신 유복한 상인의 아들이 입을 법한 수수하고 질긴 옷을 걸친 미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 여기일세, 장!”
나이든 중년 남성이 팔을 들어올리며 그의 세례명 중 가장 첫 번째 이름을 불렀다. 미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안녕하십니까.”
미셸은 자신을 부른 중년 남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복을 벗고 외눈 안경을 조금 초라한 것으로 바꾸고, 앞에 두꺼운 책을 펼쳐놓는 단순한 변장만으로도 그는 꼬장꼬장한 학자처럼 보였다.
보르디의 필리프는 얼굴에 주름을 잡아 웃고는 그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미셸은 자리에 앉아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주문했다.
당일 치의 대회의가 막 끝난 나른한 오후, 렌의 이 작은 카페에 대공가 출신의 ‘공작’이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폭풍 같은 소동이 일 터였다. 그러나 ‘혹시 카페에 앉아있는 저 두 사람이 공작 전하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편집증적인 정신병자는 없었다. 또한 이블린에 자유롭게 출입할 정도의 권세 있는 귀족 중에서 말똥이 넘치는 거리를 걸어-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마차와 말이 다니는 거리에는 말똥이 쌓이기 마련이다- 이런 카페에 올 별종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오느라 고생했네. 정말 오랜만이로군. 결혼식에서 본 이후 처음인가.”
물론 오늘만 해도 대회의가 있는 센 궁에서 스쳐지나갔지만 그저 인사치레였다.
“하하하. 고생이랄 것까지도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오히려 젊어지셨습니다? 아귀힘이 보통이 아니신데요.”
로렌의 예법 상 미셸과 필리프는 ‘대공의 장자’로서 그 지위가 같았다. 그러나 각자의 가문 내에서 위상은 진흙과 구름만큼이나 달랐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는 이미 보르디 대공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미셸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아닐세, 아니야. 나 같이 할 일 없는 늙은이와 놀아주려고 이런 거리 구석까지 나오는 것은 바쁜 젊은이에게는 고역이겠지. 충분히 알고 있네.”
필리프는 미셸에게 의도적으로 편하게 말을 낮추고 있었다. 의례적인 날씨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끝날 때 즈음 미셸은 다소 급하게 말을 꺼냈다.
“리슬링(riseling) 씨. 요즈음…….”
“이야. 젊은이들은 과연 기력이 좋군. 음료도 나오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다니 말일세.”
입이 바짝 말랐다. 여성의 앞에서는 수백만 송이의 장미 같은 말들을 얼마든지 꺼낼 수 있는 미셸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연륜 있는 정치가 앞에서 그는 말을 할 때마다 가로막혔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카페의 주인이 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미셸은 당황했다.
“자네는 막 외국에서 와서 모르겠군. 여긴 선불일세.”
필리프가 웃으며 알려주었다. 미셸은 한층 당황하며 코트 안을 더듬었다. 지갑이 있을 리 없었다. 놀러 나오는 날이라면 작정하고 챙기지만 보통은 오를레앙 대공자이자 리무쟁 공작인 미셸이 ‘돈’을 들고 다닐 일이 없었다.
필리프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그를 지켜보다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서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는 주인에게 은화 세 개를 건네주었다.
“충분하겠지. 나머지는 가지게나.”
금세 미소를 띤 주인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미셸은 작게 입을 벌렸다. 대체 왜 은화 따위를 가지고 다니는 거지?
미셸 역시 십 대일 적에 친구인 세시안과 같이 작당하여 렌 시내에 놀러 다닌 적이 많았지만 기껏해야 무도회나 극장, 고급 상점 정도에 들르는 것이 전부였지 이런 ‘카페’에는 들를 일이 없었다. 태어나서 루아르 금화가 아닌 돈을 본 적조차 거의 없었다.
“내가 사지. 어서 들게.”
지독하게 썼다. 원래 커피라는 음료가 쓴 맛이 있지만, 시거나 구수한 풍미가 있기 마련인데 지독한 저급품 특유의 괴로운 맛이 올라왔다. 향도 형편없었다.
미셸은 간신히 뱉어내지 않고 삼켰다. 그의 매력적인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고 파르르 버텼다.
“허허. 자네를 보니 내 육촌 여동생이 생각나는군. 그 애가 올해 스물 한 살인데, 홍차에 항상 설탕을 두 스푼이나 탄다네.”
홍차에 설탕 두 스푼? 미셸은 반사적으로 그런 입맛을 지닌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 연인이 스물한 살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으며, 무심코 그녀의 가계도를 그려보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렇다. 아롈과 세시안은 육촌이었다. 왜냐하면 선황후인 칼레의 아델라이드의 여동생이 선대 보르디 대공비, 즉 옐레나 여제와 현 보르디 대공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현 보르디 대공의 아들인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와, 칼레의 아델라이드의 손녀인 리젤로트 역시 육촌이었다.
“내가 풍문에 듣자니 그 애가 이번에 임신을 했다는데……, 나이 많은 오라비로서 내가 걱정이 참 많다네. 허허허.”
미셸은 그 순간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촌부터 결혼할 수 있는 이 로렌에서 육촌은 같은 가문이 아닌 이상 친척 반열에도 들지 못했다. 오라비 어쩌고 하는 말들은 다 장식에 불과했다.
“홍차나 설탕이나 참 비싼 물건이지. 안 그래도 주님의 은총으로 얻은 새 아이를 품는 임신부가 먹고픈 주전부리도 여의(如意)하게 못 먹는다면 얼마나 서럽겠나. 아니 그런가?”
손이 떨렸다. 뒤에 앉아있는 청년들이 물색없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오페라에 대한 잡담 중이었다.
얼마 전 지방 영주가 시골 처녀를 겁탈하려고 하다가 골탕을 먹는 내용의 풍자 오페라가 극장에 올라왔다가 청년 계층의 열띤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집에 있는 낡은 예복을 손질해서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극을 보았고-그렇지 않으면 카페의 유행을 따라갈 수 없었으므로- 레퍼토리를 올린 극장은 연일 만석이었다.
미셸은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가수의 가슴에 대한 품평을 애써 한 귀로 흘렸다.
“샤를……리슬링 씨. 여동생에게 임신 선물로 과자라도 선물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그리 단 것을 좋아한다면.”
그 순간 미셸은 보르디 대공의 후계자를 샤를루아 공작이라고 정한 보르디 대공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감사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주변에는 훌륭하게도 ‘샤를 리슬링’이라는 이름으로 들렸으리라.
“허허허. 그 애는 아무래도 과자 한두 개보다는 자기가 설탕을 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걸 좋아하지 않겠나? 설탕 값이 좀 더 싸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는 모른 척 표면의 의도만을 받았다.
“글쎄요. 지금도 리슬링 씨의 여동생쯤 되시는 분께서 설마 설탕 한 조각 사 드실 돈이 없으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어딜 봐서 그렇게 부유해보이나? 나도 그렇게 부유한 집안이었다면 소원이 없겠네그려.”
얼마나 불쌍한 척하는 연기의 연기가 자연스러운지, 미셸은 하마터면 손가락질하며 ‘당신 보르디 대공가의 후계자잖아!’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친구이자 사촌인 세시안을 존경해버릴 것 같았다. 이런 여우들 사이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단 말인가.
그의 아버지가 저런 일을 한다고 알고 있었고, 그 역시 간단한 일은 맡아서 협상을 했으나 당장 ‘그의 아이’를 가지고 저렇게 들먹이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늙은이의 헛소리야. 허허. 아, 자네도 곧 결혼한다지?”
그 결혼 상대가 샤를루아 공작녀 소피가 될 지, 리젤로트가 될 지는 모두 눈앞의 남자가 파혼을 해주느냐에 따라 달렸다. 행동력 넘치는 어머니는 벌써 약혼에 대한 승인장을 대회의에 올려 통과시켰다.
미셸은 절대 리젤로트가 가진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거나 낙태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신앙심 깊은 교인이었고, 낙태는 성교회에서 정하는 죄악이었다. 낙태한 아이의 영혼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purgatorium)에서 떠돌게 된다는 믿음은 뿌리 깊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건 미리 주는 축하선물 셈 치세.”
“가, 감사합니다.”
미셸은 난데없이 품에서 불쑥 나온 얇은 책을 받아들고는 얼떨결에 감사인사를 표했다. 카페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학구열 넘치는 젊은이들은 황제의 칙명에 의한 ‘금서’를 돌려 읽곤 했다.
필리프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나, 어서 안 집어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