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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6)


     

아롈이 필리프에게 ‘앤의 백작녀 인정 안건을 늦추어 달라’라고 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대회의 여드레 째 날 오후, 아롈이 센 궁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어나 아롈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무사히 쾌차했다고 고했다.

“전하, 감히 하찮은 병을 연유로 시중을 소홀히 하여 감히 뵐 면목이 없나이다.

“일어나라.”

연회에 나가기 위해 다시 치장 중이던 아롈은 여전히 한 손으로는 알 수 없는 말을 끼적이고 있어, 손가락 끝에 보랏빛 잉크가 물들어 있었다. 손톱 밑에 들어간 잉크는 아무리 비누로 문질러도 잘 지지 않았다.

아롈은 그 오싹하게 고운 얼굴로 앤을 내려다보았다. 귓불에 진주와 루비로 만든 귀걸이가 달랑였다.

“얼굴이 해쓱하구나.”

그 새벽, 가장 처음 느낀 것은 격렬한 ​오​심​(​惡​心​)​이​었​다​.​ 앤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리고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누군가 뒤에서 벗은 등을 두드렸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술이 쓴 토사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뱃속에 든 것을 전부 게우고 나서도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편’ 특유의 이상행복감이 사라진 뒤였으므로, 앤은 그 부작용을 온전하게 누렸다. 동공이 점처럼 축소된 데다, 전신의 땀샘이 확장되어 온 몸이 식은땀과 불쾌한 액체로 젖어있었다. 음식물이 소화되지 않은 채 걸려 배 부분이 묵직했다.

구토를 하자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손발이 차가웠다.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앤은 그 때 비로소 아롈이 앤을 불러다가 손발을 주무르라 시켰던 이유를 몸으로 깨달았다.

고운 입술에 걸쭉한 타액이 늘어지던 감각이 생생하여, 앤은 문득 침을 삼켰다. 위액의 쓴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앤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송구하옵니다.”

“하녀들이 간병을 제대로 안 해주더냐? 하긴 천한 것들이 간병에 대해 무얼 알겠느냐마는.”

앤에게 시녀를 붙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아롈은 하녀 둘을 불러다가 앤의 간병을 하도록 시켰다. 대회의처럼 바쁜 시기에 인력을 빼는 것은 어마어마한 호의였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성​실​하​였​사​옵​니​다​.​”​

아롈은 앤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한참이나 일을 맡기려고 해도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오늘 시중은 들 것 없으니 내일 대회의 준비나 잘 하거라.”

대회의. 손이 잠시 떨렸다. 앤은 고개를 여러 번 숙여 감사하고는 자신의 방에 돌아갔고, 대회의 아흐레째인 다음 날 무사히 아롈의 ‘미뇽’으로서, 레르헨펠트 백작가문의 상속녀로서의 지위를 로렌에서도 인정받았다.

 

머리카락이 손에 감길 때마다 나른한 숨결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검은 고수머리는 잘 관리해서 윤이 흘렀다. 북쪽에도 흑발은 흔했지만, 남성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짧게 잘랐다. 한두 번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고도 남는 길이의 머리칼은 얌전히 모아 묶었다. 목덜미를 약간 넘기는 머리칼이 새 꼬리 같았다.

센 궁에서 앤의 백작녀 지위를 승인받는 것을 확인하고 자비관으로 돌아와 연회용으로 새로 단장을 마친 아롈은 가벼운 두통 때문에 시녀들을 내보내고 주워들은 회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다가, 자비관으로 찾아온 남편에게 붙들렸다.

아니, 이럴 때에는 붙잡았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에스코트 하러 왔다는 남편의 얼굴에는 상냥한 웃음이 빈틈없이 칠해져 있었지만, 그 밑에 도사린 피로감이 눈에 밟혔다. 세시안은 대회의가 시작한 이후 빠르게 지쳐갔다.

그는 가만히 쉴 수 있는 때가 거의 없었다. 시종들이 와서 쪽지를 전해주거나 귓속말을 전하고 갔다. 그러면 아롈에게 어김없이 미안해하며 자리를 떴다. 남편이 사과하는 것이 싫어서, 아롈은 연회 중에 가능한 한 남편과 붙어있지 않으려고 했다.

지난 새벽에는 나가기 싫다며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뭉그적거렸다. 귓가를 스치는 한숨이 깊었다. 아롈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겨우 이레 남았다고 일깨워주자 그러게요, 하고 웃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오늘은 아렐르가 먼저 안아주네요.

-안아줄래요?

문득 파란 술 냄새 어린 목소리가 생생하게 입에 괴어,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남편이 아롈의 뺨이나 손등에 키스하기도 전에 먼저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문 도구나 다름없는 신발 덕분에 발돋움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오셨습니까.

어깨에 턱이 툭 떨어졌다. 뾰족하고 단단해서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뺨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푹신하게 솜과 비단을 덧댄 의자에 나란히 앉자마자, 세시안은 아롈의 어깨에 기대어 속삭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운이 좋군요. 도박판에라도 끼면 한 판 쓸어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아롈도 덩달아 두통을 잊고 웃었다.

-도박 잘 못 하시잖습니까.

사교 활동의 일환으로 낀 카드놀이에서 거하게 졌다고 그제 밤에도 칭얼거리지 않았던가.

-그러게요.

그는 아예 아롈의 허벅지에 얼굴을 붙이고 누웠다.

-전하. 옷이 구겨집니다.
-갈아입으면 되지요.

세시안은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아롈의 뺨을 매만졌다. 완벽한 사교용 미소가 녹아내린 자리에 피로한 맨얼굴이 드러났다.

-아렐르는 오늘도 예쁘네요.

갑자기 팔이 툭 떨어졌다. 세시안은 열 번 가슴이 오르내리기도 전에 잠들었다. 조금만 있다가 깨워줘요, 라고 웅얼거리고.

아롈은 당황했지만, 황당함은 짧고 안쓰러움은 길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나보다. 남편은 다른 일보다도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을 제일 힘들어했다. ‘대회의가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의 목록에는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 잠들기’ 같은 것도 올라가 있었다. 아롈은 혹시 자는 사람이 깰까봐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 하고 얌전히 머리만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쯤 깨워야 하지 않을까. 아롈은 한참 멀리 놓여있는 시계를 보며 갈등했다. 깨우지 않고 시계를 가져올 재주가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발이 저리는 걸 보면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연회가 시작할 때까지 시간은 조금 남았지만 일어나야 한다. 겉옷을 그대로 입고 옆으로 누워버린 탓에, 몸에 딱 맞도록 재단한 옷이 접혀 몸에 깔려 있었다. 주름이 간 옷은 갈아입어야 하고, 옷을 다시 가져오려면 정의관에 연락해야 할 테니 시간도 걸린다. 자다 깬 얼굴에 세안도 다시 해야 하고, 눌려있을 머리카락도 다듬어야 하고…….

세시안이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옆을 보고 있어 아롈에게는 보이지 않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푹 가라앉아 꿈도 꾸지 않는 듯한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서두르면 늦지 않겠지.

아롈은 가만히 남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길게 빠진 눈꼬리와 속눈썹과 콧날과 눈동자를 품은 얄팍한 눈꺼풀과 곧은 콧날.

충동적으로 말캉한 입술을 만졌다. 잠시 움찔했지만 다행히도 깨지 않았다. 섬세하게 파인 주름을 꼼꼼히 메꾸듯 쓸어 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훔친 입맞춤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키예프는 추웠다. 여름에는 춥고, 봄과 가을에는 더 춥고, 겨울에는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아직 ‘아롈’이라는 애칭도 받지 못했던, 어린 키예프 공이었던 시절 아롈은 해가 나면 무조건 양달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머리카락이며 뺨이 햇살을 탐욕스레 빨아들여 따끈해지노라면 ‘아버지는 태양, 어머니는 달’이라는 구절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안아주면 이런 느낌일까.

순진하게 믿던 시절도 있었다. 유모가 예브게니아를 예뻐하듯, 마을 아이들의 어머니가 제 아이들을 싸고돌듯, 아롈에게도 ‘황도’에 돌아가면 그런 애정이 당연하게 주어지리라고.

문득 치밀었다.

붉은 피처럼

흘러내리는

칠칠치 못한

자기연민

고개를 들었다. 멈추려 가만히 호흡했다. 하지만 손가락에 전율처럼 달라붙은 생각은 순식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아롈은 한평생 알렉산드르를 제외한 다른 가족에게 닿아본 적이 없었다.

시녀들의 수군거림에 의하면 어머니는 아롈이 태어난 직후에 한 번 안아보지 않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이반 파블로비치가 살아있었으므로 조부는 손녀인 아롈의 탄생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파블 1세, 당시의 파블 대공은 아예 마리야를 품은 헬레네 옆에 있다고 와보지도 않았다고.

피가 이어져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쪽쪽거리는 이 남쪽과 달리, 코시카 황실에서의 예법은 접촉을 꺼린다. 예법을 발끝으로 알고 그토록 자유분방했던 알렉산드르조차 아롈을 들어서 옮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롈은 그 예법을 방패삼았다. 어머니의 손이 찰까, 따뜻할까 궁금해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 믿었다.

파블 대공이 황궁 정원에서 마리야 파블로브나를 안고 뺨에 몇 번이고 입 맞추고 얼굴을 비비는 걸 보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나무그늘에 서서 손바닥을 내밀어 보아도 떨어지는 건 나뭇잎에 걸러지고 걸러져 남은 한 줌 햇살 뿐, 그나마도 주먹을 쥐어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턱 언저리를 만지던 손이 잡혔을 때, 아롈은 깜짝 놀랐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을 잡아서 얼굴로부터 떼어 놓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도발하면 힘들어요…….”

추석 연휴 내로 챕터 9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잘 될 지 모르겠네요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원래 다음 편까지 다 써서 한꺼번에 올리는 게 읽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텐션이 떨어져서요ㅠㅠ 일단 올리고 나중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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