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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7)


 “그렇게 도발하면 힘들어요…….”

허겁지겁 추저분한 감정을 주워 담았다. 멍청하고 가엾은 어린애는 어디까지나 혼자 감당해야할 몫이니. 아롈은 간신히 갈무리를 끝내고, 진록색 눈이 눈꺼풀을 벗은 순간에는 마치 처음부터 의도했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깨워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이런 방식이리라곤 생각 못했는데요. 여긴 가시나무로 휘감긴 숲속의 성도 아니고, 제가 미녀인 건 더더욱 아니어서요.”

아롈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는 로렌 동화를 알지 못 했으므로, 그의 농담을 똑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롈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연두색 눈을 깜빡이는 사이 세시안은 상반신을 일으키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니나 다를까 겉옷에 크게 주름이 갔다. 그는 몇 번 천을 잡아당겼지만 그렇다고 옷이 펴질 리 만무했다.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게요. 곤란하군요.”

세시안이 일어나 코트를 벗자 금실을 섞어 화려하게 짠 직물을 몸에 꼭 맞게 재단하고 위에서부터 단추를 빽빽하게 달아놓은 조끼가 드러났다. 그는 팔을 뻗어 시계를 잡으려고 하다가 몸을 돌려 아롈의 옆을 짚었다.

“곤란해요. 아주 많이.”

아롈은 눈을 감았다. 잠깐의 어둠 속에 앉아, 다가오는 빛을 기다렸다. 이토록 짧은 인내에도 당장 얼어버릴 것 같았다. 십육 년의 무게가 걸려 가슴이 묵직했다. 손가락이 겹치고 얽혀들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앗!”

쇄골에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다가 그대로 몸이 넘어갔다. 틀어 올린 머리가 뒤통수보다 먼저 의자에 닿는 완충재 역할을 해준 덕에 뇌진탕만은 면했다. 아롈은 눈을 찌푸렸다. 남편이 슬금슬금 올라탔다. 세시안은 사내치곤 건장한 체구가 아니었지만 이런 각도에서 볼 때에는 압도당할 정도로 커보였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머리를 붙이자마자 잠에 빠질 때에는 언제고, 진녹색 눈은 비 온 뒤의 숲처럼 의기양양했다. 세시안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 안에는 아렐르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들이 꽤 많아요. 아까 아렐르가 먼저 안아줬을 때부터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거든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몇 가지 음란한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곧 내려가야 하고, 제 상상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화낼 거잖아요? 저는 아렐르가 화내는 게 싫어서 꾹꾹 참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렐르는 이렇게 예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손가락 위에 입맞춤이 닿았다. 머리가 뜨끈하게 아파왔다. 원래 아롈이 시녀 한 명 옆에 두지 않고 홀로 있었던 이유는 두통 탓이었다.

​“​불​공​평​하​잖​아​요​.​”​

누가 해야 할 말을. 남편은 아롈을 손바닥 위에 놓고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여유 있었고, 아롈은 언제나 휘둘리기만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입맞춤 몇 번이면 평생 배워온 예의와 자제력이 휘발되어 허둥댔다. 끝나고 나면 부끄러움에 머리끝까지 잠겨 후회해도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렐르의 자비에 기대어 부탁하건대, 저를 도발하고 싶을 때에는 시간과 장소를 가려주겠어요?”

아롈은 습관적으로 눈을 내리깔다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롈은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베고 누워있었고, 남편은 그 위에 수직으로 올라타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롈은 요즘 이블린에 유행하는 옷을 원망했다. 코시카에서는 코트 아래에 받쳐입는 조끼가 족히 허벅지까지 왔다. 하지만 로렌에서는 허리에서 끊어지는 짧은 조끼를 입지 않으면 촌뜨기 취급을 받았고, 덕분에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c​u​l​o​t​t​e​)​의​ 특정 부분이 아주 훤히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했지만 이미 목까지 달아올랐다. 세시안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알았지요?”

뺨에 하는 입맞춤은 누이에게 해도 될 법하게 순결했다. 아롈은 두통을 잠재우려 미간을 문질렀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남편은 곧 몸을 일으켜 하녀를 부르는 종을 울릴 테고, 서둘러 준비하면 늦지 않게 거울의 홀에 내려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롈은 머리가 아프고, 뼈에 사무치게 춥고,

외로웠다.

“전하. 사실은 머리가 아픕니다만…….”

“아직 열이 안 떨어졌나요? 그제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요.”

세시안은 금세 걱정 어린 얼굴로 아롈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요.”

이게 아닌데…….

“열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은 쉬겠어요? 물론 아렐르는 성실하니까 빠지는 게 꺼림칙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첫 날이나 마지막 날도 아니니까……. 아렐르?”

석고상처럼 흰 손이 세시안의 목에 감겨있는 ​스​카​프​(​c​r​a​v​a​t​)​를​ 잡았다. 얇은 실로 정교하게 짠 레이스를, 루이 오귀스트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카메오 브로치로 고정해놓았다.

카메오 안에 새겨진 시부(媤父)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마음이 약해졌지만, 아롈은 곧 마음을 다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이 자꾸 엉뚱하게 움직였다. 도무지 브로치가 어떤 구조로 매달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롈은 와락 짜증을 내기 전에 간신히 브로치를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브로치의 핀 끝에 ‘뜯겨져 나온’ 실이 나풀거리는 것은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스카프를 목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려 풀어내고는, 목에 손을 둘렀다.

“전하. 오늘 바쁘십니까.”

“글쎄요?”

의아함이 서렸다. 무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나마 남들이 반반하다고 일컫는 낯짝에 기대어, 뻔뻔하게 눈을 마주쳤다.

“곁에 있어 주시겠습니까.”

다행히도 세시안은 아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남녀 간의 관계에는 눈치가 빨랐다. 이런 유혹 같지도 않은 유혹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저는 여름 감기에라도 걸린 걸로 할까요?”

쪽.

“아렐르도 방금 옮았고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나보다. 여름의 오후 햇살이 입술을 적셨다. 뱃속이 찌르르 울려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도…….

앵앵거렸다. 습기 어린 숨이 폐부로 스며들어 유리 부스러기처럼 박혔다. 간신히 지혈했다고 생각했건만, 숨을 헐떡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배어나왔다. 파랗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새빨간.

“하아. 하아.”

옷이 차근차근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오히려 늦은 석양이 맨살을 비추어 따스해졌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뒤늦게 엄습해왔다. 너무 밝고, 부끄럽고, 자꾸 탁자 위에 있는 시계가 신경 쓰였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문을 두드릴 것 같았다. 침실의 장의자는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

“잠시만요.”

몸이 불쑥 들렸다. 아롈은 기겁해서 몸에 힘을 주었다.

“전하?”

“잠깐, 몸부림치면 떨어뜨려요.”

알렉산드르가 아롈을 들고 다니던 것과는(그 이후로는 아롈을 안고 다닐 사람이 없었다) 느낌이 사뭇 달랐다. 훨씬 불안하고 흔들거렸다. 목에 팔을 두르고 잔뜩 긴장하고 있자, 세시안이 침대에 아롈을 내려놓고는 팔을 두드렸다.

“아프면 편하게 쉬어야지요.”

마음을 훤히 읽힌 듯해서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신발을 벗겨주었다. 품에 안겼다. 곧 ​속​옷​(​c​h​e​m​i​s​e​)​마​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석양이 눈꺼풀에 비추어 눈을 꼭 감아도 검지 않고 붉었다. 수치심이 덜어지자 죄책감이 그 자리를 마저 채웠다. 바쁜 사람인데. 하지만 욕심이 죄책감을 목 졸라 죽여 버렸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동안 세시안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오늘 무슨 일일까요.”

정사(情事)는 아롈이 결혼 서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등에 짊어진 의무였다. 아내로서의 의무. 로렌의 마담 라 세르로서의 의무.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을 뱃속에 품고 낳아 가문을 번창시켜야 하는 의무.

남편 역시 똑같은 의무를 지고 있었다. 아롈을 안고, 아롈에게 후계자를 잉태시킬 의무.

결혼 서약서 안에 쾌락이나 정서적 만족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아니 대부분의 남자들이 후계자는 아내에게서 얻고 즐거움은 창녀나 정부에게서 찾았다. 여자들도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아롈은 결혼이 결정된 순간부터 각오했다. 얼굴 모를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 때문에, 뭐든 감당하리라고 몇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아롈은 도저히 정사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는 취급할 수 없었다.

머리가 한층 아파졌다. 썰매 끄는 개들이 두개골을 부수고, 그 안에 든 따끈한 뇌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술과, 손끝과, 품의 온기를 탐닉하느라 통증은 곧 뒷전이 되었다. 눈에 맺힌 눈물이 무엇 탓인지도 알 수 없었다.

코시카 정원의 햇빛은 영영 손에 쥘 길이 없어졌지만, 근육 속에 정맥이 펄떡이는 팔은 쥘 수 있었다. 손가락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쾌감에 일그러진 눈은 검은색으로까지 보이는 진록색으로 아롈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롈은 끈질길 정도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응해주었다. 바르르 떨며 숨을 토해내는 순간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를 봐주세요.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이번 화는 신 안 썼어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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