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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18)


 내가 뭘 잘못했을까.

소년은 아이를 끌어안고 멍하니 생각했다. 작았다. 채 식지 않아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정수리에 검은 머리칼이 몇 가닥 붙어 있었다. 얼굴이 꼭 개구리 같아서, 울음도 토하지 못하던 입술에 실없는 웃음이 맺혔다.

말도 안 되게 이른 결혼은 분명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생긴다고 했을 때에는 정말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설렜다. 아이의 이마에 입 맞추고, 성호를 긋고, 묻었을 때까지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현실 같지도 않았다.

아이는 다음에 또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일 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니, 주님의 자녀로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부인을 새로 맞아야 해서 들인 약혼녀가 신께 서원하겠다며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웃으며 보내줄 수 있었다. 미셸에게 농까지 쳤다.

-주님께 진 건 어쩔 수 없잖아.

조금 허전했지만, 금세 괜찮아졌다.

그 다음은 늦둥이인 남동생이 죽었다. 여동생 둘은 죽고, 하나는 수녀원에 들어가고, 하나는 결혼해서 부르고뉴로 가고, 나머지 둘은 병이 위험하다며 시골에 내려갔다. 남동생과 자주 어울리던 이복 남동생도 지방으로 보냈다.

하나뿐인 후계자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한 이모가, 미셸을 끌고 오를레앙에 내려갔으므로 세시안은 혼자 남았다. 그 때 이블린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았을까.

-따라오겠어?

그간 두껍게 쌓인 편지들이 흑갈색 눈을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는 빈정거릴 수 있었다. 공작의 관이 황제의 관보다 매력적일 것 같지는 않노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정중히 그 손등에 입 맞추어 전송(餞送)했다.

-귀환하는 길 무탈하시길. 미래의 아스투리아스 여공.

처음에는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구석에 있는 서랍에 두었다. 삼일 뒤에 전부 태웠다.

실패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목매단 시체까지 와서는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눈물을 먹고 가라앉은 공기가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사람의 언어가 아닌 흐느끼는 짐승 같은 숨소리 뿐. 그 순간,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 지긋지긋해. ‘또 우는 거야?’라고, 발뺌할 수조차 없게 선명하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시체를 만들었다.

실패는 영혼을 좀먹는다. 그는 뿌리를 벌레에게 내준 느티나무처럼 후회했다. 왜 그 때 조금 더 잘하지 않았을까. 있을 때 잘 할 수 있었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자신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리 후회해도 손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지도 않았다.

“전하?”

그는 생각을 흩어버렸다. 살아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할 생각들이 아니었다. 그는 풍성한 금발이 솟아오르는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예?”

부드러운 미소로 얼굴을 덮은 채, 무슨 일이냐는 듯이 웃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소녀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손을 들어 올리려 하기에, 먼저 선수를 쳐서 금빛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아롈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소리가 좋아서, 눈꺼풀에 몇 번 입 맞추었다. 정사 직후의 공기는 나른하게 풀려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물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아롈은 다리 다친 야생동물처럼 경계가 심했다. 사람을 다루고 구슬리는 데에 능한 그로서도, 그 경계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롈이 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뿐이었다.

달콤한 말, 다정한 행동에 얼굴 붉혀도, 건드릴 수 없는 주제들이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었고, 이 아름다운 소녀는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완고하게 자기의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드물게 적극적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한참을 가늠해보던 그는 조심스레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렐르.”

“예?”

괜히 이만큼 쌓아놓았던 유대감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또 다시 날을 세우고, 눈을 치켜뜨며 벽을 세우진 않을까. 간신히 이만큼 친해졌는데.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게 발을 디뎠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잠시간의 침묵. 긴장한 숨소리. 발갛게 달아오른 그대로 박제되어 곤란해진 얼굴.

그는 차분히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시 휙 떠밀리더라도 실망하지 않도록, 와르르 무너지는 일이 있더라도, 짧게 슬퍼한 뒤 다시 쌓을 수 있도록.

“그냥, 조금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더듬더듬 아무 것도 아닌 말이 흘러나왔을 때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고 웃었다.
“그랬군요.”

이리 와요. 속삭이자, 말랑한 뺨이 가슴에 닿았다. 아롈의 체온은 그보다 낮아서, 품 안이 서늘했다.

더 묻지 않고 여기저기 입 맞추며 빈둥거리다 시계를 보니 의외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급히 치장을 다시 하고 내려가면 단순한 지각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과감히 먹고 무도회는 건너뛰기로 했다.

하지만 서류만은 건너뛸 수 없었다.

옆방에서 아롈은 옷을 갈아입고 왔다. 새파랗고 단순한 비단옷을 걸치고, 흰 베일을 썼다. 긴 머리는 어설프게 말아 올리고, 눈 쌓인 나뭇가지 모양의 아름다운 관을 썼다. 베일 옆으로 진주가 조롱조롱 늘어졌다.

지나가듯, 틀어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머리를 올렸으리라는 것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다. 손질에 능숙한 시녀들이 정교하게 땋고 꼬아서 올린 머리모양이 아니었다. 한 갈래로 땋아내려 둘둘 말고, 핀 몇 개로 아슬아슬하게 고정시켜놓았다.

그런 점이 사랑스러워서,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그 너머로, 제비꼬리처럼 채 올라가지 않고 흘러내린 머리채 한 가닥이 있다는 사설은 굳이 붙이지 않기로 했다.

마주 앉은 채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이마가 간질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망설이는 얼굴에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의례적으로 웃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전하."

역시.

"무슨 일인가요?“

"더 캐묻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물어보면 이야기해 줄 건가요?"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조심스레 갈무리해서 올려두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에 올라앉은 진주가 뽀얀 빛을 발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취했을 때는 고개까지 저으며 단호하게 거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하게 여지를 남기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음이 변했다는 증거다. 한층 두근거렸고, 그는 당장이라도 몰아쳐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잡아누르는 데에 열중해야했다.

“아렐르, 예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아렐르가 원할 때 대답해주면 된다고요.”

“그 때, 그 취했던 날에.”

“아…….”

고운 얼굴에 언뜻 수치심이 번졌다. 그녀는 언뜻 할 말을 찾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신부는 임기응변에 약했다. 당황하면 금세 허둥지둥했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튈 때마다 이야기를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아렐르를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 때 제가 얘기했던 게 기억이 안 나는군요?”

“예.”

“그럼 이렇게 할까요?”

“무얼 말씀이십니까?”

“제가 다음에 무언가를 물어보면 반드시 대답해 주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대신 저도 아렐르의 질문에 한 가지를 대답해주지요.”

허리가 곧게 펴졌다. 술자리에서의 놀이처럼 받아들일 정도로 가벼운 어투로 이야기했는데도, 소녀는 마치 대단히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대공이라도 된 양 바른 자세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좋은 하루를 보냈느냐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으신 것은 아니실 거라 생각합니다.”

“네, 물론이지요.”

“만일 진심으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로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로서는 웃음이 나왔다.

“글쎄요. 그게 걱정된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로부터 거의 오 분 가까이, 소녀는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질문을 하나 붙였다.

“오가는 이야기는 비밀입니까?”

“물론이지요. 아렐르도 제 비밀을 지켜주겠지요?”

금빛 속눈썹에 돌연 결의 비슷한 것이 맺힌 듯했다. 그녀는 갑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맹세하겠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받은 십자가에 걸고.”

무려 성물에 거는 맹세라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거운 이야기였다. 세시안은 난감해졌다. 웃으며 가볍게 한 이야기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웃으며 그건 아니라고 털어버릴까. 아니면.

로렌의 후계자는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숙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맹세하지요. 제 문장의 사슴뿔에 걸고.”

안녕하세요, 마롱나무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일 시험인데 시험 공부하기가 너무너무 싫어서 한 편 써서 올립니다.
21일까지 기말고사예요. 기말고사 끝나고 1주일 쉰 다음 6월 30일에 다음편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무 언질 없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연재주기 갖고 어떠한 장담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냥 완결 낸다는 것만 ​믿​어​주​세​요​.​.​.​ㅠ​ㅠ​ㅠ​ 최소한 방학 동안에는 성실 연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랜 기간 글을 안 쓰다보니 손이 꽤 굳었네요ㅠㅠ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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