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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1)


 보르디의 필리프는 점잖게 웃었다. 외눈 안경 덕분에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은 부드러워 보였다. 깡마른 몸에 꼭 맞도록 재단한 코트에는 주름 한 점 없었다.

대회의의 지리멸렬한 논쟁은 서너 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새로운 함대 창설은 한두 푼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것도 항구에 주둔해 있는 전열함이 아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순양함 따위에 그렇게 많은 돈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였다.

함대 창설을 굳이 이 시기에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칼레는 똑바로 된 이유를 아직 대지 못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공가는 반대했다. 대공가의 표는 여섯 표가 있다. 그리고 황제에게 한 표, 세르에게 한 표. 대공가 세 개의 반대를 얻으면 완전한 승리, 두 개의 반대를 얻으면 절반의 승리.

과연 칼레 대공가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합의가 있는 것일까. 필리프는 몇 마디를 나눠보고는 알고 있는데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실 필리프로서도 용에 대한 보고서가 공표되면 피곤해졌다. 보르디와 오를레앙, 황실이 합심하여 필사적으로 숨긴 일이다. 이게 밝혀지면 지금까지 짜놓은 판이 완전히 엎어지는 수가 있었다. 되도록이면 그냥 함대를 내주고, 용에 대한 것은 숨겨버리는 것이 나았다. 가결 후 용에 대한 사실을 공표해버리면 무얼 하겠는가. 대회의는 이미 끝나버렸고, 내년의 일을 준비할 시간은 일 년이나 남았는데.

칼레는 찬성, 오베르뉴도 찬성일 것이다.

나바르는 반대. 나바르에는 바다가 없다.

보르디는 무조건 반대였다. 이미 뒷거래를 하지 않았는가. 세르는 필리프가 백만 루아르와 칼레의 세력 축소를 원한다고 알고 있었다. 아들인 아를랭 공작을 통해서 세르가 전해온 부탁에, 필리프는 흔쾌히 승낙했다.

남은 대공가는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부르고뉴는 마담 오거스틴이 대공비로 시집간 가문이었고, 오를레앙은 황후의 가문이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반대를 해준다면 세르의 승리가 아닌가. 그의 시선이 절로 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황후도, 마담 라 세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본느와 소피와 함께 모임을 가진다고 했다. 황후는 몸이 아프다고 했고.

아마 이블린에 들어가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나 있겠지. 필리프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짝 없이 홀로 앉은 남자의 얼굴은 평온하고 단정했다. 아마 둘 모두에게 손을 썼을 것이다.

대공비와 황후가 그토록 서로를 물고 뜯어도, 오를레앙은 그간 제법 황실의 ‘충성스러운 가신’ 노릇을 해왔다. 황후는 오를레앙 대공녀이며, 오를레앙 대공자는 세르의 친구이자 마담 리젤로트의 약혼자였다. 어차피 이런 일로 둘의 오랜 친분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저 작은 균열이면 된다. 오를레앙 역시 무조건 믿을 가문이 못 된다고. 그들도 이익에 따라 배반할 수 있다고. 언제까지나 오를레앙이, 가장 맨 앞에서 무릎 꿇지는 않으리라고. 무릎을 꿇어 고개 숙이는 순서는 바뀔 수도 있노라고.

그는 이 일을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오를레앙 대공비인 루이즈 안의 불안을 자극하여 황후와 접촉했고, 파혼과 혼사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비록 리젤로트의 혼전 임신은 계산 밖의 사고였지만, 이 일을 빌미로 오를레앙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뜯어내기로 합의를 보지 않았던가. 물론 딸아이는 대공비 자리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세상에 어디 남자가 그 뿐이라던가.

표결의 시간이 왔다. 필리프는 가장 먼저 반대표를 던졌다. 오를레앙 대공의 얼굴이 언뜻 흔들렸다. 흔들릴 필요 없다. 그저 약속한 대로만 하면 된다. 그 책 속에 끼워놓은 단순한 암호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오를레앙이 아둔하지는 않을 테지.

나바르는 반대, 칼레는 찬성, 오베르뉴 찬성. 세르는 반대, 황제는 반대.

부르고뉴가 찬성표를 던졌다.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는지, 세르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현 카스티야 왕비가 부르고뉴의 대공녀 카트린느가 아닌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캐스팅 보트는 오를레앙에게 쥐어졌다. 그가 반대표를 던지면 황제가 전권을 행사할 필요 없이 일이 부드럽게 끝난다. 그리고 찬성표를 던져도 황제가 전권을 행사해서 판을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동점일 경우, 세 번에 한해 황제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 권한이야말로 로렌에서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황제의 권한을 ‘절대’에 가깝게 끌어올린, 루이 조제프 황제의 마법이었다. 올해 루이 오귀스트 황제는 두 번의 기회를 사용했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를레앙이 표를 던졌다.

찬성이었다.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회의가 끝나자마자, 세시안은 황제의 마차에 불려갔다. 오랜 침묵 후 떨어진 말은 뺨을 후려갈기듯 싸늘했다.

"죄송합니다."

"차라리 지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그러느냐."

당연한 사과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뜻이었고, 거의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은 후계자에게 하는 말로는 더없이 모욕적이었다. 세시안의 숨이 잠시 가빠졌다가, 가라앉았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내 사랑하는 아들아.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마. 네가 만회할 다음을 위해 용이 한 번 더 나타나게 해달라고!"

"..."

세시안은 이블린에 도착할 때까지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질책을 참아냈다. 그는 혀를 깨물며 인내했다. 괜히 믿었노라는 질책은 뼈아팠다. 그는 부황의 건강이 나빠진 요 몇 년 간 거의 참견을 받지 않고 일을 처리해왔다. 황제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확실히 안일했다. 오를레앙은 바다가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다. 오히려 부르고뉴 쪽에 공을 들였으면 들였지, 오를레앙에는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함대 창설로 인해 오를레앙이 볼 피해가 상당했으므로. 그런데 찬성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칼레와 오베르뉴가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했기에 넘어갔을까.

아들을 앉혀놓고 온갖 독 같은 말을 토하던 황제는 어느 순간 안색이 나빠졌다. 너무 무리한 것이다. 그는 손수건에 대고 기침을 했다. 가래에 피가 묻어나왔다.

세시안은 직접 황제를 부축하여 침실로 인도했다. 황제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얼굴이 누렇게 뜨고, 입술이 퍼렇게 물들었다.

황제는 폐부를 토할 듯한 기침을 한참 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

그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어 인사한 뒤 침실을 나섰다. 침실 문 밖에는 황제의 공식 정부가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인사를 하고 그녀를 스쳐지나, 위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사람이 쓰지 않는 방은 표가 나기 마련이다. 분명 청소하고 손질하여 깨끗한데도 냉기가 감돌았다. 그는 웃옷을 벗어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어질어질했다. 하루 쉰 보람도 없이, 회복해놓은 기력이 빠지며 삽시간에 피곤해졌다. 온 몸의 피와 기력이 바닥에 가라앉는 듯 지쳤다.

“데리러 가야 하는데.”

소리 나지 않게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어제 하루 쉬었다. 오늘은 나가야 한다. 이틀이나 아프다는 핑계로 빠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찔할 기력이 없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면 딱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눈꺼풀이 눈을 덮고, 어둠이 내렸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리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려 왔습니다.

또박또박 한 어절 한 어절 끊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목에 힘을 주어 말해 버릇해서 그렇지 목소리 자체는 가늘고 높았다.

-부디 전하의 사정을 우선해주십시오.

그는 쓰게 웃으며 눈을 떴다. 아마 오늘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도, 아내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은 민망해서라도 물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안다.

하지만 서운해 할 테지. 시무룩해져서 축 늘어지고, 그런 기색을 숨긴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턱을 살짝 들 것이다. 어쩐지 싫었다.

보고 싶었다. 얼굴을 보고, 발간 뺨을 쓰다듬고, 손을 잡고, 입 맞추며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럼 멀뚱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다가, 귀를 붉히고, 미간을 문지르다가, 목까지 발개져서 파드득 파드득 날갯짓할 텐데.

어설프던 LSJX가 그를 부르는 듯했다. 세시안은 피로에 잡혀 끌려가기 전에 벌떡 일어나 웃옷을 다시 걸쳐 입고, 머리를 정돈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세르.”

벨망 경이었다. 세시안은 한순간 약속을 물릴까하는 짧은 미련에 시달렸다. 그만큼 피곤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유혹을 떨쳐내고 웃었다.

“너무 일찍 왔군요. 무슨 일이 있나요?”

벨망 경의 뒤에는 자비관에서 시녀로 일하는 그의 여동생이 서 있었다. 이야기를 듣자 현기증이 났다. 세시안은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비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겨주신 말들을 항상 소중하게 보고 있어요.

P.S. 이번 챕터가 너무 길어져서 두 챕터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번 챕터를 5~6화 내에 끝내는 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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