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3)
[멍청하긴.]
귀가 녹아버리는 듯한 목소리에, 아롈은 당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뭐야, 이 녀석이 저지른 일이었나.
“뭐냐. 갑자기.”
[내가 보다보다 답답해서.]
갑자기 눈앞에 용이 나타났다. 작고 귀여운 푸른 짐승이 아니라,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이 기이한 빛을 내뿜는 키 큰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구슬처럼 고운 조롱이 흘러나왔다.
[그냥 고개 한 번 숙이면 죽는 것도 아닌데. 울고 불든, 기절을 하든 할 것이지. 그럼 만족해서 그만할지도 모르는데 그 자존심 한 번이 뭐라고 고개 뻣뻣이 들고 대항해?]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아롈은 황후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황후 역시 아롈에게 왜 이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져주어야' 하는 건가. 아롈이 윗사람으로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왜 남편의 어머니에게 숙이고 굽혀서 그 부당한 욕망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아롈은 화를 풀어낼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 짐승 앞에서라면 평판도, 남편의 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별 뜻 없이 한 언행이 며칠을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다. 비뚜름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고 말에 칼을 섞어 빈정거렸다.
“과연 짐승이라 자존심이 뭔지도 모르는구나. 대관절 긍지 없이 살아갈 이유가 있다더냐.”
날 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데, 잠시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 위화감을 곱씹을 틈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여전히 쓸데없는 것에 목숨 거네.]
“쓸데없는 것이라니. 과연 긍지라곤 가져본 적도 없는 짐승답군.”
[마음대로 지껄이렴. 그래봐야 한 번 굽히면 끝날 일로 몸을 고생시킨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으니.]
“네가 사람의 무얼 안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거지.”
[있지, 그래봐야 너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야.]
“뭐?”
아롈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왜 갑자기 잠들었는지, 그리고 왜 하필 이 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적당히 화를 내고 물어볼 생각이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날카로운 분노뿐이었다.
아롈은 순발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미 짜놓은 틀에 맞추는 것은 잘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때문에 중요한 말싸움을 할 때에는 미리 상대의 반응과 반응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일일이 생각해놓곤 했다. 그리고 건방진 용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일 때의 대응을 생각해놓은 바는 없었다.
아롈의 어깨가 할 말을 찾아 들썩이는 동안, 용이 기어가듯 걸어가 촛대를 들었다.
촛불 빛이 갸름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경에, 아롈은 수치스럽게도 겁을 먹었다.
촛대와 어두운 방과 길고 검은 머리의 여자.
릴레벨트가 입이 찢어질 듯 미소를 머금었다.
[아, 과연, 효과 있네.]
그녀가 한 걸음 걸어왔다. 아롈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애초에 벽에 붙은 탁자 앞이었다. 물러서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릴레벨트는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호박색 홍채 안에 굳어버린 곤충 같은 동공이 새카맸다.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다 보고 있었지. 넌 네 남편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 그 미남도 아닌 사내새끼가 어디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배를 갈라 죽여 창자를 드러낸 시체도 너보다는 속을 덜 드러냈겠어.]
“닥쳐라.”
[시어머니에게도 좀 그러지 그랬어. 네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성질을 죽이고,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짜증도 억누르고,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애교라도 떨면 쓰다듬어주었을지 누가 아니?]
릴레벨트는 까르르 웃으며 아롈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롈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그 손을 뿌리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짓이었지만 용은 의외로 순순히 앞발을 치웠다.
[왜 그래? 넌 이렇게 쓰다듬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롈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달고, 인형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기다려도, 네 애교는 그냥 그래. 꼬리 흔드는 강아지는 강아지인데, 너무 미약해서 티도 안 나. 그런데 애교도 안 떨면 누가 널 예뻐해 주겠어?]
“계속 그렇게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요량이라면…….”
[고귀한 혈통을 지닌 공주님, 아니 여대공 전하. 내가 장담하지. 너는 분명 훌륭한 태자비고, 훌륭한 황후가 될 거야. 네 남편의 곁에 묻히고 썩어문드러진 다음에도 사람들은 널 기억하겠지. 그리고 넌 영원히 사랑받지 못 할 거야. 그러니까 좀 애써보라고. 그런데 그 해결법이 그렇게 듣기 싫어?]
새파란 혀가 간교하게 날름거렸다. 푸른 바닷뱀이 몸을 칭칭 감고 귀에 독을 불어넣는 듯했다.
릴레벨트가 촛대를 들어올렸다. 아롈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맞을까봐 무서워 어깨를 움츠렸다. 벨타는 장난치듯 은촛대를 들이댔다. 아롈은 확신했다. 이 용은 아롈의 기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협박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아롈은 몸을 빼다가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융단이 닿았다. 릴레벨트가 따라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나마 촛대가 좀 멀어지니 살 것 같았다.
[정 싫으면 다른 방법도 있지. 네 힘을 써.]
이것이야말로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웃기지 마.”
[왜? 넌 할 수 있잖아. 힘을 써서 시어머니랑 시아버지랑, 저 북쪽에 있다는 네 어머니를 죽여 버려. 불안해할 필요도, 이렇게 혼자 숨어서 질질 짤 필요도 없잖아? 자, 문제 해결!]
릴레벨트는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만일 쓸 거였다면, 그 날 썼을 것이다. 갑자기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어머니 앞에 잠옷 차림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그 날 밤. 파블 1세의 잘린 목을 앞에 두고, 강제로 어머니의 앞에 무릎 꿇어 여제 폐하께 경의를, 이라고 충성을 표시했던 그 굴욕의 날에!
아롈은 뒤엎을 수 있었다. 분명히,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키예나의 정통을 이어받은 푸른 피의 가장 정당한 계승자로서, 황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아롈의 명예와 약속 때문이었다. 명예를 잃고 황위에 올라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반 년 동안 유폐되어 있으면서, 아롈은 내내 후회하고, 유혹에 시달렸지만, 버티고 참았다. 긍지를 지켜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짐승의 농간에 넘어갈까보냐!
“촛대 치워. 네까짓 게 날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해볼까?]
촛대가 다시 이마 근처에서 오갔다. 은촛대는 충분히 크고 묵직해보였다. 맞으면 두개골이 바숴지겠지. 그리고 아주 아플 것이다.
“넌 어차피 날 못 죽이잖아.”
-내가 널 지키겠다.
정식으로 이름을 나누고 계약한 용. 아무리 용이라도 이름을 건 약속만은 어길 수 없다. 이름이란 곧 영혼의 뿌리이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에게 이름을 건 약속은 곧 생명이다. 따라서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어기면 마법을 소실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과 달리 용은 마법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생물이다. 아롈과 달리 그녀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용은 자신의 이름을 아는 마법사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조차 할 수 없다. 툭 쳤는데 우연에 우연이 겹쳐 죽는다면 몰라도, ‘머리를 때리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때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죽어도 그걸 쓸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하찮은 도발 그만하고 내 앞에서 비켜. 역겨우니까.”
혹시라도 다른 방에 새어나갈까, 목소리를 죽였지만 분노가 묻어나왔다.
[어머, 들켰니? 압박을 주면 겁먹어서라도 쓸까 해서 이렇게 분위기 조성도 해봤는데.]
넌 이걸 두 번째로 무서워하더라. 용이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 시어머니만 죽여도 네 인생 상당히 편해질걸? 안 들키고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잖아.]
“그리고 너는 그 부산물을 얻어먹으며 또 사람을 죽이고?”
[섭섭해라. 네가 진짜 죽어도 쓰지 않는 통에 내가 지금껏 자면서 힘 모은 거란다. 저번에 먹은 애들 소화도 덜 됐어.]
신물이 올라왔다.
“안 쓴다고 했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면 당장 꺼져라. 앤을 부를 테니 소금물에서 헤엄을 치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달라 해서 배터지게 처먹든 네 맘대로 해. 내 눈앞에서 사라져.”
[왜 이렇게 다급하게 굴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 아, 네 남편한테 들킬까봐 그래? 슬슬 올 시간이라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 슬슬 올 시간이 아닌가. 시계를 찾으려 했지만 시계는 저 멀리 있었고, 아롈의 바로 앞은 릴레벨트가 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가 키득였다.
[내가 네 남편 올 때까지 여기서 이러고 버티겠다면, 넌 어떻게 할래?]
“미쳤나?”
[내가 강요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 마법을 써. 아니면 이대로 있을 거야. 그러면 어쩔래?]
“이 무슨 어린애 투정이야!”
[원래 용은 변덕스러운 생물이랍니다, 아름다운 여대공 전하.]
아롈은 다급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끝까지 안 쓰고 차라리 마녀로 몰리는 걸 선택하겠다면?”
[그럼 같이 죽는 거지, 뭐. 그런데, 넌 그거 싫잖아?]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으음. 그냥 오늘 네 상태가 불안정해서 충동질 좀 하면 넘어갈 것 같다 싶었어. 그리고 지금은, 음, 이래도 쓰지 않는다 싶으니까 어깃장을 놔보고 싶네. 그러면 안 되니?]
어느 정도 이 짐승도 상황을 납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연중에, 이 짐승도 아롈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정치와 암투와 인간관계는 어디까지나 사람인 아롈의 몫이고, ‘저것’에게 적용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저것은 짐승이다. 사람 세계에 끼어든 바다짐승.
릴레벨트는 손을 뻗어 은촛대를 탁자에 올리고, 양손으로 아롈의 뺨을 감쌌다. 그 손, 아니 앞발이 섬뜩하게 차가웠다. 아롈도 어지간히 손발이 찬 편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더운 여름인데도, 겨울바다 같았다.
“치워.”
[싫어. 억울하면 힘을 써서 놓게 해보든가.]
아롈은 그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릴레벨트의 근력은 아롈보다 훨씬 강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놔.”
[싫어.]
릴레벨트가 키득거렸다.
[이렇게 보니까 너 얼굴은 참 예쁘구나. 아무리 예뻐도 사랑받진 못하겠지만.]
“너, 너…….”
갑자기 여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치마폭에 작은 보석이 툭 떨어졌다. 아롈은 눈을 깜빡였다.
저도 모르게 쓴 건가? 아니, 쓰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마법을 쓴 직후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고양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왜?
답은 벨타가 주었다.
[쳇. 왜 지금 다 떨어지지.]
아롈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급하게 움직였던지 탁자의 장식부분에 등을 부딪쳐 아팠다. 보석이 바닥에 떨어졌다. 치맛자락을 손으로 쥐고, 발을 들어 힘껏 보석을 밟았다. 천천히 힘을 주자 딱딱하고 동그란 것이 신발을 넘어서 발바닥에 느껴졌다.
[아파. 야, 야.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오히려 그것은 죄책감을 덜어주는 요인 중 하나였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따뜻한 피가 도는 짐승도 아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흉악한 짐승, 그것도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웃기는 짐승일 뿐이다.
몇 번을 밟아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당연하다. 저렇게 딱딱한데 죽기는커녕 흠 한 점 날 리가 없잖은가. 그걸 깨달은 아롈은 홀린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어두웠고, 좀처럼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고개를 숙였더니, 원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었다.
아롈은 허리를 숙여 큼지막한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람의 급소에 대해서는 검술을 익히며 꼼꼼하게 배웠다. 사람의 동맥은 허벅지를 제외하면 은근히 깊은 곳에 있다. 손목 동맥은 뼈 사이에 있으므로, 아예 박아 넣지 않는 이상 찌른다고 죽을 일은 없다. 살갗 아래로 파랗게 드러난 정맥만 끊어도 피는 충분할 만큼 나올 것이다. 아롈은 스스로가 ‘냉정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행동하라, 다만 냉정해라.
아롈이 그 순간 지킨 것은 가언의 앞부분뿐으로, 전혀 냉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일에 대한 생각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잠시 유리 조각을 왼손 손목 피부 아래로 비치는 핏줄 아래에 대어 위치를 가늠하다가, 높이 들어 내리찍었다. 아니, 내리찍으려 했다.
문이 열리고, 방이 확 밝아졌다. 명순응을 하지 못한 탓에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아렐르.”
손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