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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5)


“지금 저는 아렐르에게 참견하고 있는 건가요.”

 말이 혀끝을 떠나는 순간 아차 했다.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치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거두기 싫었다. 짧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세시안은 곧바로 부정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상처 입었다.

아롈은 그대로 구석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 이 일에 무슨 관련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없단 말인가? 아롈은 매끄러운 페란토 어로 독백하듯 쏘아붙였다.

“오늘 일은 저와 황후 폐하 사이의 일입니다. 저는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련이 없는 사람에는 제 어머니의 가문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말투에 희미한 자조가 섞여들었다.

“보르디를 말씀하셨습니다만, 보르디는 제 어머니의 가문일 뿐입니다. 이 일에 왜 보르디가 항의를 해야 합니까? 전하께서는 항의를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세시안은 다소 의아해졌다. 그 노회한 공작이 이 소녀를 정말 팽개쳐둘 리가 없다. 보르디 대공의 외손녀, 마담 라 세르이자 미래의 황후인 소녀는 그의 중요한 무기가 아닌가.

“아렐르. 저는 지금 보르디의 항의가 걱정되어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에 자꾸 캐물으시는 겁니까?”

“아렐르가 걱정되어서요.”

연둣빛 시선이 찔린 듯이 솟구쳤다. 그는 아내의 반응에 쓴웃음을 삼켰다.

“생각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못 본 척하고 잊어버리라는 건가요?”

그는 높아지려 하는 음성을 억눌렀다.

“안 됩니까?”

손이 타오르듯 아파왔다. 아직도 높이 쳐든 손끝에서 한순간 반사된 유리조각의 빛이 망막에 새겨진 듯했다. 하지만 손의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렐르. 지금 나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대략의 상황은 들을 수 있어요.”

추궁하는 듯이 들리지 않도록 말을 끊고 호흡을 조절했다.

“하지만 제가 듣고 싶은 건 아렐르의 이야기예요. 저는 아렐르가 걱정되고, 아렐르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제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답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매끈한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자작나무 가지 같은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릴 때마다 색색의 빛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세시안은 손깍지를 낀 채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생각이 휙휙 오갔다. 한숨 한 번 쉬고 못 이기는 척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못 들은 척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까, 차가운 얼굴로 싫다고 잘라버릴까? 그럼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생각이 진행되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세시안은 어느 순간 생각을 멈추고 눈앞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분명 협상안을 던져두고 상대의 선택을 기다리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차분함이야말로 그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업무 영역일 때의 이야기다. 이미 이건 감정의 영역이다. 그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쓸 수 있다. 웃으면서 살살 구슬릴 수도 있고,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알아서 일을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긴 고민을 마친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그는 내심 기대할 수밖에 없었고,

“맹세에 의지해서 물으시는 거라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 기대는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세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맹세? 비밀이라도 하나 교환하자는 뜻에서 던진 농담이었다. 진지해 보이기에 장단을 맞추어주기는 했으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일에 무언가를 거는 정식 맹세가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강제성이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대답을 들은 것 같군요.”

아롈은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더 기다리는 듯했다.

세시안은 점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열 살도 넘게 어린 여성에게 이런 옹졸한 짓이라니. 이것은 빈정거림이 아닌 거짓말의 영역이었다. 더 신산한 것은 이런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대답을 철회하고 사과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격앙되어 있었다.

열 살, 아니 다섯 살만 어렸더라면 내 이야기를 들으라고 소리를 치거나 화난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 몸을 휙 돌려 사라졌을 것이다. 몸에 밴 차분함으로 내리누르고 있지만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아롈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미간을 문질렀다. 그녀의 습관 중 하나였다. 세시안은 그 동작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선수를 쳐서 직접 미간을 문질렀을 때, 아롈은 연둣빛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리웠다.

세시안은 별 수 없이 자신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지금껏 필사적으로 아롈에게 다정했다. 아무리 여성에게 상냥하게 대하도록 교육받아왔다고 해도, 처음 보는 여성에게 그런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평범한 남성이라면 으레 가질 법한,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호의’도 느끼지 못했다.

처음 그를 지탱한 것은 순수한 책임감과 의무감이었다. 그는 또 아내를 잃는 게 싫었다. 어머니에게 계승권을 빼앗기고 홀로 남쪽에 떨어진 소녀를 잃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좋은 남편이 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목숨을 깎다시피 하여 시간과, 다정한 말과, 웃음과, 입맞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주었다.

물론 책임감만으로 남편 노릇을 해온 것은 아니었다. 아롈이 그에게 반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위적이나마 온 힘을 다해 애정을 퍼부으면서도 냉랭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씩 좋은 점이 눈에 들어왔고, 호감은 애정으로 변했다. 새로 싹튼 감정은 애정을 재생산했다. 하지만 그가 소모되는 것을 온전히 채울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의 상냥함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아니었다. 무한정 솟아나는 것도, 누구에게나 아무렇지 않은 듯 베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시안은 그가 아롈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훨씬 무리하고 있었고, 그가 동나는 것 역시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대회의가 끝나면 한동안 쉴 생각이었다. 그쯤이면 감정은 더 깊어질 테고,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다 그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오를레앙을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황제에게 질책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한결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로렌의 후계자이자 황후의 아들이자, 한 소녀의 남편은 나가떨어질 듯 지친 채로 여러 개의 반지를 낀 흰 손을 바라보았다. 물어뜯었는지 손끝이 엉망이었다.

그는 무심코 그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을 쥐었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내뿜는 열기가 정수리를 달구고,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가슴팍으로 도망쳤다. 이윽고 이마로 낭랑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진심이십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예.”

세시안은 조소를 섞어 생긋 웃다가 덜컥 입매를 굳혔다. 고개를 들자 아롈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하. 대체 왜 제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 쓸 상황이 아니라 일주일만 쉬고 오려고 했는데 너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개강하긴 했지만 최대한 많이 쓰려고 해요.
세시안 시점 너무 전개하기 어렵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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